|
십자가를 지라
240324낮(고난<종려>주일) (눅9:23)
<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아멘
자기 십자가가 뭘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부여한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십자가 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내가 지고가야 할 사명을 가장 무서운 형벌인 십자가에 비유한 것은 그만큼 사명이 무겁고 막중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고 싶지 않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19:17절에도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감당해야할 사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몫의 십자가를 어떻게 져야 할까요?
1. 십자가는 자원하여 져야 합니다.
벧전4:12-14절입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5:1-2절입니다.
<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벧전2:19-21절입니다.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기꺼이 하며”
“죄를 짓고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20절)라고 했습니다.
죄짓고 당하는 고난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자신은 죄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듯이 내가 십자가를 짐으로 누군가의 짐이 가벼워지고, 누군가가 살고, 누군가가 구원 받을 수 있음으로 지는 것이 십자가 입니다.
*요셉을 한번 볼까요?
창39장에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강간죄를 뒤지어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자기가 누명을 그대로 쓰고 감옥에 갑니다. 자기가 죄가 없음이 판명되면 대신 보디발의 아내는 죽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가정은 풍지박살 납니다. 요셉이 누명을 그대로 쓰고 감옥가고 침묵함으로 보디발 아내를 살리고, 그의 가정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 요셉을 더 크게 쓰셔서 민족을 구원하는데 쓰셨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자원하여 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처음에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 하셨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마26:39절입니다.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질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과 기도한 후가 다릅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도망했습니다.
욘1:1-3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욘2:1-9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가 기도한 후에는 니느웨로 갑니다.
욘3:1-3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기도함으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아끼시는 영혼 120,000여명에게 말씀을 전하는 요나입니다. 기도함으로 자기 십자가를 질 때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을 보게 되는 요나입니다.
예수님도, 요나도 기도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기도할 때 질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2.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합니다.(막15:21 롬16:13)
막15:21절입니다.
<21)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 시몬은 예루살렘에 왔다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 행렬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니 군병들이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눈에 시몬이 눈에 띄었습니다. 시몬을 억지로 잡아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치 않게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지고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엄청난 반전을 보여줍니다.
롬16:13절입니다.
<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로마 군병들에 의해 억지로 졌습니다. 그런데 그 골고다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와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나중에 사도바울의 믿음의 어머니가 되고, 두 아들은 초대교회 귀한 일꾼이 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졌는데, 엄청난 축복이 시몬의 가정에 임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고난이 따르고 핍박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마시고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무 십자가 형틀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지만 십자가의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미련한지… 그래서 조롱하며 핍박합니다.
오픈도어선교회 컴패년 명예총재는 핍박은 기독교인들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왜 핍박을 받는가? “복음 자체가 세상과 배치되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선교 통계전문가 데이비드 바렛은 2001년, 기독교인으로 핍박받아 숨지는 사람이 1년에 15만 9000명 규모라 했습니다. 공산권과 이슬람권에서는 그 박해가 엄청납니다. ‘신성모독법’을 반대하던 파키스탄 바티 장관(43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의 총격으로 암살당했습니다. 파키스탄은 1억7000만 인구 중 기독교인은 2.5%이며 인구 95%는 이슬람교 신자입니다.
중동의 이슬람권에 있는 교회는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 총각과 교제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와 오빠들이 딸과 누이를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북한은 언제나 박해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입니다. 그곳에 있는 지하교인들은 10만명~20만명 정도라고 합니다. 언제든 죽을 각오를 하고 두려움에서 믿음생활을 합니다. 찬송가도 서로 바라보며 금붕어처럼 입모양만 낸다고 합니다. 죽을 각오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극동방송을 듣습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발표된 보고서에는 세계 기독교인 1억 명이 박해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네에서 쫓겨나고 소수종교인으로 차별대우를 받으며 부모가 죽고 자식을 잃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복음을 놓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생활 때문에 이혼을 당했다는 언론보도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요즘은 공직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역차별 역공격을 받습니다. 실력으로 승진해도 기독교인이기에 승진한 것처럼 미운 털이 박힙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믿음을 포기합니다.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것이요”(요15:20)라고 말씀했습니다. 핍박당함은 당연합니다. 그동안 너무 편하게 믿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황금기 50년(1970년~ 2020년)의 세월 속에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너무 편하고 믿음들이 연약해 졌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끼리 싸워서 작은 일에 삐지고…, 거품을 물고… 시험 들었다하고… 북한교인들이 보면 웃습니다. 싸워야 할 대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면 복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 모양으로 힘들고 어려워도 핍박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불이익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십자가를 팽개쳐 버리고 떠난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진정한 기쁨을 얻고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버리는 순간 우리의 믿음도 끝장이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묵상하고 바라보며,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하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셔서 영광스러운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마16:24절입니다.(막8:34, 눅9:23)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했습니다. 자기가 지고 간 십자가에 자기가 못 박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가 지고 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곧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자기 부인이 선행돼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란 극기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자신을 그 주권 아래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경험, 능력, 가능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가 앞서고 나는 뒤따르는 삶입니다. 세상보다 예수님이 소중한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제자로서의 삶을 결단하는 것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날마다 지속돼야 하고 시종일관적인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양상은 다르지만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단, 가롯 유다는 예외였습니다. 눈앞의 이해에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십자가 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의 아침이 있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을 읽는데 아무 감동도 없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울며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왜 제게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사라졌나요? 그 감격을 돌려주세요. 옛날에 예수님의 보혈에 감격하며 흘리던 저의 눈물을 돌려주세요.”
십자가를 향한 감격도 없고 십자가의 삶에 대한 실천도 없다면 그것은 영혼이 말라가고 내일의 축복이 사라지는 증거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보다 더 영광스런 삶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성도는 성도가 아니고 십자가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죄 사함도 없고 평안과 평화도 없고 변화와 축복도 없습니다. 가장 큰 실패는 십자가가 없는 실패입니다. 지금 삶이 고달프고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흔적이 희미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이 뚜렷해지면 삶의 고통과 고민은 사라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내 등에 지는 만큼 하나님은 내 삶의 짐을 가볍게 해주십니다. 나를 비우고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은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란 십자가를 체질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비워야 참된 덧셈 인생이 펼쳐집니다. 비움 없이 채움을 추구하면 인생이 공허해집니다. 교회도 각종 프로그램으로 세상 욕망을 채워 주려고 하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숫자적인 성장만 꾀하면 교회 안의 심령들이 공허해집니다. 예수님은 나의 욕망을 채워 주려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 나를 비워내며 살아야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이 그 흔적을 보시고 큰 상급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강단 앞에 걸고, 종탑에 걸고, 자동차안에 거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성전외벽 페인트칠하고 십자가 네온을 다시 하고 십자가 불을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 사는 누군가 시청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십자가 불빛이 넘 가까이 비쳐서 싫다는 것입니다. 불을 밝히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불빛을 보고 평안함을 얻고, 십자가 불빛을 보고 믿음을 회복하고, 다시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 불빛을 밝히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영적전쟁이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십자가네온 불빛을 밝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십자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된다고 아예 교회에서 십자가를 치우는 곳도 많습니다. 마귀는 외칩니다. 십자가 거는 것 우상이다. 속지 마세요...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이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것과 죽으신 것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경건해지려고 노력합니다. 말과 행동도 조심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것도 꼴보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이니 뭐니 하며 성도들을 현혹합니다.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성화의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에게는 질병이라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져야할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를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 번씩이나 없애달라고…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눈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묵묵부답하시다 세 번째 기도할 때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만 하면 되었다!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의 아픔은 벗어버릴 것이 아니라 지고가야 하고 갖고 가야하고 품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네게 은혜가 되고 그것이 네게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바울이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질병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께 더욱 겸손히 쓰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질병이라는 십자가가 바울에게는 성화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후 일체 십자가를(질병을) 없애달라는 간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성화에 필요해서 주신 것이다, 생각하고 지고 갈 결심을 한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감당하기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성화의 도구로 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바울처럼 오히려 하나님 주신 은혜가 내게 족한 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고난주일이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에 오르시고, 친히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간입니다. 새벽기도가 힘들죠? 안하다 하려니 더욱 힘들고 엄두가 나지 않죠? 교회나 가까워야죠... 그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고 생각하고 한 주간 새벽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자원하여 져야합니다. 억지로라도 져야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