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함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아버지이기 전에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킨 동암은 저에게 너무 큰
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 동암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목 메이게 부르는 저는 어느덧 아버님이 세상 떠나실
때보다 더 늙은 일흔여섯의 아들이 되어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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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차리석 선생과 부인 홍매영
여사 |
동암이 걸어가신 길은 이 길 저 길이
아니라 오직 한길, 조국 독립의 길이었습니다. 분단의 길이 아니오, 분열의 길도 아니오, 사방팔방 갈래갈래 찢긴 길은 더욱 아니요, 오직 한민족의 하나 된 길이었건만 환국을 앞두고 아버님이 먼저
떠나시고 백범 선생님마저 흉탄에 가신 뒤에 오천년을 한 하늘 아래서 살던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나뉘고, 좌우로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못난 아들은 동암의 길을 감히 헤아릴 수 없고,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국 독립의 길, 고난의 길, 풍찬노숙의 길을 걸으면서 남긴 아버님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싶어 병든
노구를 이끌고 길을 나섰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수립 100주년을 앞둔 2019년 3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상해, 가흥, 항주 등 임정 유적지 세 곳을 다녀왔습니다. 제 발길이 멈춘 곳은 항주 임정기념관이었습니다. 항주는 어떤 곳입니까.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일제의
‘상해사변 승리 및 천장절 축하’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 원흉들을 제거한 상해 의거
이후,
이동녕과 김구 주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야
했고 역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김철·차리석·송병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는 임정의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항주를 찾았습니다.
일경과 밀정이 호시탐탐 노리는 살벌한
상황에서 임정의 국무위원들은 항주 청사 주변 서호(西湖)에 배를 몰래 띄워 놓고 임정 재건을
도모했습니다.
1932년 5월에서 1935년 11월까지 임정이 거점으로 삼은 항주에서 동암은 위기에 처한 임정을
재건하고 지키면서 임정의 파수꾼이 됐습니다. 아, 그때! 누란에 처한 임정이 일제에 의해 와해됐다면 대한민국의 법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버린 채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독립운동사를
어찌 자랑할 것입니까. 저는 민족의 일원으로 임정을 지킨 동암에게 감동했으며 아들로서
아버지의 공로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임정의 마지막 망명 정부 청사가 있던
중경에서 1944년 2월에 태어났습니다. 그때 동암의 연세는 예순넷, 백범이 “늙은 동암에게 아들이 생긴 것은 하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늙은 아버지는 어린 저를 축복으로
여겼지만, 어린 자식과 함께 한 시간은 1년 반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백범이 먼저 환국한 뒤 임정의 환국을 준비하던 동암은
1945년 9월 9일 과로사로 순국하면서 조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두고 눈을 감을 때의
심정을 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기천사의 재롱을 선물하는 손자를 키우면서 아버지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아, 내가 꼭 요만할 때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두고 눈을
감으셨는데,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항주 임정기념관에 걸린 아버지 동암의 사진 앞에서 저는 그때의 어린
자식이 되어 눈물짓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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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암 차리석 선생 장례식(충칭 임정 청사,
1945.9.12) |
아버지가 쓰러지자 어머니는 저를 안고
병원에 찾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동암은 “젊은 여인에게 짐만 지워놓고 같이 귀국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오. 그러나 영조를 데리고 귀국하면 정부든 주변의 누구든 이 아이를 키우는
데 도움을 줄 것이오. 그리 알고, 귀국하시길 바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조국은 동암이 생각하던
조국이 아니었습니다. 임정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범석 장군님이 초대 국무총리를 하시고 백범
김구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승만에 의해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어머니와 저는 문전걸식하는 거지
생활까지 했습니다. 구걸해 온 밥은 한 끼니인데 이를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니로 나누어 먹다 보니 하루 종일
배고팠습니다.
노점에서 양담배를 팔아 생계를 이을지언정
아들 핑계로 손을 벌린다는 구차한 말을 듣기 싫었던 어머니 홍매영 지사는 어떤 도움도 구하지 않고 홀로 저를 키웠습니다. 청상(靑孀)의 몸으로 독립운동가의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생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어머니는
“수입에 맞게 생활해라”, “갚을 길이 없는 돈은 꾸지 마라”, “굶어 죽을지언정 남에게 손을 벌리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의 생활신조 덕에 저는 닥쳐올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6개월치 생활비를 비상용으로 남겨두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아들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힘들고 위태로운 길이었습니다. 백범이 흉탄에 서거한 뒤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어머니는 저를 지키기 위해 차(車) 씨에서 두 획을 지워 신(申) 씨로 바꿔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학업을 중단한 뒤에는 아이스케키
장사,
여관 보이, 국밥집 배달원 등의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홀몸으로 저를 키우신 어머니는 1979년 66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서른다섯에 어머니를 잃은 저는 한전
검침원으로 일하고 중동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가서 건설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7년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일제가 물러갔는데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에 울분이 쌓였던
것이 화가 되고 병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법통인 임정을 훼손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곡하는 친일파
천지의 세상에 절망한 것입니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은 동암의 아들로서 당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에게 촛불혁명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마침내 임정의 법통을 잇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임정
100주년 기념사업이 전개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예우하는 등 독립운동이
제대로 조명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감격하고 말았습니다. 이제야, 나라가 독립했구나. 역사 정의가 실현됐구나.
하지만 촛불혁명의 불빛에 겁먹고 숨죽였던
친일반민족세력이 독사의 대가리를 쳐들고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방해하면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이요 임정 수립 100주년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다”는 망언을 내뱉었습니다. 자 한국당의 뿌리가 이승만의 자유당이고, 박정희의 공화당이고, 전두환의 민정당으로 친일친독재 반민족세력이니, 이들을 뿌리 뽑지 않고는 민족의 역사와 미래는 암담할
뿐입니다.
아버님!
6·25전쟁이 나자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이승만의 죄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독재정권 연장을 획책하려고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죄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죄입니다. 악질 친일경찰들을 앞세운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뒤집어씌우며
해체시킨 죄는 천년만년이 흐를지라도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공당의 원내대표가 반민특위로 인해 국민이
분열했다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은 것입니다.
아, 멀고도 험한 친일 청산의 길.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친일 세력이 임정의 정통성을 뒤흔들며 민족의 앞날을 망가뜨린 과거로
회귀하지 않도록 저희에게 힘을 주십시오. 늙고 병든 이 자식이 아버지처럼 역사의 산을 넘을 순 없지만 동암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역사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주위를 살피며 항상 낮은 곳에 있겠습니다. 청렴과 강직으로 소임을 다한 음지의 독립운동가 동암의 아들로서 겸손한
마음과 따뜻한 손길로 불우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동암의 역사가 100년 후에도 민족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병든 몸으로나마 역사 정의의
길을 걷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임정의 막내 차영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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