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참석해 달라는 초청도 오고 기념문집을 낸다고 글을 써 달라기에
사양 하다가 언젠가 내가 우리 사랑방에 올렸던 이길우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다시찿아 보냈습니다
참석도 못 하는데 글마저 사양 할수도 없어서...
형님도 이길우 은사님과는 각별하신 인연도 있고 또 우리
졸업 30주년 기념문집에 은사님께서 쓰신 글이 명문이기에
읽어 보시라고 보냅니다
그당시 모집인원은 8학급 480명 이었는데 컷트라인점수인 505점
동점자가 많아 483명이 합격을 했었지요
보결생이 많아 8학급에 60명씩 되어야 할것이 입학하고보니
9학급에 75, 76명씩 콩나물 시루처럼...
선생님 글을 보니 673명이 졸업을 했군요 아련한 추억 입니다
우리 모두 그립다.
백삼선의 42회 꿈 많던 건아들
서형근, 이성우.......,
그 뒤로 육칠삼(673)명
어느때라 그 모습을 감히 잊으랴!
추억의 모습들이 생각이 난다.
눈 감아도 눈에 삼삼, 귀에도 쨍쨍
한 없는 사연들은 가슴에 가득
잊혀지지 않은 모습
잊을수 더더욱 없는 모습들
한란같이 향기롭고 그 품위도 만점
백삼선에 의기양양 뽐내던 용사
온 누리 선남선녀들의 선망의 대상
그 중에서도 엄마들이야 유일한 꿈이었지.
무쇠같은 팔다리에 굳은 의지로
서운어린 팔공에 다짐하면서
도닦고 무를 닦고 덕을 세우며
큰 그릇 되고자 나라의 기둥
겨레의 등불되려 다짐하던 님
그뿐이랴 철석같이 품은 포부는
육대주 오대양의 주인되려고
한결 같이 결심한 것 기억하는지?
그 시절의 품은 큰뜻(大志) 새긴 꿈들이
오늘따라 더 한층 밝게 빛난다.
어제가 옛날이다 하기야 하지만은
아니 벌써 님들의 주름진 모습
입학식때 동행하신 할배 같구려
자녀들은 모르실가 닯은꼴인줄
늙는것은 누구나 불가피의 섭리지만
유수같이 흘러간 세월탓일까
그 연유 때문인지 만나 더욱 반갑고
미워 미워 가사같다. 해오 33년
만조되어 돌아온 밀물과도 같이
가득찬 감회들을 풀고자 함에
세월의 백사장에서의
오늘춤이 더욱 흥겹다.
그간의 쓰라림 수 많던 회오리가
그 가슴에 사정없이 스쳐 갔음이
이심전심 그것인지 무언의 證人
그러나 그때마다 그 순간마다
님들의 대지에서 피던 꿈들이
푸르게 하늘을 열어 찬란했음도
본듯이 들은듯이 역력하구려
앞으로 그이상의 풍랑세월 또 있으리니
아무쪼록 단련된 그 정력으로
뉘보다 더한층 世世靑靑 하소서
이제는 너 나 없이 반백된 모습
그 옛날 졸업식때 두손 맞잡고
서운함을 눈 언저리에 남기고 가던
그때의 간절함을 감히 기억하는지
그러므로 이 자리가 더욱 값지고
견딜수 없을 만큼 감회가 무량
그립던 얼굴들을 재삼 생각하노라면
흘러간 옛 추억에 가슴이 찡
그 언젠가 삼동설한에 동태 교실에서
원수야 수학이야 하면서 손발데모 하던 날
그 와중에서도 뜻 깊은 예뿐이 있어
미군병사 야전용 삼발 불에서
휴식중에 공을 들여 끓였다면서
따끈따끈 커피 한 잔 대접 받은 일
오늘따라 생생하게 생각 또 난다.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일들이
자꾸 자꾸 떠오른다. 하나, 둘, 셋.....
그중에도 못잊을 잉꼬새사건
갑자기 병이 들어 꼬랑꼬랑 했다면서
집에 두면 귀가전에 죽을것 같에
갖고와서 책상속에서 간호하던 次
사정없이 수업중에 울어 댓었지
별일이야 없었지만 모두 놀라는 통에
누구냐고 호통치던 선생모습 가엽스라
佛心, 慈悲心이 그만한이 또 있으랴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모습들이
잇따라 이 뇌리에 되살아 나니
오늘따라 더더욱 생각이 난다.
천사같은 잉꼬주인 나이팅게일賞감
지성이면 감천이란 옛말 그대로
사랑도 지극하면 돌에서도 피가 돈대요.
어이타 천심도 인심 같에라
흥부집 박씨처럼 보은소식 있었으리
이것 저것 한없이 생각 한마당
또 다시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
그때로 되돌아가서 백년 천년 살고파라
천만번 되새기면서 그려 보지만
방방곡곡 흩어진 몸 들이니 어찌 如意리
다만 그저 그 옛 정과 다를바 없이
지극정성 비는 마음 한결 같아서
권솔(眷率)들의 여생이 더욱 복되고
오래 오래 송죽처럼 변함 없는 건강이
저 해와 달과같이 영원하기를
빌고 또 비는 마음 옛날 다르랴!
그中에도 42回 어찌 잊으랴!
나는야 봄이오면 그대 그리워
종달새 되어서 말 부친다오
나는야 봄이오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 꽃이 되어 웃어본다오.
<김동환 작 봄이오면 에서>
오늘 이길우 선생님을 회고하는 글을 쓰려고 시작을 하고 몇구절 선생님의 글을 인용하려 했으나 구구절절이 시정에 넘치는 선생님의 글을 어디한자도 뗄수도 없을 뿐더러 이글을 읽지않은 동문들, 또 담 넘어 들여다 보시는 님들을 위하여 전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수학을 가르치셨지만 그보다 더 값진 덕성과 인감됨을 글에서 보시다시피 가르쳐주신 분이었지요.
그 유명한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와 형태가 너무 흡사합니다만 독일어로된 하이네의 시집을 일부러 손에들고 찿아봐도 선생님의 글처럼 감흥을 주는시는 안보이네요.
저는 이제 42년째 독일에 살고있으며 국적도 독일이라 독일어는 제 2의 모국어 이지요
이야기는 우리가 경북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위해 수험표를 받으러 갔던 1955년(단기 4288년) 어느 봄날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그때 나는 내가 태어났던 예배당 골목(서문교회 골목)에 살고 있었는데 그날 아침에 대신동 네거리(동산약국, 백운당 아이스케키집이 있던 그 사거리)에서 車體(차체)의 옆면 아랫부분 절반을 초록색으로 칠하고 은빛으로 색칠한 윗부분 그 위에 검은 글씨로 대구시영뻐스 라고 길게 쓰인 뻐스를 타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형님을 따라 반월당을 경유하여 수성교까지 가서 그곳에서 방천둑따라 걸어서 그 가교사엘 갔답니다.
그당시 대신동 네거리에서 뻐스로 수성교로 가자면 덕산파출소, 반월당경유 범어동까지 가는노선이 있었고 자갈마당, 대구역 동인 로타리를 거쳐서 수성교경유 범어동 행이 있었지요.
또 시영뻐스(중앙뻐스가 아닌 시영뻐스) 노선은 동촌 가는노선이 범어동 가는 노선과 동인로타리까지는 중복이 되는데 송연형이 입학 시험날 그것도 모르고 자갈마당에서 동촌행을 탓던지 대구공고 앞에서 내려 허겁지겁 생땀흘린 글을읽고 나는 당장 알수 있었답니다. 그때 중앙뻐쓰는 덕산 파출소 효성여중 입구 남문시장, 대봉동 파출소를 거쳐 용두방천 가는 노선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자갈마당, 동인로타리, 삼덕로타리, 삼덕 우체국경유 우리학교 앞을지나 용두방천행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내가 학교 다닐때는 여자 차장 아이들이 외치는 남산대봉 용두방천가요 하는 뻐스를 타고 다녔지만 가끔 시간적 여유가 있을땐 삼덕대봉 노선도 타고 다니기도 했지요.
그래서 뚝에서 비스듬히 내려가니 교문 이란것이 나무로 어설프게 만들어 철조망으로 얼기설기 엮어놓았던데 내가 국민학교때 다닌 서부국민학교 피난 가교사 문짝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대구서부국민학교 2학년때 육이오가 나서 본교를 징발당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며 수업하다가 평리동에 가교사를 만들어 그곳에서 배웠는데 육학년때 본교로 돌아갈때까지 다녔던 곳이었지요.
운동장에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어떤 안경을 끼신 선생님이 철봉대가 늘어선 그 앞쪽의 교단위에 의자를 놓고 앉으셔서 마이크로 가끔 안내말씀을 하고 계시더군요.
나는 형님을 따라 연단 옆으로 갔는데 제 형님이 인사를 하는겁니다
"선생님 그새 안녕 하셨습니까?" 선생님은 힐끗 쳐다보시더니 거리낌없이 "응, ㅇㅇ이가 니가 여기 왠일이고?" 하시면서 형의 이름을 부르시는게 아닌가, 내 어린생각에도 당장 선생님은 나의 형이 졸업한지도 몇년이나 흘렀을테고 졸업생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이름을 아시다니 참 기억력이 좋으신가 보다하는 생각을 했지요.
"예, 이번에 내 동생이 입학시험을 칩니다"
"그래? 니 동생이면 걱정할것도 없겠다" 하시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는데 그게 선생님과 나와의 첫 만남 이었답니다.
인연이 더 닿지 않았던지 은근히 선생님이 우리반 담임이 되시길 바랐건만 한번도 선생님의 반에 있지도 못했고 더 안타까운것은 수학도 나는 배석창 선생님과 이을기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지 이길우 선생님께서 직접 가르침은 한번도 받은적이 없었답니다.
다만 2학년 때인지 3학년 때인지 확실한 기억이 없지만 우리반 수업을 담당한 선생님이 결근이라(수학시간이 아니었음) 우리는 좋아라고 놀고 있는데 수업시간도 절반쯤 지나서 선생님이 출석부를 손에들고 들어오신적이 있었지요. 내가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는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지금도 그날 선생님이 하신 말씀 한마다도 빼놓지않고 기억하고 있답니다.
첫 말씀이 혼자 하시는 말씀처럼- 이런 결강 시간이 있으면 누가 어떤 사연으로 수업에 참가 할수 없다고 하던가 하다못해 누구던 아는 선생님들은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아무소리도 없이...
선생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어떤 선생님이 연락도 없이 무단결근을 하신 모양이고 또 다른 선생님들도 그 사실을 알려 어떤 대책을 세웠어야 했는데 아무소리도 없어 시간이 절반도 지나 우연히 알게되어 출석부를 들고 오신걸로 짐작이 되었지요.
그러시면서 참 아까운 시간 이지만 지금 수업을 시작해도 성과도 없을것같고 하시면서 출석을 부르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제자들 이름이라도 익혀두시고 싶으셨던게 아닌가 짐작이 됩니다.
누가 출석이냐 결석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출석을 부르셨는데 번호를 부르시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부르시면서 어떤 이름은 그냥 지나고 어떤 이름은 일일이 얼굴을 처다 보시는데 왜 그랬는가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던가 수업을 담당하신적이 있어서 알고있는 학생들은 그냥 넘어갔고 담임도 수업도 담당하지 않아 생소한 이름의 학생들은 얼굴을 쳐다 보신걸로 사료가 되는군요.
내 이름을 부르시더니 "니가 ㅇㅇ이 동생이가?" 하시면서 한참동안 쳐다 보시길래 좀 무안함을 느낀 기억도 선명합니다.
우리 동문들은 그런 학연이 많지만 우리 반에도 몇명이나 그런 학우들이 있었던가 봅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악대부에서도 활동 했지만 특별활동 시간에 사육반에서 활동도 했었답니다. 사육반은 박창현 선생님께서 지도를 하셨는데 선생님은 국어과목을 담당하시기도 했고 도덕 과목을 가르치시기도 했는데 정구부(연식정구)도 지도 하셨지요. 김용서, 김수행 학우는 잘 기억하고 있을테지... 나는 박창현 선생님과의 추억은 선생님을 따라 팔군단옆에 어느 교수님 댁이었던걸로 기억되는데 그집에가서 수 많은 새들을 사육하는걸 구경한 추억이 있답니다.
그때의 성격형성 과정의 영향 때문인지 독일에 와서도 새들도 키워보고(잉꼬, 카나리아, 아마존산 말하는 앵무새등) 했었지요.
우리 학창시절 교무실과 양호실(방송실과 붙어 있었지요)뒤편에 있던 큰 새장을 기억 하나요? 봄이면 백일홍이 만발했던 그 사육장을...
하루는 오후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새장에서 새 모이도 넣어주고 물도 갈아주고 있었는데 박창현 선생님 께서 들어 오시면서...
"야 경욱아 오늘 교무실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줄 아니? 원 내 참..." 하시면서 혀를 끌끌 차시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호기심도 동하고 무슨일이 있었는지 여쭤 봤드니 말씀인즉- 이길우 선생님의 글에서 대강 아실수 있겠지만 그 잉꼬새 얘기였습니다.-
어떤 학우가 집에서 배황청앵무새(오스트레일리아 원산의 소위 잉꼬새라는것, 독일어로는 Wellensittich 라고 하지요)를 집에서 키웠는데(나도 그당시 한쌍을 갖다 키웠는데 알을 까서 몇마리나 된적이 있답니다) 새가 병이 들었던지 시름 시름 앓아서 그날은 그냥 놔두면 학교에서 돌아올때까지 못 살것 같아서 새를 학교로 가져 왔드랍니다.
그래서 새를 책상속에 넣어 두었는데 어떤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눈치도 없는 새가 갑자기 짹짹 거리고 울어재껴 무슨일이냐고 교실에서 소동이 났고 그 학우는 선생님한테 야단맞은 사건이 생겼답니다.
이 친구가 김종욱 이었는데 나는 종욱이랑 1학년때 한반 이었지 싶었는데 2009년 방문때 만나 얘길해보니 2학년때 김옥진 선생님 반에서 같이 배웠다는걸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끝났으면 아무일도 없이 영원히 얘기 꺼리도 없었을 것을 야단을 치신 이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께 수업시간에 있었던 그 얘기를 했더랍니다.
그때 마침 그 얘기를 들으신 이길우 선생님이 예의 그 선생님께 화를 내시면서 어찌 어린 그 고운 마음을 칭찬해 줘도 모자랄 일인데 야단까지 쳐놓고 그걸 자랑이라고 얘기 하느냐고 하셔서 야단치신 그 선생님이 무안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쩔쩔 매더라는 얘길 들은적이 있었는데 이길우 선생님께서 그걸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날 박창현 선생님 께서도 혀를 끌끌 차신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리운 이길우 선생님,
이제 제가 아무리 목이메어 불러도 선생님의 대답을 들을수 없다는걸 이틀전에 부터 알고 있습니다.
재학중엔 단 한번 만이라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기를 원했습니다만 제가 부덕하여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건만 또 한편 생각하면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 울타리 안에서 살수 있었다는 인연만도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들 한분 한분이 모두 기라성 같이 훌륭한 분들 이셨지만 선생님은 가히 그중에서도 단연 白眉(백미)이셨던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지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선후배 동문 모두가 육대주 오대양에서, 또 조국에서 역사를 창조해 가는 주역들임을 아셨으니 선생님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자꾸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선생님,
그 애숭이 우리들도 이제 나이가 들어 글의 뜻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고 좋은 말씀들도 많이 들어서 자비심이니 보리심도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은 됩니다만 이제다시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선생님이 몸소 생활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그것인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립고 보고싶은 선생님,
이제 선생님의 극락왕생을 두손모아 축원합니다
선생님 께서는 마하살로 열반에 드신걸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배움이 얕아서 법정스님이 쓰신 글중에서 한구절을 인용 하려 합니다. 극락왕생 하소서.
< 마하살 이란 큰 보살이란 뜻인데, 만나는 모든 이웃을 다 구하겠다고 큰 마음을 낸 사람이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보살에게 있어서 이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하여 이와같이 말하고 있다.
"보살은 이웃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웃이 없다면 보살은 결코 깨달음을 이룰수 없다">
텅빈충만 162쪽. 샘터사
후기 이길우 선생님은 저의 형님(35회)과 별세 하실때까지도 연락도 하시고 가끔 술자리도 같이 하셨다는걸 알았습니다
첫댓글 기특한 후배네요. 다시금 이길우 선생님의 옛 정취가 느껴지네요. 전교조 교사들이 한번씩 보았으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보여할 모습을 좀 생각하고 행동을 할것 같은데. 본인이 괜찮다면 전교조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도...
고마우신 필자 동문님, 선생님을 아는 누구에게나 새로운 추모의 념을 가지게하는 따뜻하고 간절한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