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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4장 29-30절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구하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온 우주의 천하만물을 다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너무 커서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우주까지도 다 혼자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은 능력입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를 행하고자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 안에 임하시면 그것은 그 사람의 능력처럼 나타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할 때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능력이 하나님이 행하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일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때 그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번 창조하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시지는 않으십니다. 한번 가르셨던 홍해바다를 다시 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한번 내리신 만나를 다시 내리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여기저기를 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일회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능력을 행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대는 지금 시대에 맞는 능력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시는 능력이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반면에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이 하신 것은 분명한데 그 말씀을 받은 사람 외에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모세때에나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때에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많이 나타났지만 그 외에는 그런 일들이 별로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임했을 때 나타나는 역사 역시 다양합니다. 삼손의 경우에는 힘으로 나타났지만 다니엘의 경우는 지혜를 통해 정치를 잘 할수 있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전쟁과 나라의 통치에서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말할 때 한 두가지로 한정지어 그것에 집중하는 단체들을 보면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함부로 말하는 것도 위험하고 쉽게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성령이 임하시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권능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다양하게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조차도 어느 정도는 능력을 행할 수가 있어서 사람들을 미혹하며 속입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행할수 없는 일들을 행하면 신이 보낸 사람이라든가 아니면 그 사람 자체를 신이라고 추앙을 합니다. 나중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교황 역시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여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교황의 말은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런 흐름이 이단들 속에는 더 허다하게 많습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기도원에 다녀왔던 사람이 그 기도원에서 보았던 일들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보니까 주전자에 물을 부었는데 그 물을 따르니까 포도주가 되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그 기도원원장이 말하기를 자기는 물 위를 걷는 표적 외에는 모든 표적을 다 행했다고 말했어요” 설교 시간에 그런 표적을 보였고, 그 기도원 원장이 설교시간에 말하기를 물 위를 걷는 표적만 행하면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표적을 다 행하게 된다고 했다고 하면서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행하는 이 표적이라고 하는 일이 무엇이 문제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미혹입니다. 사람들을 속여 자기를 믿고 따르도록 하는 미혹입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로 만드셨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 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 잔치를 완전히 망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급한 상황을 알고 있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하고 반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부엌으로 가면서 그 집 하인들에게 가서 너희들은 저기 있는 예수님 앞으로 가서 서있다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러명의 하인들이 예수님 앞에 와서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보고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가 거기 큰 항아리에 갖다 쏟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항아리는 손님들이 오면 물을 퍼서 씻는 물을 담아놓았던 것이기 때문에 물긷는 항아리도 두 세통정도는 부어야 가득차는 항아리였습니다. 그것이 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있는 종들에게 물을 긷는 항아리로 물을 길어다가 거기있는 여섯통의 항아리에다가 아구까지 찰정도로 물을 가득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있던 하인들은 순종했습니다. 물이 여섯동이에 가득차자 예수님은 그 물동이들을 향하여 아무 행동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앞에 서있는 한 하인에게 “너는 한 그릇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주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이 한 그릇을 가져다가 연회장에게 주자 연회장이 마시더니 맛있다고 하면서 “다른 집들은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어느 정도 취하면 덜 좋은 포도주를 내는데 이 집은 나중에 내놓은 포도주가 처음 것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있구나!”하면서 칭찬하였습니다.
이를 본 요한은 나중에 성령에 감동되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이 갈릴리에서 행한 이 표적이 처음 행한 표적이었고 후에 제자들이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남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집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사도 운동가들은 표적을 남용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때도 기적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그 능력을 나타내 보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하는 지 모릅니다.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을 보면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종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을 행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가 오는데 그들이 항하는 이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은 모두 사탄의 활동에 따라 된다는 것입니다. 안나타나는 것을 조작해서 나타내는 것을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기의 종들에게 이런 사기도 치게 하지만 실제로 능력을 줘서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그것들만 추구하도록 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탄의 활동에 따른 미혹을 허락하심으로 거짓 것을 믿는 일을 보시면서도 그대로 두시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 모두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든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든지 간에 인간의 선택에 두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분명 진리보다 나타나는 기적만을 더 추구하는 사람들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늘날 생명의 주인이시며 그 자신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악한 자의 활동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결과를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하는 그대로 두시는 이유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하는 불의한 자들에게는 심판을 받도록 하시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능력과 표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에게서도 역시 각종 능력들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능력을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 매일같이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각종 표적을 행하시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셨지만 그것에 매일 집중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늘의 진리를 보이시는 것에 더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구원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드러내시고 증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에 나와있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따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율법과 전통에 사로잡힌 자들의 끊임없는 박해가 너무나 심해서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을 떠나가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도들을 성령충만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서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의 성도들은 더욱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졌고, 하나님 나라의 삶이 그들 가운데 증거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놀랐습니다.
그럴 수록 율법과 전통주의자들인 바리새인, 사도개인,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유대인들은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서 교회의 숨통을 더 조이기 위해, 그리고 교회를 망하게 하기 위해 감옥에 가두고, 채찍으로 때리고, 협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그들이 행하는 일을 보고 그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풀어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풀려난 사도들은 교회로 돌아가 온 교회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4장 29-30절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제 사도들과 교회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기도하고 있습니까? 첫째로는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종들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주옵소서”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셋째로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해주소서”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넷째는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셋째와 넷째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기도인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소서”하는 기도를 보면 그들은 자기들을 박해하는 대적을 멸하기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고 있는 자신들을 보아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박해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27-28절에 나와 있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 말씀 앞에 있는 25-26절을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적어도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1000년에 있건 사람인데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많은 대적들로부터 고통을 겪었던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데 이것이 훗날에 일어난 그리스도께서 받게될 박해에 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25-26절입니다.
시편 10편 2절을 보면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하고 있습니다. 악한자가 교만하게도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고 있으니 하나님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들을 벌하시는 방법중 하나가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25편 19절을 보면 “내 원수를 보소서 그들의 수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하나이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31편 11절에는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이웃에게도 심히 당하니까 친구들이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피해가 있을까봐 피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이 판 함정에 그들이 빠지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지만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그들을 그냥두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당하는 위협과 박해를 굽어 보아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굽어 보아달라는 것은 자세히 살펴보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그 박해와 위협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역시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혼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를 좀 자세히 보아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하고 솔직하게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기도는 “종들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주옵소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능력을 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보다 앞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교회에서는 항상 진리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능력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가 다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가 나타나는 능력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할 일은 이웃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복음이 하나님이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그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가 박해를 당하면서 구했던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 그들이 걸린 병을 고쳐줄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과 거룩한 종,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에게 임한 표적도 있지만 불신과 죄악의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표적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표적만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표적을 행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혹은 매일 같이 병이 낫고 표적을 행하며, 귀신을 내쫓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경우를 보면 에베소에서는 놀라운 부흥이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서는 엄청나게 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하지만 두아디라 지역에서는 한 명의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을 고쳤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 성도들에게 많은 외적인 사역의 능력들을 행할 수 있는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이라는 은사 장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8-11절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들을 나타내는 은사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그러면 언제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능력으로 나타날까요? 그것은 온 새상의 주인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원하실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사역을 일으켰던 표적 자체만 보지 말고 그 일이 일어났던 전후의 사건을 보면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치료하시고, 고치시거나 또 다른 능력을 나타내실 때에는 반드시 그 이후에 일어날 어떤 일을 계획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기도를 드릴 때가 많이 있지만 대부분 하나님께 누군가를 치료해달라고 기도할 때 그 사람 한 사람만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기도 하지만 그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역사나 또 다른 어떤 능력을 행하실 때는 또 다른 역사와 연결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안에서 손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안에서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고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며, 안식일에는 무엇을 하지 말라에 초점을 두는 것은 율법적인 사고 방식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은 생명을 살리며 구원하는데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만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을 누리지 못할 여건에 놓여 있는 사람을 고치고 구원하심으로 인해 그들 역시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나면서 걷지 못했던 하반신 장애인의 경우를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이 달라고 하는 돈이 없어서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서 손을 잡아 일으키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나음을 받았던 이 사람은 일어나자 마자 성전으로 들어가 자기가 나은 것을 신기해하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많은 예배자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했습니다.
많은 설교들이 이 고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이후에 일어난 박해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박해를 받을 때 사도들의 태도가 어땠는지를 말씀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더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오천이나 되었다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하반신마비 장애인의 치유는 그 자체로 끝난 것이 아닌 하나님이 구원하실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도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빌립보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여자를 보면 쫓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는 것과는 다르게 사도 바울은 그 여인과 부딪치는 것을 피하여 자리를 옮겨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귀신이 그 여종으로 하여금 사도 바울 일행을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떠들면서 훼방을 놓았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 그렇게 하니까 사도 바울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보면서 그 여인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꾸짖고 나가라고 하자 귀신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이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있으면서도 왜 이 여인을 귀신으로부터 빨리 자유케 하지 않았을까하고 의문스럽지는 않습니까? 그 이유는 그 여인의 배후에 있는 주인들의 완악함과 그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고 났을 때 일어난 일을 보면 여러분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귀신들려 점을 치는 이 여종의 주인들은 어쩌면 부부일수도 있지만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둘 이상의 주인이 있었고 그들은 이 여인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용과 갈취를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을 고쳐주게 되면 그 여인은 자유롭지만 원치않는 소송에 휘말릴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에게 귀신이 들린 것을 알았고, 또 쫓아다니면서 훼방을 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을 내쫓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상대로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쫓자 그 여종의 주인들로부터 사도 바울은 고소를 당했고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원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와 찬송소리는 들으시고 또 다른 권능을 행하셨는데 옥 전체에 지진이 나고 묶였던 쇠사슬이 벗어지고 감옥문을 다 열어놓으셨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한 것은 기도와 천송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찬송과 기도를하면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벗겨진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날 간수의 가정이 모두 구원을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벗겨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보고 나가라고 이렇게 쇠사슬을 끊어주시고 옥문을 열어놓으셨구나” 그러면서 흥분해서 감옥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실라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어두운 감옥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횃불을 들고 안으로 뛰어들어갔을 때 감옥 안이 비어있는 것같아서 죄수들을 놓친 책임을 지고 자결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죽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한 명도 도망을 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이 간수가 없드려 묻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주 예수을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거기서 그 가정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 때문에 사도 바울 일행이 이 간수의 집까지 인도를 받았습니까? 점하는 여종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방해가 오히려 다른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연결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사도 바울이 행한 행동을 보면 의아한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자기를 감옥에 가둔 로마 장교에게 통보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장교는 확인도 안하고 로마시민을 매질하고 가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것을 매맞기 전에 밝혔으면 매를 안맞아도 되었을 뿐 아니라 감옥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매는 매대로 다 맞고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 간수의 가정이 구원받은 후에야 자신이 로마 시민인 것을 밝힙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 능력으로 자기 개인적인 명예와 부귀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 능력으로 누구든지 다 고칠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부터 그런 권세와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치료받는 사람과 그 사람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영혼을 구원하는데 까지 이르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린 종이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절제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갖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복게 될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한치 앞에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하는 여러분이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절묘하신 섭리 가운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그 능력을 구하십시오. 능력을 구하되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능력을 구하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나라와 그 이름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 그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시면서 그에 맞는 인격을 성장시키시고, 또 그에 맞는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게 하시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온전히 쓰임받는 제석교회의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