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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나의 문학>
절망의 숲 저 너머
정소성
사람의 나이 중에서 가장 민감하다고 할 수 있는 고등학생시절과 대학생시절, 나는 검은 절망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집안에 닥친 가난 때문이었다. 단 한번도 부모님에게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받은 기억이 없다.
직업전선에 나간 어린 동생들이나, 고교 동기생, 그리고 대학동기생들, 그리고 나 자신의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계속했다.
나는 나 자신을 기질이 나약한 사람으로 파악하고 있다. 나약하다는 말은 정이 많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런 기질의 나는 정말 가난을 헤쳐나가기에 힘이 겨웠고, 그래서 헤어날 수 없는 절망감을 안고 청년시절을 보냈다.
가난의 원인은 아버님의 와병 탓이었다. 근 15년간 병석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일제시 대구사범이었던 대구 부고를 다녔는데, 서울 S 모대학에 매년 50 정도 입학하던 영남의 명문고였다. S법대를 졸업하여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돋보이는 청년의 길이었다. 최선두 그룹에 마크되던 나였지만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 봉화로 낙향하여 작은아버님 집에 기거하면서, 절망 속에서 소설을 주워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상의 ‘날개’와 손창섭의 ‘잉여인간’과 김동리의 ‘등신불’과 선우휘의 ‘불꽃’을 읽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대도시인 대구에서 성장한 내가 최근 발표한 중편소설 ‘벌초’같은 농촌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이 때의 나의 시골체험이 중요한 자양이 되었다.
그리고 까뮤의 ‘페스트’와 ‘이방인’, 사르트르의 ‘구토’, 생택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구해 읽었다. 절망 속에서 헤매던 젊은 내가 이런 프랑스 소설들과 한국의 소설들에서 받은 충격은 컸다. 내가 체류했던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에는 안동사범을 다녀 초등학교선생이 된 5촌 아재가 한분 계셨는데, 이분을 통해 문학책을 구해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나의 내면에 소설가 지향적인 요소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난의 절망은 가녀린 심성의 나에게 인간존재의 허무감을 일깨워주었다. 이런 허무의 감각은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다.
나는 소설의 선진된 기법을 배우고 제대로 깨치기 위해서는 프랑스문학을 공부해야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가로서의 희미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이와 같다.
그래서 나는 고교에서는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불어를 독학하였고, 이듬해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에 합격했다. 당시 불문학과의 입학시험은 불어가 필수였다. 불어교재를 구하지 못해, 봉화읍내 서점을 다 뒤져 발음부호를 한글로 적은 학원사 발행의 초급불어문법책을 한권 구해 수십차레 독파하여 불어의 기초를 다졌다. 대학에 입학해보니, 고등학교에서 3년간 불어를 배운 다른 학생들은 불어로 노래를 부르고 불어로 간단한 대화도 했다. 독학을 한 나는 완전 먹통이었다.
당시 대학사회는 한일회담 반대 데모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문리대 재학중 단 한 학기도 제 때 학기말 시험을 본 적이 없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권은 획기적인 경제발전으로 국민들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려면 산업진흥자본금이 필요한데, 그것을 막혀있던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틈으로써, 무상 유산 원조와 차관으로 조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서울문리대를 주동으로 하는 그야말로 63세대는 우리 민족을 아예 지구상에서 말살하려했던 쪽바리왜놈들의 돈을 받을 수는 없다하여 죽자살자 반대했다.
나같은 학생은 어차피 서울에서 잘 데라고는 없었으니, 단식장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간혹 단식장으로 도는 빵 쪼가리를 받아 먹으면서 한 학기씩을 견디어 나갔다.
그리고 다행인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요즘 사회에서는 보기드문, 입주가정교사라는 것이 있어서, 주로 고3학년을 둔 집안에서 대학생을 입주시켜 자식을 가르치게 하면서 편의를 위해 입주하여 학생 방 곁에 자고 먹으면서 숙식을 같이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때 부유한 집집마다 운전기사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입주가정교사가 있었다.
대학의 학생처에 가면 언제나 입주가정교사를 구하는 일반인들의 요청이 쇄도해 있었다. 나같은 시골 출신학생들이 고물가의 서울 생활을 이겨나갈 수 있는 좋은 제도였다. 고3학생이 여학생일 경우, 그것이 기회가 되어 사위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문리대 2학년 일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나는 서울대학의 교내신문인 ‘대학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했다. 제목은 ‘불빛’이었고, 심사위원은 전광용과 홍사중이었다. 나의 소설가적인 소질을 인정받은 첫 케이스였다.
당시 문리대의 문학풍토를 보면 교수진이나 학생문학도들이 쟁쟁했다. 영문학이론에는 송욱교수가 있었고, 불문학에는 김붕구교수, 정명환교수가 있었고, 국문학과에는 소설에 전광용, 시에는 정한모교수가 있었다.
학생들의 문학운동도 대단히 활발했다. 불문학과 3학년에 김승옥, 김현과 김치수, 김화영, 곽광수가 있었고, 2학년에 김동선, 1학년에 내가 입학한 상태였다. 대선배로 ‘모반’의 작가 오상원이 동아일보 문화부차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국문학과 대학원에는 불문학과 졸업후 전과해간 조동일이 있었다. 독문학과 4학년에 이청준이 다니고 있었다.
특히 3학년 선배들은 정명환교수의 사르트르 이론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산문시대’라는 무크지를 만들어 활발하게 논문과 문학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문단을 대표하던 거의 유일한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을 일제문학의 구각을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문학으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영문학과에는 풍한산업 집안으로 알려진 김정우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은 윤재근이 영문학과를 중심으로 ‘문화정신’이라는 무크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산문시대와 문화정신은 학생들이 발행하는 문예지였으나 사회에서도 상당한 독자를 획득하여 정통문예지로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산문시대’는 불문학과 3학년 선배들이 중심이 되어서 편집을 하고 책의 지향점이 책정되고 했다. 우연인지 고의적인지는 몰라도 그 중심이 된 선배들이 거의 어느 특정지역 출신들이었다. 나의 경우, 2년이나 후배였었고, 고향도 그분들과 달라서 자연 그분들의 문학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대척적인 위치에 있던 윤재근의 문화정신에 가깝게 지냈다. 윤재근이 나와의 나이 차이가 근 십년이나 났지만 나와 동기생이었고, 그의 고향이 나와 같은 지역(마산)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남들이 소위 말하는 이들 수재들은 다들 각기 다른 고향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선 말과 습속이 같은 고향을 중심으로 만나게 되었다. 김현 김치수 김승옥 이청준의 3,4학년 선배들은 어느 특정 지녁 출신으로 문리대문단의 가장 중요한 그룹이었다. 이 그룹에는 안동출신의 곽광수와 영주출신의 김화영, 영양 출신의 조동일이 합류하지 않았던 것같다. 기이하게도 서울출신들은 이들 두 지역 출신들과는 달리 문학을 죽어라 하겠다고 나서는 학생이 없었다. 거의 전부가 교수를 지망하여 죽어라 공부만 했던 것같다.
이런 현상은 대학문단 뿐만아니라 대학정계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자치회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대학 정계는 당시 대학생들의 강력한 의식화에 의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그 구체적인 발현이 한일회담반데모(63데모)였다.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이 서울이 아닌 특정 지역 출신으로 대학정계의 중심세력이었다.
나는 서울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한 학기를 휴학하기도 했다. 나의 대학생활은 더 이상 문학적인 관점에서 어떤 획기적인 일이 없었다. 그후 산문시대는 이어령과 결별하고 문학과 지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는 결국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졸업과 동시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불어담당간사로 취직이 되었다. 당시 영어로만 월간지를 내고 있던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불어로도 계간지를 내게 되었고, 문리대 불문학과로 의뢰가 온 것이다. 불어실력이 출중했던 동기생 홍재성(학술원회원)의 강력한 주장으로 같이 취직이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어서, 유네스코가 유일한 유엔기구였기에 정부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의 나이가 근 서른살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재학중 대학신문에 당선작없는 가작에 당선되었을 뿐 아무런 문학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서울대동기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건영(서울공대출신)은 한국일보 장편모집에 ‘회전목마’를 투고 하여 당선되었다. 이건영은 불문학과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어서 자주 문리대에 나타나서 불문학과 강좌를 도강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알게 되었고, 평생 문우가 되었다. 그 여학생은 졸업후 딴 사람과 결혼하였고, 일찍 병사하는 불운을 겪었다.
유네스코 재직중 어느날이었다. 학림다방에 우연히 들렸다가 가까운 동성고등학교 앞에서 윤재근씨를 만났다. 그는 당시 동성고등학교 영어교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왜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하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자기가 보건데 정형은 기성 어떤 소설가보다 더 소설을 잘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두말 말고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이었다.
그는 택시에 나를 태우고 정릉으로 달렸다. 어느 아담한 기와집 앞에 택시가 멎었다. 안수길 선생의 집이라는 것이었다. 그 집에는 그분의 사위이고, 현대문학의 편집장인 김국태씨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큰 절을 받은 안수길 선생은 크게 좋아하시면서, 부인에게 술상을 내오라고 했다. 우리 네 사람 안선생님, 김국태, 윤재근, 그리고 나 네사람은 그날 정말 많이 마셨다. 두어달 후 내가 안선생님에게 들고간 소설이 현대문학지에 초회추천을 받은 ‘잃어버린 황혼’이다. 지금껏 나는 나의 단편소설들 중에서 이 소설을 가장 아낀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편소설을 선호하는 문학적 체질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단편소설은 나의 장기가 아닌 것같다. 그래서 이 단편이 더욱 귀한 것같다.
그러나 안선생님은 초회 추천을 하시고 타계하셨다. 현대문학사에서는 안 선생님과 가장 가까운 원로문인에게 나를 의뢰하여서, 완료추천을 박연희 선생님이 하셨다. 그 작품이 ‘질주’이다.
아직 총각이었던 나는 사회인으로 살고 있었으나 대학생시절의 낭만을 잊지 못하고 자주 문리대 근처로 놀러가곤 했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유네스코가 나의 평생직장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른살이 조금 못되어 유네스코를 사직하고, 2년 선배 김치수의 소개로 중앙고등학교 불어선생으로 옮겼다. 중앙은 김치수의 모교이다. 그리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불문학석사학위를 준비하는 일방, 소설가로서 부지런히 소설을 발표하였다.
당시 발표한 단편들로서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섬’ ‘쌀 안치는 소리’‘슬픈 귀국’ ‘암야’ 등이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비평계에서 크게 다루어져 문명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문단데뷰 5년만에 현대문학지에 첫장편소설 ‘천년을 내리는 눈’을 연재하는 영광을 안았다. 문단에서 거의 유일하게 권위있는 문예지로 통하던 현대문학지에 문단초년생이나 다름없었던 내가 장편을 연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주간이시던 조연현 선생과 김국태 편집장, 그리고 편집실무 감태준 정종명씨등의 호의 탓이었다.
나는 석사학위를 받고 다음해인가, 전북대학을 거쳐 전남대학교 사대 불어교육과에 전임교수로 가라는 불문학회의 추천을 받아 부임하였다. 당시는 석사학위를 한 사람이 아주 드물었으며, 석사학위를 가지고도 충분히 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불문학계는 석사학위가 오늘날의 박사학위 이상으로 희소가치가 있었다.
나는 전남대학에서 역시 서울에서 내려와서 사대 가정과에 재직하고 있던 처녀교수(김갑영교수)와 혼담이 성립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33세의 노총각이었다. 이듬해던가, 나는 서울대학에 처음 생긴 신제박사제도 하의 불문학과에 최초로 진학하였다. 그리고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전남대학에서 강의가 끝나고 광주고속으로 상경하면 밤 열두시 가까이 되었다. 중구 을지로 4가에 있던 처가에 가서 하룻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관악으로 옮겨간 모교를 찾아가 강의를 들었다. 정명환 이환 이휘영 김붕구 홍승오 교수등의 강의였다.
전남대학교 재직 3년만에 나는 서울에 있는 단국대학의 초청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고, 집 사람은 공주사대로 직장을 옮겼다. 우리들은 쌍둥이 아들을 두게 되었다.
이어서 나는 불문학회의 추천으로 프랑스정부초청 전면장학생으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1982).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악도시로 통하는 그르노블대학이었다. 박근혜대통령이 재학하였다는 학교이다. 나는 대학당국(conseil scientifique, 외국학생 학위심사위원회)에 나의 서울대학에서의 박사과정 수료증을 제출하여 박사과정 재수료의 의무를 면제받았다. 2년 가까이 몇몇 강좌를 더 들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박사과정 수료자격을 인정받고, 곧바로 출강과 동시에 학위논문 작성에 돌입하였다. -생텍쥐페리 작품에 있어서 자연의 이미지의 연구(L'image de la nature dans les oeuvres d'Antoine de Sainte-Exupery)-의 논문을 작성하여 통과되었다.
그르노불은 한국으로 치면 원주쯤에 해당한다. 육각형 프랑스 국토의 남동쪽에 깊숙이 위치하는 프렌치 알프스의 중심도시로, 학교의 강의실에서는 일년 내내 만연설로 뒤덮힌 알프스의 몽블랑 연봉이 조망되었다. 집사람도 나의 소개로 유럽 영양학의 중심도시인 디죵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연구하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인생은 나의 모교 문리대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같다. 정소성 하면 -잠 잘 데 없어서 강의실에서 누워자는 놈-, 혹은 -먹을 게 없어서 남의 도리락 먹을 때 옆에서 얻어먹는 놈-이란 롓델이 붙어 있었고, -밥은 처먹지 않고 막걸리만 마시고 사는 놈-이란 렛델도 붙어 있었다. -잔디밭이나 마로니에 벤치에 누워자면서 원고지 꺼내서 소설 쓰는 놈-이란 렛델도 붙어 있었다. -교재는 단 한권도 없고, 작은 불한사전 하나만 뒷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놈-이란 별칭도 붙어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는 내 인생의 모든 씨앗이 잉태되어 열매를 맺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걸어온 인생역정의 모판같은 구실을 하였다. 여기서 나는 소설 쓰기를 시작하였고, 학위를 받아 평생 밥벌이장소를 얻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장가를 들었고, 두 쌍둥이 아들을 얻었다. 그런 인연으로 우리가 50세가 넘어서 결성한 문리대 64학번 총동창회(마로니에회, 420명)의 회장직을 18년째 수행하고 있다. 너무 오래 한다고 해마다 사표를 내지만 정 아무개가 아니면 모임이 깨어진다는 주장에 찍 소리 못하고 계속 연임을 하고 있다. 장관 국회의원 교수들이 구름처럼 운집한 동기회에 나같이 가난하고 왜소하고 정치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삼류 글쟁이가 18년간 동기회 회장을 하다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르는 소리다. 아득한 문리대시절, 하숙방과 한일회담 반대 단식농성장을 돌면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해결함으로써 다져졌던 우정이 남달랐던 나의 청년시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집사람도, 서울과는 동떨어져 독립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던 전라도 광주에 운집해 있던 총각교수들, 전통의 광주의전의 후신인 전남대의대 출신의 총각의사들, 그리고 호남법조계를 장악한 일고 광고의 수재들로 이루어진 총각판검사들의 숱한 도전장을 제치고 나를 선택했던 이유로 데모꾼대학 문리대출신이라는 사실과 먹을 거 없는 소설가라는 사실 탓이었다고 실토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 유학을 다치고 돌아온 후 나는 유학생활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 ‘아테네 가는 배’를 문학사상에 발표하여 동인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개구리 뒷걸음질하다 우연히 밟은 지렁이꼴이었다. 심사위원 네분(김성한, 김동리, 황순원, 선우휘)이 어떤 작가를 선정해놓은 상태였으나, 선우휘선생이 나의 졸작을 내밀면서 재심사하자고 주장하여 김동리선생의 동의를 얻었고 재심사에서 만장일치로 졸작이 선택되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그리고 이 해에 첫 창작집 ‘아테네 가는 배’(동서문화사)와 첫장편소설 ‘천년을 내리는 눈’(정음사)을 간행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들은 나는 선우휘 선생에게 집으로 인사하러 갔더니, 어찌나 푸대접하던지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다. 인사하러 온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대접하는가. 그러나 섭섭한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 나의 등에대고, 선우휘 왈, ‘천년을 내리는 눈’ 사서 잘 읽어 보았습니다, 했다. 그의 ‘불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다들 동리의 수제자라고 하니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오랜 한국문단을 지켜온 김정례씨는 나야말로 동리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사람중 하나라고 한다. 나는 서러벌 예대 문창과나 중앙대 문창과 출신이 물론 아니다. 선생님의 대학제자들이 동리추모의 군단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명함을 내밀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년 4,5 년 동안 나만큼 자주 선생님의 집으로 호출을 당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소성아, 집으로 얼른 온나. 선생님은 직접 전화를 하셨고, 언제나 집 앞 대문에 나오셔서 나를 기디라고 계셨다. 내가 선생님집에 가보면 거의 예외없이 유재용씨가 도착해 있었다. 물론 부인이신 서영은 씨가 동석했다. 유재용씨와 나는 선생님의 대학 문창과 제자가 아니면서 말년의 말 벗이 된 두 후배 작가였던 것같다. 이런 사실을 유재용씨가 타계한 지금 문단의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서라벌예대나 중앙대문창과 제자들이 선생님의 추모사업을 벌릴 때면 나에게는 연락도 안한다. 그러면 어떤가, 나는 선생님의 문단후배이지, 직접 제자가 아님은 사실이다. ‘무녀도’와 ‘등신불’로 한국 단편소설의 금자탑을 이룩한 동리의 위광은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로서의 나의 항로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천적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소설가로서 나의 앞길에 사사건건 나의 발목을 잡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어떠랴 이것이 인생인 것을.
삼성출판사에서 한국문학대전집을 간행하게 되었는데, 나는 선정 작가 22인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출판사에서 세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창작자금을 주면서 장편소설을 청탁했다. 정확한 기억이 없으나 한 사람당 5백만원이 아니었나 한다. 나는 고산자 김정호에 대해 역사소설을 쓰기로 계약하였다. 그러나 막상 집필에 들어가보니 도저히 단권으로는 소화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단권을 계약하였으나 나는 계약기간을 초과하여 무려 다섯권을 썼다. 원고를 넘겼더니 계약위반이라고 하면서 계약금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준비된 돈이 없어서 차일피일했더니, 2차로 기획된 삼성출판사간 한국문학대전집에서 나를 빼버리는 등 보복이 들어왔다. 그러나 2차 전집은 1차전집에 비해 판매가 아주 저조했다.
나의 유일한 대하역사소설 ‘대동여지도’는 다른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판매에 성공하였고 특히 미국의 재미교포들 사이에서 많이 읽혔다. 내 아들이 미시간대학에 유학을 갔는데, 지한파 교수들의 서가에 한결같이 이 다섯권짜리 ‘대동여지도’가 꽂혀 있었다고 전해주었다. 이 소설은 출판사를 옮겨가면서 재판을 거듭하였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대중적인 인기가 없는 나에게도 십판 이상을 찍은 소설이 있다면 다들 놀란다. 대학사회의 반체제운동을 다룬 ‘여자의 성’이 그것이다. 50이 넘어서 쓴 세편의 장편소설 중 ‘두 아내’와 ‘바람의 여인’은 6.25 관련 소설이고, 근년에 간행한 장편소설 ‘설향’은 순수연애소설이다. 꾸준히 독자가 있는 소설들이다.
작년이던가, 기왕에 발간된 샤마니즘을 다룬 장편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The Fate'(운명)와 중편 두편(아테네 가는 배, 돌아오지 않는 섬)과 단편 두편(잃어버린 황혼, 질주)를 묶어 나의 영문소설 전집을 간행했다. 어떤 기획하에 번역된 것이 아니고, 이 잡지 저 잡지에 번역되어 실린 것을 한권으로 묶은 것이다.
번역원이 생기고 불어번역으로는 처음으로 선정된 ‘두 아내(les deux epouses)’는 판매의 호주를 보이고 있다는 프랑스측 출판사(la maison de la rose)의 전언을 최근 들었다.
나는 문단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나는 문인협회가 어디 있는지, 작가회의 사무실이 어디있는지 잘 모른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문단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가입은 거의 다 되어있고, 회비도 잘 내는 편이다.
어떤 문단 감투도 없다. 내가 쓰고 있는 문단감투라고는 한국소설가협회의 중앙위원이라는 타이틀이 유일하다. 나는 나의 이 감투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두 달 전에 있었던 오영수선생 문학관 제막식에 초청을 받아 가는 길에 옆자리에 앉은 소설가협회장 백시종씨에게 감투를 씌워져서 고맙다고 했더니 소설가협회중앙위원이 백오십 명이라고 해서 실소했다. 최근에 진보계열 젊은 문인들이 창간한 ‘문학과 행동’에서 나를 자문위원으로 선임했다고 해서 실소했다.
나는 성격이 나약하고 정이 많기 때문에 문우가 그립다. 그러나 문학단체의 위원이 되거나 간부가 되는 것은 딱 질색이다. 최근 강변클럽(전원책시인)이라는 문인단체와 문인산악회(정유준시인)라는 단체 그리고 계절문학(정종명)이라는 단체,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성동문학회(지하선시인) 그리고 문학과 행동이라는 계간지(이규배시인)에 가입하여 모임에 나가 보았다. 말석에 앉아서 주는 막걸리나 한잔 얻어마시고 일찍 귀가하였다.
나는 한때 20년도 더 전에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가입하여 무슨 이사회라는데 몇 번 나가본적이 있었다. 나는 이 진보문학단체에서 가입요청을 해와서 나에게 왜 이런 요청을 하는가하고 물었더니, 구속된 문인 돕기 운동에 적극동참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잘 알고 있는 몇몇 문인들이 무슨 문인자유집필권의 신장을 위해 투쟁하다가 인신이 구속된 사실에 분노하고 소정의 금전적인 지원에 동참한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을 그분들이 높이 산듯했다. 가입하자말자 이사로 선임되어 2년간 이사회에 가끔 참석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곧 이사직을 자진 사퇴하였다. 이 단체는 일반 문학단체의 외적인 일들, 잦은 시위와 적극적인 사회운동 참여등은 나에게 부담이 되었다. 대학의 접장인 내가 학생들이 보기에도 좋은 모습은 아닌 듯했다. 나는 오직 집필로서 사회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사직을 사퇴한 후 나는 30년도 더 긴 세월동안 단 한번도 이 단체의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이 단체의 기관지에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 옮겨간 단체의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른다. 다만 이 시기에 사귄 젊은 문인들, 적어도 20년 30년 년하의 젊은 문인들을 좋아하여 끈끈한 문학인으로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람 좋아하는 나의 성격탓이외에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양문규(시에), 김남일(실천문학), 이규배(문학과 행동)등이다. 나는 이들 젊은이들의 용기와 패기, 문학사랑의 열정이 좋을 뿐이다. 이념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타계후 36년만에 문을 연 오영수 선생님의 울산언양의 문학관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소설가협회 초청으로 나의 오랜 문우들이 모였다. 지금 기억나는 분들이 김병총, 현길언, 한용환, 강호삼, 정건영, 백시종, 김호운, 공애린 등이다. 반가운 악수를 통해 오랜만에 동업자로서의 체온을 나누었다. 지난 봄에는 참여하였던 문학기행을 통해 유난스레 문학관을 많이 둘러보았다. 성동문학회에서 안성의 박두진 문학관과, 역시 안성의 조병화 문학관을 둘러보았고, 문인산악회에선 문막의 김동인 묘역(가묘)과 여주의 묵사 류주현문학관을 둘러보았다. 이 나라 소설문학의 혈통을 이어온 정통문학의 흐름을 긴 눈으로 짚을 수 있었다.
3,40년 전에 또래 소설가들이 결성하여 동인지 ‘작가’를 여러차례 간행한 적이 있는 작가동인들은 요즈음은 만나지 않고 있다. 이들 다들 일흔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여한 또래 소설가들인 서동훈, 손영목, 윤후명, 정종명, 황충상, 김상열 등은 가끔 전화연락만을 할뿐 만나지 못하고 있다. 작년 여름에 포항으로 피서를 갔던 필자부부는 경북신문 논설위원으로 봉직하고 있는 서동훈부부를 만나 오랜만에 만취하고 회포를 풀었다.
요즈음 신문지상에서는 문학권력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문학동네 등 지세가 강한 문예지에서 소속해서 활동하는 평론가를 동원하여 특정의 작가와 시인을 크게 클로즈업시키는 것을 말한다. 자주 신문에 기사를 만들어주고, 창작집을 펴내주어서 특정작가를 키우고 동시에 커진 작가가 시장을 형성하면 책을 많이 팔아보자는 계산이 깔려 있다. 이런 문학권력의 작태는 주요 문학상과 상업적인 성공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나는 이런 문학권력 바람을 한번도 타본 적이 없다. 나는 중요작품을 주로 한국소설에 발표하고 있다. 나의 최근작 중편 ‘벌초’도 한국소설에 발표했다. 한국소설은 전혀 문학권력과 무관한 소설전문 월간지이다. 언론반응이 거의 없고, 시장에 영향을 끼칠만한 판촉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문예지이다.
나는 요즈음 작품을 더 좀 발표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고, 최선을 다해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새로운 장편소설 하나를 탈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30년간 재직한 단국대학교의 장충식 이사장과 우연히 알게 된 가천대학 이길여 총장님은 나를 만날 때마다 새 소설을 언제 가져다주느냐고 인사말 아닌 독촉을 하신다. 이 총장님은 졸작장편 ‘설향’의 독후감을 A5 용지 한 장 가득히 적어보내주시기도 했다. 소설가는 소설을 잘 써야하고, 그리고 주기적으로 신작을 발표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소설가로서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같다. 죽은 작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에 머리를 써야하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야 한다.
첫댓글 선생님 자전적 수필 감동입니다 늘 건안 ᆞ건필 소망합니다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도, 문학을 향한 집념도, 감투를 필요로 하지 않는 문학계 활동도, 그리고 선생님의 창작에 대한 몰입도 모두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