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이 침실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심폐소생술을 받았다는 영국 타블로이드지들의 쇼킹한(?) 보도가 24일 국내에서는 큰 화제거리가 됐다. 신문과 방송, 인터넷 매체 가릴 것 없이 '네이버'에 등록된 거의 모든 매체가 이 소식을 앞다퉈 전했고, 카톡과 SNS를 통해 널리 퍼졌다.
내용은 이렇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22일 밤 심정지를 일으켜 구급요원들로부터 긴급 조치를 받고 간산히 살아났다는 것이다. 전직 러시아 정보요원이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채널 '제너럴SVR'이 처음 이 소식을 알렸고, 영국 타블로이드지들(이름이 중요하지 않다)이 '얼씨구나'하고 받아 썼다.
만투로프 부총리겸 산업통상부장관의 보고를 듣는 푸틴 대통령. 24일 오후 1시(현지 시간) 크렘린 공식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이다/크렘린.ru 캡처
푸틴 대통령의 숨겨진 딸을 보도한 영국 타블로이드 '더 선'(2021년 1월 11일자)/캡처
영국 타블로이드지는 소위 '엘로우 페이퍼'다. 영국의 대표적인 타블로이드 '더 선'을 네이버에 검색하면 1면에 스캔들 기사를 주로 싣는 선정적인 타블로이드판 대중지라고 소개돼 있다. '더 선'과 가판대에서 경쟁해야 하는 다른 타블로이드지도 다를 게 거의 없을 것이다.
영국 타블로이드지에게 주요 관심사는 푸틴 대통령의 건강과 숨겨 놓은 연인, 자식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터지자, 러시아 군부내 권력투쟁, 사령관의 전사 및 경질 등이 추가됐다. 기억나는 최근 기사로는 푸틴 대통령이 건강 문제(파킨슨 병)로 내년(2021년) 초 조기 사임할 수 있다는 지난 2020년 11월 기사다.
그로부터 벌써 3년 가까이 지났다. 20개월을 넘어가는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닐텐데, 푸틴 대통령은 엊그제 멀쩡하게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일대일로 포럼'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과 회담했다. 그 과정에서 푸틴 대통령이 파킨슨 병 증세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는 뒷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 러시아 주요 지휘관들이 경질됐거나 전사했다는 기사들도 타블로이드지에 많이 나왔으나, 나중에 현지에서 멀쩡하게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 만나거나, 오히려 승진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푸틴 심정지 텔레그램 보도/캡처
타블로이드지들이 받아쓴 '제너럴SVR' 채널은 이미 가짜 뉴스로 유명한 채널이다. 푸틴 대통령의 암 수술설, 초기 파킨슨병 진단설, 계단 실족 후 대변 실수설 등을 제기했고, 우크라이나 점령지 마리우폴을 방문한 푸틴 대통령이 '대역'이었다는 주장도 펴기도 했다. '웃프게도' 모두 국내 언론은 크게 받아 쓴다.
우리 언론과 비교가 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우크라이나 매체다. 푸틴 대통령에게 무슨 이변을 생기기를 학수고대하는 언론이다. 하지만 러시아어로 검색이 가능한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우크라이나에서는 '푸틴 심정지' 기사를 한 줄도 찾아볼 수 없다.
푸틴 대통령 검색 결과. 위는 'rbk우크라이나', 아래는 '스트라나.ua'/캡처
푸틴 대통령과는 절대로 평화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사라져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강조하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언론은 왜 '입맛에 딱 맞는' 기사를 쓰고 말하지 않을까? 영국 타블로이드지가 노리는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인터넷 클릭' 혹은 '가판대 판매'를 위한 '미끼용 기사'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체 정보 루트로 사실 확인을 했을 수도 있다.
되돌아보면, 엄혹한 냉전 시절에도 언론 보도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 서방 언론은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구 소련의 권력 내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측및 의혹기사를 내보내곤 했다. 특히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말년에서 안드로포프 서기장 등을 거쳐 고르바초프 서기장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아주 잦았다.
만약, 모 서기장이 1주일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으면, 거의 당연하게(?) 건강이상설, 혹은 실각설 등을 내보내고 크렘린의 대응을 보는 식이었다. 서기장이 공식석상에 나타나 건재함을 과시하는 게 또 소련의 공식이 되곤 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은 소셜미디어(SNS)의 활성화다. 불특정인이 올린 가짜뉴스가 더 판을 친다는 뜻이다. 독자가 믿을 수 있는 언론이라면, 일방적인 주장을 그냥 실을 게 아니라, 앞뒤 정황을 따져보고, 팩트 체크한 뒤 보도하는 게 원칙이다. 정론지라고, 유력지라고 말로만 떠들지만 말고, 그에 버금가는 기사 판단 능력을 보여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