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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해방신학이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방신학의 주창자들도 그 영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미사회의 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 그들이 제안하는 사회적 분석이나 행동을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그들은 자랑스러워하는 듯하다. 해방신학의 몇 가지 주요한 개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예를들면, 역사의 발전과정에서의 결정적 요소로서의 경제, 마르크스주의의 노동과 계급투쟁의 개념들, 누르는 자 자신들에 의한 눌린 자들의 해방 실천행동, 자신의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인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부터 결과되는 새 사람과 새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 등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뜻한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신학과 방법론이 다르다는 사실과 해방신학이 구체적인 상황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유럽이나 북미의 신학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해방신학도 서구신학 및 서양사상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깊은 영향아래 전개되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의 양상은 동일한 형태가 아니며 각지역 각 계층은 해방신학의 논리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제 나름대로 각색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처럼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을 부르짖는 해방신학, 미국 흑인의 흑인성을 주장하는 흑인신학, 여성천대의 비인간화에 대항하는 여성 해방신학이 있으며, 심지어는 인디언, 노인, 맹인, 동성연애자들도 제각기 해방신학을 거론하면서 저들의 편협한 시각에서 해방의 문제를 보고 있다(여기 “해방신학”과 차항의 “민중신학”을 서술함에 있어 최남규 목사의「해방신학과 해방신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연구」와나용화 교수의 「민중신학 평가」를 참조 하였음을 밝혀둔다)
ꊱ 해방신학의 개요
1)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은 1960년대 후반에 출현하기 시작한 혁신적인 신학체계이다.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덜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처음 구체화되었으며, 이후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제3세계에 퍼져 유럽신학의 전통과는 다른 제3세계의 신학으로 대두되었다. 역사적 사회적으로는 피억압과 경제적 좌절, 사상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신학적으로는 칼 바르트의 종말론과 본회퍼의 정치신학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해방신학은 하나님이 압제받는 자들과 함께하며 고난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하고 있음을 선언하면서, 현세의 구조악에서의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임을 주장한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선진국에 대한 후진국의 탈종속, 빈부격차의 해소, 인종과 성차별의 철폐, 인간성을 억압하는 구조악에서의 해방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른 방법론으로 정치에 대한 깊숙한 개입, 계급투쟁, 정당한 폭력 등을 정당화하는데, 이것들은 해방신학을 둘러싼 논의의 쟁점이 되고 있다.
3) 해방신학들 가운데는 정치적 성향을 강조하는 자들과 기독교의 구원을 신학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양극화 현상이 있는데, 전자로는 구티에레즈(G. Gutierrez), 후자로는 피로니오(E. Pironio)를 대표자로 들 수 있다. 해방신학은 정치・경제・사회적인 쏙 영역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해 신학적 이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유럽 및 미국의 신학자와 교계지도자들이 3세계의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의 정당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둔 것, 하나님을 특정 인간의 편에 세우는 편견, 과격하고 일방적인 성격해석 등으로 인해 크게 비판을 받기도 한다.
4) 18세기의 구라파에서의 예수전 운동은 자유주의 학파에서 유래한 것으로 예수의 신성보다는 인성에 초점을 맞추고 성경을 분석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사회 정신 산업계의 여러 혁명들과 다양성들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신학은 인간을 중심으로 인간에 맞춰 성경을 비판했다. 19세기의 이성 중시주의자들은 성경을 신화와 우화로서만 인정하고 이해하려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성경을 해석하려했기 때문에 성경의 기적이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5) 이러한 성경의 관념적 이해에 반대하여 나타난 해방신학은 교회가 좀더 현실에 뛰어 들기를 바라며 행동하기를 원한다. 방법론적 특징으로는 ① 행동이 교리보다 앞선다. 현실이 우선되고 선과 악을 위해 성경은 참고서가 되고 성경 외의 다른 이론들도 참고할 수 있다. ② 성경에 대해 재해석을 해야 한다. 신약기자가 구약을 인용하여 신약을 기록한 것과, 예수님은 구약의 사건들을 하나의 대표로서 인용했고, 현대의 교회도 이 시대의 사건들을 분별하기 위해 표상론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해방신학자들은 성경계시의 계속성을 주장하며 신학자들은 조명과 계속되나 영감은 끝났다고 한다.
6) 간 하배(Harvey Conn)와 킬렌(Allan Killen)은 해방신학의 기초적인 이론적 근원으로 본회퍼를 언급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대표적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를 좋은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는 본회퍼를 인용하여 해방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자유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어떤 것보다.... 자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다른사람이 나를 그에게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이 내가 자유하는 것이다.”고 말이다.
7) 교회의 사명과 관련하여 해방신학의 교회론에 따르면, 교회의 목표는 ‘천당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의 대의(大義)를 선택하며, 압제자들의 불의를 고발하고, 억눌린 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정치화시키기’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보다 더 정의롭고 자유하며 인간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목적을 가지고 해방의 프락시스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은 그 투쟁이 물리적 폭려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워하지 않고 싸워서 사랑해줘야 되는 압제자들에 대한 폭력적 투쟁과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간에 모순이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계급투재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폭력사용에 관하여 변증가들이 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윤리학적으로 이론들을 만들어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은 여전히 존재한다.
ꊲ 해방신학의 유형
1)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해방신학의 출발지로서 라틴 아메리카는 과거 서구 식민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아래 놓여 있다. 그리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이 특수한 상황속에서 종속이론과 밀착되어 전개되었다. 즉 해방신학은 미국을 포함한 서구 자본에 의해서, 그들의 삶의 조건이 결정되는 상황에서의 해방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의 해방신학운동은 계급투쟁의 방법을 차용하여 전개되며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도 띠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와 그 추종자들은, 쿠바의 혁명을 통해서 그들이 게릴라전 이외의 방법으로 혁명을 모색해야 할 것을 시사 받았다. 그들의 해방투쟁은 정치적 참여를 위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연합하고,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적 신앙과 행동에 배합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체 게바라(Che Guevara)나 토레스(C. Torres)같은 신부는 성직을 버리고 전적으로 해방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까마라(Dom Hider, Camara)대주교도 다수의 지식인들과 함께 정치적 해방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같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궁핍으로부터의 해방과 계급타파라는 정치적 혁명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해방신학자들은 세군도(J. L. Segundo), 보니노(J. M. Bonino), 구티에레즈(G. Gutierrez), 숄(R. Shaull), 보프(Boff)등을 들 수 있다.
2) 미국흑인의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의 경우, 아프리카의 대륙에서 노예선에 팔려온 후 조직적인 인종차별을 받아온 흑인 체함이 신학적 컨텍스트를 이루고 백인의 백색 우월주의는 흑인을 그들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단절시켰을 뿐 아니라 그들의 피부색이 마치 노예로서의 숙명적인 인간 조건인 것처럼 인식시킴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교회는 적어도 백인의 흑인지배를 외면하거나 정당화해 줌으로써 재배의 도구가 되어왔다. 그러다가 1950-1960년대에 들어와 흑인 자신들의 자각과 주체의식의 회복으로 구체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흑인 인권운동과 흑인신학의 지도자로는 앨버트 클리지(Albert Cleage),조셉 와싱톤(Joseph Washington), 말콤 엑스(Malcom X), 마틴 루터 킹(Matin Luther, King)등인데 그 중에서도 흑인신학의 이론을 가장 체계 있게 수립한 자는 제임스 콘(Jame H. Com)이다. 그는 “미국의 흑인들이 그들의 정신과 최선의 삶”이라고 미국의 전 흑인에게 호소하고, 흑인들끼리 뭉쳐진 그 힘, 블랙파워(Black Power)가 곧 정의라고 규정한다. 그는 흑인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 백인과는 완전히 독립된 인격적 존재요, 백인의 노예화나 억압된 착취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흑인은 자신의 블랙파워에 의해 노예와 착취,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흑인 해방신학은 그의 성경적 근거를 예수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낮았다는 것, 죄인의 상황을 스스로 자신의 실존적 상황과 동일시한 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억눌린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3) 아프리카의 해방신학 아프리카 대륙은 대체로 서구 여러 나라의 식민통치하에서 천연자원인 금, 다이아몬드, 알미늄, 우라늄 등의 천연자원을 수탈 당했고, 절대다수의 흑인 원주민들이 절대소수의 백인에게 차등지배를 받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 정책으로 노동 및 교육부문을 포함한 경제적, 정치적인 모든 부문에서 차별을 받았다. 2차대전 후 그들은 산업개발능력, 정치능력, 교육능력의 부족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식민주의자들이 심어놓은 악한 씨의 결과이며, 이점에 대하여 오랫동안 교회가 무관심해온 결과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흑인의식의 신학은 “아프리카 교회의 주체성을 살리려면 아프리카 교회의 해방이 있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 기독교의 선교신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 기독교의 선교신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이 ‘백색 하나님’(White God)이라는데 대하여 그들의 하나님을 ‘검은 하나님’(Black God)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백인신학과의 모순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최종적 정의로서 “예수는 흑인 메시야” (Jesus is the Black Messiah)라고 규정짓는다. 그래서 흑인의식의 신학을 비인간적인 역사현실,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는 세계적 혁명으로 이해하려 하며 특히 권력의 이념들과 야합하는 백인신학을 배격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흑인의식의 신학을 억압과 인종차별로 부터의 해방신학임을 역설하고 있다. 흑인 해방신학의 대표자로는 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Desmmond Tutu)주교, 마니스 바데라지(Manas Bathelazi), 그리고 아렌 보에사크(Alan Boesak)등을 들 수 있는데 보에사크는 가장 대변자적인 해방신학자이다.
4) 여성해방의 신학 2차 대전 후 일어난 기독교 일각의 또다른 혁명은 여성해방운동이다. 이것은 남성위주의 문화안에서 살아온 여성들이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투쟁이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신학은 지역적 상황에서의 해방신학이 아니고 성(sex)의 관점에서 본 여성의 ‘남성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여성 해방신학자들은 여자들이 전통적, 제도적, 사회적으로 천시되고 남자에게 억압당하고 종속되는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마땅히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해방운동이 과격해지면서 온 몸에 문신을 새겨 남자 못지않은 과격성을 과시하려 하는가 하면, 또 여성 동성연애(Lesbianism)를 정당화 시키려는 넌센스가 벌아지기도 한다. “예수님의 사적을 해석하고 기록한 이들은 모두 남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편견을 통해서 전달되는 예수님밖에 만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는 여성해방신학은 다른 해방신학에 비하여 아직 초창기에 머물러있는 상황이고, 남성들의 호응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다. 여성 해방신학자로는 케사리나 하크(Catharina Halkes), 레티 렛셀(Letty Rus- sell), 마가레트 미드(Margaret Mead), 버지니아 모렌코트(Virginia Mollenkott), 켸롤 크리스티(Carol Christi), 쿠어트 루티(Kurt Luthi)등을 들수 있다.
ꊳ 해방신학의 주장
1) 해방신학의 이론은 성경의 황금율인 제2계명(이웃사랑)과 제1계명(하나님 사랑)을 바꾸어 놓은 것이며「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 16:26),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는 등의 생명관 신관을 따르지 않고 있다. 특히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보고 분노를 발하는 제자들(마 26:6-13)의 생각과 은 삼십냥을 받기 위해서 예수를 제사장에게 넘겨주는 가롯 유다의 마음과 해방신학의 골격은 질적으로 같다고 할 것이다.
2) 해방신학은 전통적 신학이 신의 계시로서 성경에 절대성을 두는데 비해 상대적인 인간 상황에 관심과 충성을 쏟는데 그 신학의 특성이 있다. 그들의 신학적 행동의 동기와 역사는 다음 세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해방신학의 상황적 근원은 중남미의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중남미의 종교적 상황 정치적 불안, 경제적 가난은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등 인간의 해방에 눈 뜬 지성들, 특히 성직자들의 사명적 관심이 되었던 것이다. 계속적으로 야기되는 군사독재자들의 부정부패와 그와 결탁한 자본주의 국가와의 경제적 종속에 의한 불평등을 실감한 성직자의 양심활동리 없을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신학자들의 행동을 자극시킨 것은 프레비쉬(Roul Prabish)같은 경제학자들의 현실 고발이었다. 프레비쉬는 브에노스 아이레스대학 경제학 교수로서 UN무역 개발협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는 남미의 경제발전의 실패는 중심국에의 경제적 종속(dependence) 때문이라고 고발했던 것이다. 둘째 해방신학의 사상적 배경은 마르크스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죄의 해결의 방법을 사회조직의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급진적 혁명에 기대한다든지 또는 사회 계층간의 문제 해결 방법에 있어 다만 투쟁을 유일의 방법으로 선택한다. 이러한 신조는 마르크스의 사회철학을 그대로 재판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해방신학의 신학적 근거는 신학자 본회퍼의 사상과 생애에 두고 있다. 그는 나치즘에 저항하다 잡혀 처형당한 개신교 목사였다. 그는 히틀러라고 하는 버스 운전기사가 미쳐서 독일이라는 모든 승객이 위험에 처해 있으니 승객을 구하는 길은 미친 운전기사 히틀러를 버스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 아니냐며 무력저항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그의 중심사상은 종교성 없는 기독교로서 종교의 현실참여에 있었던 것이다.
3) 해방신학은 중요한 3단계 특징을 지닌다. 첫째 단계는 남미에 있는 대중이 가난하고 억압을 당하는 백성이라고 분석하는 일이다. 부자와 자본주의자들과 세계의 경제구조에 의해서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석하는 일이다. 가난한 자들이 인간 본연의 권위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분석하는 일이다. 그래서 비참한 가난의 상태를 들추어내야 한다고 한다. 둘째 단계는 신학적 성찰이다. 해방은 이제 모든 신학적 사고를 특징 지우는 중심개념이 되었다. 우선 하나님에 대해서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놓았다. 정치적인 활동에 관여하는 하나님, 항상 가난한자들의 편에서서 항상 부자들을 반항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죄와 사단에 대해서도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죄는 자본주의 속에, 식민주의 역사속에, 그리고 현대화의 이데올로기 속에 있다고 규정했다. 셋째 단계는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을 의식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들의 비참을 분명히 의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배 계급과 가난한 자들의 계급과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것도 의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복의 전략이 만들어진다. 폭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의 조직이 만들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4) 해방신학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장하고 강조한다. 첫째 그들은 신학이 아니고 인간학이라는 점에서 인간 문제, 그 중에서 눌리고 억압받고 가난한 자를 새 신학의 과제로 삼고 그것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신의 말씀의 계시로서의 조명이 아니라 가난한자들의「신음」에서 신학의 출발점을 찾는다. 그렇다면 어찌 그것이 신학 일 수 있단 말인가? 둘째 해방신학이 사회과학 특히 마르크스주의를 신학적 해석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항이다.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죽음의 키스」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자들은 반문한다. 중세기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방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을 해석학의 도구로 삼아 신학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인이 아닌 이방인 칼.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을「분석의 도구」로 삼아 신학을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고 향변한다. 빈곤과 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적 해석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유토피아 의식에 대한 실천방법을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실천이란 신을 부정하는 실천이다. 셋째 해방신학자들은 교전(交戰, engagement)을 강조하면서 신학은 언제나 가난과 사회악과의 교전으로부터 시작하여 재교전(reengagement)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에서 애용되는 말은 실천(praxis)인데 이 말의 뜻을 사회를 변혁하는 과정에 신학이 참여함을 뜻한다. 즉, 신학한다는 뜻은 「행동하는 지식」, 「지식있는 행동」이라는 뜻으로 믿는 것이다. 구티에레즈는 지식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식은 어떤 객체적 존재와나의 주관적 마음이 일치함을 뜻하기보다 새로운 세계를 혁명적으로 건설하는 일에 참여함이다』라고 말이다. 넷째 해방신학은 이스라엘의 해방의 사건 출애굽을 성경의 중심적 메시지로 보는데 문제가 있다. 그들은 출애굽 사건기가 성경진리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원리라고 하면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원관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출애굽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인류 개개인들의 죄에 대해서 보다 인류전체를 또는 많은 인류를 억누르는 정치적 불의와 경제적 구조악에 대하여 더욱 큰 분노를 느끼고 그들에게 해방을 주시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을 찾아서 연구실의 책더미 가운데서가 아니라 거리와 시장과 난민촌의 한 모퉁이에서 빈곤과 사회적 불의와 투쟁하는 praxis라고 한다. 중남미 해방 신학자들은 하나님은 「오늘의 바로 들」에 대하여 분노한다고 한다.
ꊴ 해방신학의 방법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이렇게 결론 짓는다. “해방신학은 새로운 주제들을 내놓는다기 보다는 신학하는 ‘새로운 길’(a new way)을 제시한다고 보겠다. 역사적 시행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신학은 역사를 해방시키는 신학이다. 즉 인류의 역사를 해방시키는 변혁의 신학이다. 따라서 교회에 모여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인류의 역사를 변혁하는 신학이다. 이것은 세계를 반성 고찰하는데서 머물지 않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과정의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신학이다.”고 한다.
1) 실천에 관한 비판적 성찰 해방신학자들은 그 자체안에 이미 실천적(Praxis)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식과 지혜의 사변적 놀이가 아닌 구체적으로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자들은 ‘실천에 관한 비판적 성찰’이 일반적으로 해방신학의 방법론이라고 말한다. 구티에레즈는 신학을 ‘실천에 관한 비판적 성찰’로 정의하는 것이 ‘예지로서의 신학’이나 ‘합리적 지식으로서의 신학’과 같은 고전적 과제들에 대한 보완책이 될 수 있다고 밝힌다. 따라서 유럽의 신학이 정통교리(Orthodox)에서 출발한다면, 해방신학은 정통실천(Orthopraxis)에서 출발한다. 이말은 유럽의 신학이 기독교의 원리와 신조를 전제로 하여 신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것에 비하여, 해방신학은 복음에 대한 원리적 이해에서 출발하여 삶과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 승인에서 출발한다.
2) 의식의 교육 해방신학의 실천방법 중 하나가 의식화(意識化)교육이다. 의시고하 교육이란 용어는 본래 브라질의 교육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rk 대중화시킨 것으로, 그것은 성인들에게 일상생활의 자료를 이용하여 빨리 잃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방법이다. 그의 교육목표는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의 개선과 관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방신학자들은 그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방법을 이용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민중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것은, 그들이 원래 가난하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선진공업국들의 자본주의자들의 착취에 기인한 것이 라는 내용을 폭로함으로써, 자신들이 얼마나 혹독하게 억압당하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인식시켜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하였다. 더 나아가서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은 자신의 발전은 부유한 나라의 지배를 파괴하는 투쟁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3) 폭력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 해방신학에서는 가난하고 억압되자에 대한 해방의 수단방법은 폭력혁명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모든 정치신학, 혁명신학, 그리고 해방신학의 공통점은 신학을 정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중요관심사는 사회의 변혁이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감행해야 하고, 그럴려면 적극적인 폭력행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구티에레즈는 억압당하고 있는 자의 해방은 억압하고 있는 자도 해방하며, 따라서 보편적 사랑은 억압당하고 있는 자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억압하고 있는 자들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억압자들을 억압자로서의 그들의 비인간적 여건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그들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억압당하고 있는 자들의 편을 결단성있게 택하지 않고는, 다시말해서 억압하는 계급과 전투를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이웃 사랑을 우선 하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를 우위에 두었다. 인간의 구원과 해방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데 수반되는 것이다. 해방신학에서 예수님은 희생적인 삶과 세상 사람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한 것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신앙의 그리스도 보다는 역사의 그리스도를 더 강조한다.
4)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 도구 수용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직접, 간접으로 너무나 심각하게 받고 있으면서도, 해방신학자들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수용하지 않고다만 계급형성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그 과학적 사회분석을 도구로만 사용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런 일은 기독교 신학에서 있을수도 없지만, 전략적으로도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분석은 그 어느 사회학보다 더 과학적이며,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현실을 설명하는데는 가장 적당한 도구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과연 마르크스주의를 도구로만 사용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특히 그 사회분석적 방법론만이 아니라 그 계급투쟁, 포력적 사회주의 혁명까지 받아들이는 경우 해방신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의 이념과 그 전략을 도구로만 사용하고 마르크스주의의이데올로기는 수요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할 수밖에 없다.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를 도구로만 사용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지 않거나 혹 그 도그마(dogma)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실현성 없는 공론에 불과한 것이다.
5) 폭력을 치유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시도한 방법에는 엘라쿠리야(Ellacuria, lgnacio : 스페인 신학자)에 의하면 세 가지 실례가 있다. ① 경건주의자 파우카울드(Charles de, Faucauld) - 그는 폭력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살았으나, 그들을 위하여 싸우지는 아니했다. 그는 사랑과 온유와 봉사의 모범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그쳤다. ②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 그의 동기는 기독교적 사랑이고, 불의와 싸우는 그의 방법은 비폭력이었다. ③ 카미로 토레스(Camilo Torres) - 그는 게릴라 신부이었다. 엘라쿠리야에 따르면, 이사은 구속적 정신으로 폭력의 문제를 다루는 기독교적 방식의 세 가지 실례들이다. 그 실례들 중에 어느 것도 기독교적 가치들이 부인되지 않고 있다. 어떤 기독교인도 기독교의 모든 부요함을 표현할 수 없다. 여러 집단의 기독교인들이 복음의 메시지와 그리스도의 모범의 다른 중요한 면들을 발전시켜야 한다. 파우카울드는 복음의 초월적인 면을 나타냈고, 루터 킹은 사회적인 면을 나타냈다. 손에 총을 든 카미로 토레스는 복음의 어떤 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 카미로의 경우는 그의 절망적인 상황의 관점에서 고려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엘라쿠리야는 그 문제를 피하려고 한다.
ꊵ 해방신학의 비판
1) 우리가 해방신학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신학은 분명 「기독론」에서 그릇되어 있다. 그들이 본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자」요 「혁명가」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주 이심에 대하여는 별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죄에서 대속하신 면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구원은 여러영역에서 억압받고 신음하는 민중을 해방하는 면에서 이해되고 있따. 이들의 그리스도의 구원관은 소위 ‘사회 구원’이라는 말로 많이 소개되었다. 그렇다면 이 설명은 사실인가? 성경적인가? 물론 어떤 이론을 세워놓고 이를 성경적으로 비추어보면 근사한 근거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2) 보수주의 입장에서 해방신학의 문제점들을 찾아 보자. ① 해방신학은 성경의 상황적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구티에레즈를 비롯한 대부분의 해방신학자들은 성경본문에서 신학을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현실이 교과서이고, 성경은 자기들의 입장을 합리화해 주는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경은 어느 시대나 어느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규법이요 진리이지 결코 참고서만이 될 수 없으며, 성경을 현실의 관점에서만 재해석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이다. ② 해방신학이 기독교인의 경제 및 정치적 책임을 강조한 일은 배울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반기독교적이요 사회주의는 기독교적이라는 판단은 잘못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비판은 엄밀하고 정밀해야 하며 과장이 없어야 한다. 비평은 무조건 부정(wholly negative)이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 그런데 해방신학의 시안은 사회에 대하여 부정 일변도이다. ③ 해방신학은 해방을 신학의 중심으로 삼는데 해방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되지 못한다. 특히 사회 정치적인 차원에서의 해방이 복음의 핵심적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성경의 신학의 핵심적 교훈은 사람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④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를 영웅시하는 과오를 범한다. 가난한 자가 가진 자가 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타락하는 연약성을 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해방신학은 무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이 면에서 해방신학은 인본주의적 운동이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전제는 신학의 기본이다. 이를 무시하고 지나치게 인간이 역사를 주관하려고 하면 반드시 피흘리는 혁명과 피를 뿌리는 투쟁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한국의 민주화를 어떤 민중 봉기의 승리라고만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 배후에서 강하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스리는 것은 어느 편이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라가 바로 되는 것은 혁명이나 투쟁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자기 개혁에서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⑤ 해방신학이 사회과학과 제휴하고 그와같은 사회적 차원을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방신학이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차용한 개념들을 신학속에 끌어 넣으려고 한데서부터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특유한 사회적 상황이,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과 그 사회주의적 혁명이 전력을 받아들여 그것들을 신학속에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을 계급투쟁으로가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갈등의 문제로 인식했더라면,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폭력적 사회주의 혁명이 가져온 공산주의 사회는 부의 균등보다는 생산의 둔화 내지 저하를 초래하여 오히려 가난의 균등화를 초래하였고, 인간을 해방시키기 보다는 노동의 기계로 만들고 마는 총제적 이데올로기의 체제에 노예적으로 예속시키고 말기 때문이다. ⑥ 해방신학은 이론보다는 실천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폭력과 혁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무조건적인 행동주의, 자살주의 테러리즘으로 빠지기 쉽다. 예수를 승리자(victor) 보다는 희생자(victim)로 파악하고 억압받는 자로 이해함으로써 기독교가 제시하는 축복의 장면을 외면한다. ⑦ 해방신학은 예수를 정치적인 해방자로 본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불의와 싸우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혁명가라는 잘못된 비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만약 혁명신학자들의 해석이 옳다면 유대인들의 주장도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세의 억압자들의 피를 흘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피를 흘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오셨다. ⑧ 해방신학은 기독교의 내세관을 의곡했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와 종말론 사상은 한마디로 이땅에서만의 내재주의이지 미래의 종말과 심판은 없다. 해방신학자들은 미래적 왕국과 현재적 왕국을 혼동하였으며, 하나님의 의와 세속적 의를 혼동하였다. 그 결과 복음의 메시지의 중심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땅위에 자유의 왕국, 즉 지상의 유토피아를 성취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승리적 행위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주와 세계를 주관하시는 분임을 부인하게 될 때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비신화하해 버리고 말게 될 것이다.
3) 한국교회가 해방신학에 의연히 대처하기 위하여 다음 다섯 가지를 제안해야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참관계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성경만이 유일한 규범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방신학은 성경보다 상황을 우위에 두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떠날 뿐 아니라, 인간과 현실에 대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의곡해 버림으로써 신학적 과오를 범하고 있다. 둘째, 한국교회는 해방신학의 이러한 오류에 대처하기 위하여 성경적 현실관을 재확인해야 한다. 즉 우리 모두는 눈을 떠서 회개하고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귀하심 앞에 두려워 떨며 구분 앞에 복종하지 않고는 결단코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개인의 죄악이나 국가의 죄악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죄악임을 인정하고 이 모든 죄악의 궁극적 책임을 개체적 인격체로서의 각 개인에게 물을 뿐 아니라 그 죄악의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져야 한다는 결손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셋째, 현실참여의 방법이 세속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 성경적 방법이어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현실참여의 방법은 해방신학에서 처럼 오늘의 사회를 변혁시키며 구조악의 제거를 위해 폭력이나 혁명을 통한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된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완전히 부인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위한 사랑의 봉사생활로 되어야 한다. 이웃사랑은 곧 자기 부인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가진 자나 못가진 자나, 억압 자나 피억압자나 모두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꼐 돌아와, 자본가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 사업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증진을 위해서 일해야 하며, 근로자들도 위로부터 부르진 응답하여 맡은 바 직무에 충성을 다함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넷째, 한국교회는 선교의 개념을 재검토하고 방향을 복음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사상에 의한 에큐메니칼 선교의 급진적 선교사상에서 개인의 영혼구원을 목표로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 이방인 개종을 위한 선교사파송, 그리고 교회 설립을 내용으로 하는 선교사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섯째, 오늘의 한국교회는 가난한자 병든자 각종 소외되고 천대받는 자들의 인간성 회복에 대하여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의 주장이 해방신학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해방신학자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라는 관점에서만 현실을 보며, 이같은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성경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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