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 스님은 자비명상을 지도하는 대표적 스님이다.
마가 스님은 “우리 민족의 건국 설화인 단군신화에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곰이 100일 동안 쑥과 마늘만 먹고 인간이 된 것처럼 100일은 인간이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이라며 “하루 30분씩 투자해도 간단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를 바꾸는 100일>(휴 펴냄)을 출간한 마가 스님을 2일 만났다. 그는 ‘왜 나를 바꾸어야 하는지’, ‘진짜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자신의 진솔한 고백으로 답했다.
2남2녀의 막내…출가 뒤에도 응어리 치유명상가 마가 스님은 첫 번째 치유대상이었던 자신의 아픔부터 고백했다. 그는 2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작은마누라를 얻어 집을 나갔다. 유복자 아닌 유복자가 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찬 청년기를 보낸 그는 20대 초반 산속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한 스님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진 뒤 출가하게 됐다. 출가 후에도 가슴 속 응어리를 지울 수 없던 그는 선방을 다니거나 기도를 하며 몸부림치다 1주일간 터져 나온 통곡 속에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지 50년이 지나 80살이 넘어서 집을 찾아왔다. 늙고 병들어 작은마누라에게 쫓겨난 것이다. 그러나 속가 가족 누구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아버지를 자신의 절로 모셔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를 절에 모신 지 1년 뒤 어머니의 팔순을 맞아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절로 초청해 잔치를 했다. 그때 아버지를 가운데 모시고,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자식들이 50년간 쌓인 응어리들을 풀어내도록 했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나간 뒤 학교도 못 갈만큼 어려운 집안 형편 속에 살며 한 맺힌 자식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고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아파했다.
그때 어머니가 “그래도, 네 아버지는 때리지는 않았다.”고 아버지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고 한다. 마가 스님이 자비명상을 지도할 때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은 ‘그래도’”라고 하는 말은 당시 그의 어머니의 한마디에서 따온 것이다. 어머니의 ‘그래도’란 말 한마디에 아버지는 회한에 찬 눈물로 답했고, 자식들도 용서의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에게 큰절을 올려 50년간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가슴에 담고 있던 한을 녹여냈다. 아버지는 그날로 고향집에 돌아가 3년간 어머니와 살다가 3년 전 세상을 떴다. “만약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나 밖을 전전하다 돌아가셨다면, 얽히고설킨 한을 가족들 모두 풀지 못한 채 아직도 분노 속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용서는 아버지보다 오히려 남은 가족들을 분노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변화시켰다.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증오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괴롭히고, 용서는 그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편안케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그는 그 뒤 용서와 행복을 위한 ‘자비 명상’을 보급하는데 앞장섰다.그렇다고 그가 자비명상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하도록 권유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비명상과 함께 웃음명상, 걷기명상 등을 권유하는 때가 많지만 정작 자신이 많이 하는 것은 ‘백골 부정관’이라고 한다. ‘백골 부정관’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해골이 된 모습을 보면서 집착과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다. 좋은 명상 다 두고 하필이면 왜 그런 명상을 택해 하는 걸까. “젊은 시절에는 나를 바꾸기보다 세상을 바꾸고 불교를 바꾸겠다고 애쓴 적이 있었다. 1998년 조계종 정화개혁 당시엔 총무원 청사에서 반대편에 벽돌을 던지며 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지옥 문 앞을 서성이는 나를 보았다. 그때 내 마음의 상태가 지옥을 오가고 있음을 보았다. 겉으로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이었지만 내면엔 큰 절 주지라도 차지해보려는 탐욕이 가득한 자신을 본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백골 부정관을 하면서 “여느 해골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거면서 쓸데없이 애착하고 탐하는 자신의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내면서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먼지처럼 가볍게 지구를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출처 : 한겨레 신문/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