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핑크 의자에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앉아 있다. 아저씨 머리 위에는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 카펫’이라고 적혀 있다. 임산부 배려석에 거리낌 없이 앉는 사람도 있고 주춤거리다 앉는 사람도 있다. 임산부가 오면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일 게다. 아저씨는 어디서부터 앉았을까.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무심한 표정이다.
결혼 후 삼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이 삼대독자도 아니니 그냥 기다리려 했지만 초조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가족과 지인들은 갖가지 비법을 알려주었다. 한의원 추천이 단연 일위였다. 불임 치료 한의원은 왜 그리 많은지. 경상도 전라도까지 불원천리 달려갔다. 한약을 수시로 마셨지만 약효는 없었다.
친정엄마는 아들 없으면 첩을 두는 시대 사람이다. 엄마는 아들은 고사하고 딸 하나도 못 낳은 막내딸 신세가 기구하게 될 날이 머지않았구나 싶었는지 민간요법을 알아냈다. 흰 닭에 도라지, 흰 접시꽃 뿌리를 삶아 먹는 것이었다. 세 가지 흰색의 조합, 삼백요법이었다. 엄마는 접시꽃 뿌리를 찾아 온 동네를 다녔다. 그때까지 섬에서 팔자 좋기로 소문난 엄마가 체면 불고하고 접시꽃 찾아 삼만 리를 한 것이다. 나는 시장에 가서 흰 닭을 샀다. 닭장 속에 있는 닭을 그 자리에서 잡아주던 때였다. 도종환의 시 ‘접시꽃 당신’이 한창 유행이었다. 시인은 투병 중인 아내를 접시꽃에 비유한 시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는데 나는 아이를 갖으려고 접시꽃 뿌리를 푹푹 삶아 먹었다. 우리 섬 접시꽃은 내가 다 먹어버려서 씨를 말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한방도 민간요법도 실패였다. 양방으로 바꾸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시험관아기가 탄생한 직후였다. 개인병원도 서너 군데 있었는데 나는 불임치료로 이름이 난 충무로에 있는 병원으로 갔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왕복 세 시간 걸리는 길이었다. 남편과 함께 검사를 했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이상 없는 불임이 더 힘들다고 했다. 충무로역에 내려서 병원 가는 길에 새, 물고기, 애완견을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새도 물고기도 개도 다 새끼를 낳았다. 미물만도 못한 나,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는 세상 모든 여자가 아이를 낳은 여자와 못 낳은 여자로 나누어졌다. 나는 아침마다 기초체온을 재고 그래프를 그렸다.
병원에 가면 전국에서 모인 여인들이 있었다. 아들 딸 가리지 않고 그저 아이 하나만 점지해주길 바라는 여인들. 아이만 아니면 환할 여인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쓴 듯 침울한 표정이었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시술을 하려면 두어 달 병원을 다녀야했다. 지방에서 온 여인들은 병원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지냈다. 그때는 허용이 되었던지 대리모와 같이 온 여인들도 종종 있었다. 남아선호사상에 여아면 중절수술도 하던 시절이었으니 병원에서도 묵인해 주었으리라.
아이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시험관시술을하기로 했다. 한번 시술 가격이 남편 반 년 월급이었다. 그때 친정 형제들끼리 여행 가려고 모은 회비가 있었다. 한번 시술에 맞춤한 돈이었다. 엄마는 막냇동생 쫓겨나서 치다꺼리하느니 도와주는 게 낫다고 형제들을 협박했다. 형제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회비를 내놓았다. 모두의 염원을 모아 시술에 들어갔다. 날마다 주사를 맞아야했다. 주사약이 앞으로 어떤 후유증으로 나타날지 모른다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병원 다녀올 때마다 축 늘어진 몸으로 지하철을 탔다. 힘들다는 말은 사치였다. 다음은 없다. 어떻게든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빼곡한 사람들 속에서 몸을 추슬렀다. 병원까지 다니기 힘들어 남편이 주사 놓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덜덜 떨더니 차츰 익숙해졌다. 한 달간의 긴 여정이 끝났다. 마지막 임신 테스트기 확인만이 남았다. 두 줄, 임신을 기대했지만 빨간색 한 줄만 선명했다. 그대로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다시 시술할 마음의 여유도, 돈도 없었다. 포기 하고나니 기적처럼 아이가 생겼다. 그동안 먹었던 한약, 접시꽃 뿌리, 병원 다닌 날들, 이 모든 염원의 결실이었을까. 뱃속에서 아이가 하도 얌전하게 놀아 딸인 줄 알았는데 아들이었다. 첫아들을 낳던 날, 이 아이는 평생 할 효도의 반은 했구나 생각했다.
핑크 카펫 아저씨가 일어섰다. 오래전 나처럼 양보해 달라는 말도 못한 채 서 있는 임산부가 없나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튼실한 아주머니가 앉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