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나 모든 것의 중심
글 원공스님
스님께서 “네가 있으니 세상도 있는 것이다.”하셨다. 생각을 굴려보면 알듯도 하나 생각없이 들으면 하나의 화두가 된다. 몇 년 전에 한동안 법성게의 한 귀절을 끊임없이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나무 아미타불’을 부르면 한동안은 ‘나무 아미타불’로 바뀌었다가 다시 법성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실제로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똑 같았다. 환청을 듣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아! 내가 듣는 것이 마음이구나? 다섯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다 마음의 상이라 것을 실감 했다. 내가 있으니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분별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불법의 지혜는 분별을 멈추데서 시작한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느낌이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중심의 뜻이 있다. 눈 귀 코 혀 몸으로 감각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하는 중심을 ‘나’라고 한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은 몸의 중심은 될 수 있어도 우주의 중심은 될 수 없다. ‘모든 것의 중심인 나’는 모든 것을 나투는 생명의 근원이며,불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중심인 나’로 바르게 서는 것이 불법의 수행이다.
스님께서는 “수행자는 중심이 바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하셨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덩어리로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하셨다. 수행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기본 원리이다. 많은 깨달으신 분들이 이러한 원리에 바탕을 둔 단순한 수행을 통해서 깨달으셨다.
한덩어리로 모은다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산만하지않는 것이다. 예를들면 ‘이 것이 무엇인가?’ ‘나무 아미타불’,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수행주제에 오로지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 스님께서는 어려서 ‘(참)나’를 ‘아빠’라 부르면서 수행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걸으신 길을 가르쳐주시면서 ‘나’를 ‘주인공’이라 이름하여 하나로 모아 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하셨다. 스님께서는 단순하게 수행하시고 빠르게 성취하셨지만, 제자는 바로 한덩어리를 만들지 못하고 많은 분별을 한다. 이런 저런 가르침에서 뭔가를 이해하고 얻으려고 하며 때로는 이유를 붙이고 변명을 한다. 뭔가 없을까? 하는 생각은 들뜬 마음에서 일어난다. 어떤 성자가 자신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않는데 전생에 그러한 것을 극복했기 때문이라 하셨다. 언젠가는 들뜬 마음이 쉬어지고 일념 집중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습니까?” , 스님께서 “하나를 꽉 잡고 거기서 만이 살고 거기서 만이 죽는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다. 그 하나는 ‘나’의 중심이다. 그것은 모든 번뇌와 무명업식을 태우고 생명의 빛을 나투는 중심으로, ‘불기둥’이라고도 하셨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내가 없는 기둥이 있다. 불기둥.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 무조건 믿고 거기에 쉬어라.” 가르침을 따라 ‘나의 중심’을 관(보는)하는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의 중심을 관하는 것’이말로는 간단한데, 좌선을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알았다. 나름대로 하면서도 의문이 든다. 믿음이 결정적이지않았기 때문이다. 믿음이 가득할 때는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지속되지 않기에, 수행의 원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했다. 자연히 모든 가르침을 대할 때마다 기본적인 이해에 대한 증거를 구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이다. 그러나 경전은 지금 알고싶은 단순한 사실에 비해 너무 깊고 방대하여 경전공부는 당분간 뒤로 미루고, 알고자하는 주제에 집중하여 스님들의 법문을 들었다. 그리고 불교외의 다양한 가르침들에서도 공통된 이해와 특히 깨달은 스승들의 직접적인 말씀들이 나에게서, 나의 경험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려고 하면서 ‘나’에 대한 이해를 구조적으로 정리하고 실제 수행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그 중에 한가지 중요한 원리는 중심의 이동이다. ‘생각의 나-ego’에서 ‘없는 나-주인공’ 으로의 중심을 옮기는것이다. 이것은 무아의 경험에서 분명하다. 무아의 상태에서 에고의 상태로 돌아오면 ‘내가 무아를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무아의 상태는 개체적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다. 개체적 나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며 ‘없는 나’가 자각을 하거나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다.
예를들어, 고요한 침묵 가운데 ‘나라는 느낌의 나’가 어려서 부터 지금까지 마음에서 해소되지 않은 일들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지켜본다. 지켜보는 마음은 그 이야기들에 전혀 동요되지 않아 고요한 침묵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점차 침묵이 옅어지면서 일상의 상
태가 된다. 한동안은 일상의 상태에서도 그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각은 흐려지고 그 이야기들을 인식하지 못하게되고 좌선을하거나 마음을 집중
할 때에는 인식을 하게된다.
여기에서 과거의 기억,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나, 끊임없는 이야기를 ‘나’ 라한다. 그러나 과거는 사라졌다. 경험을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받아들인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경험들의 지속적인 주체인 ‘나라는 생각-ego’은 실제가 아니라 관념적 중심으로 허상이다. 따라서 모든 이야기는 그러한 조건 속의 환상이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인정하면 나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렇지않으면 스스로 사라진다. 무엇보다도 인식의 대상이 되는 현상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상이어서 실체가 아니다. 즉 ‘나’가 아니다. 그러면 실제의 중심은 무엇인가? 침묵속에서 보는 모습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현상세계를 초월한 중심이다. 그것이 ‘나’이다. 실제 ‘중심’이다.
그리고 개체의 나가 없어서 ‘무아’라 하는데, 내가 무아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라는 생각’이 그것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수행에서는 ‘나라는 생각’의 중심에서 ‘없는 지켜보는 것’으로 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좌선 중에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보면서 하나의 화두에 집중하는 마음이 맑고 고요하면 거기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는 과거나 미래의 생각에 빠지지 않고 모든 몸과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지
켜보며,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것이 ‘나의 중심’에 머무르는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한다.내가 일을 한다. 내것이다. 하는 나를 쑥 빼어 놓아라. 나가 들어가면 이미 걸린 것이다. 부처를 이룬다는 생각마저도 놓아야한다.”하신 스님의 말씀을 수 없이 들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에게서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나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없는 나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중심 옮기기 이고, 놓아버림의 수행이다.
원공스님_ 원공스님은 1990년 미국에 입국한 이후
뉴욕 한마음선원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