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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피(脫皮)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매년 스산한 겨울을 지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름대로 제각각의 감회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올해는 십이지(十二支) 갑자 중에 네 번째 토끼라 하여 신묘년(辛卯年) 검은 토끼띠라고 합니다.
실제로 토끼를 지칭하는 동물에는 토(兎)를 씁니다.
우리 민담이나 속담에도 자주 등장하는 토끼는, 판소리 『토끼전』에 나올 정도로 한민족과 친숙한 동물입니다. 서양에서도 토끼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는 오스트리아의 뒤러가 있으며, 극히 사실적인 그림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 세밀화는 오랜 관찰이 없으면 그리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오랜 관찰은 그만큼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고, 그 관심은 생명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에 비해 사람의 사랑은 변덕스러워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사랑은 종잡을 수가 없지요. 저는 우리 공동체의 현실을 볼 때, 주류에서 밀려난 소시민과 소외된 사람들은 민담이나 속담에 나오는 토끼에게서 위로받기보다는 툰드라의 어느 동토(凍土)에 유폐된 심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곤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그런 심중을 더 가중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그 동토에서 아득한 빙하(氷河)가 흘렀던 호수 건너 따뜻한 남쪽 바다를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그와 같이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우리 개인의 삶도 팍팍해진 데 더하여 우리 공동체의 삶도 팍팍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세대를 포함하여 바로 앞 시대의 선배 세대와 함께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경제자립과 지정학적인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자주국방을 이루어 낸 압축성장을 주도한 세대입니다. 민주화는 그 성장의 결과로 얻어 낸 정치적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세계가 놀라워하는 이러한 성취 뒤에는 합류하지 못하는 탈락자도 많이 발생하는 법입니다. 탈락자와 소외된 자의 심리에는 우리 사회에서 성취한 자들의 무관용과 갑질하는 정서적 폭력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정의롭지 못한 부(富)의 축적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 사용자와 노동자의 극한적인 대립 외에도 지역과 세대 간의 단층이 존재하며. 거기 더하여 현재는 남녀 간의 젠더 갈등까지 확대되는 분위기입니다.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권은 권력을 잡기 위하여 그들의 정책으로 치열하게 선의의 경쟁을 하는 집단입니다. 그 권력은 국민의 자유와 국리민복을 위한 수단이지 권력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위에 열거한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면서 국민의 지지기반을 토대로 획득되는 권력임이 분명합니다. 그러한데도 정치권은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는 민생에 힘을 쏟기보다는, 오히려 이 갈등을 이용하여 지지 세력을 견고한 진영 세력으로 만들고자 혈안이 되어있는 모양새입니다.
견고한 지지 세력만이 자기 진영이라는 것은 팬덤정치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 진영을 결국 증오의 대상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증오를 기반으로 한 적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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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관계입니다. 참으로 소모적인 정치활동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진영논리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는 한국 사회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우리 오랜 역사 속에 각인된 문화적 유전자라는 겁니다. 생물학적 유전자인 DNA와 달리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은 시대에 따라 교묘하게 모습을 달리하며 나타나곤 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부정적인 문화적 유전자 때문에 저는 이글의 제목을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라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말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익히 알다시피 볼프강 폰 괴테는 단순한 작가를 넘어 위대한 사상가이며 과학자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기도 했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 전반의 계몽시대가 낳은 최고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시대의 독일의 지성과 예술은 서구 문명의 정점에 있었으며 칸트, 괴테, 피히테, 베토벤. 헤겔, 훔볼트 등이 활약하던 시대였습니다. 훔볼트는 귀족이었으나 지적 욕망이 큰 탐험가로서 남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하며, 지리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자로서 유럽의 지성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쓴 『코스모스』는 박물학자로서 그의 체험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화론의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다윈조차도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 항해도 『종의 기원』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격찬을 했으며, 그때 당시 벌써 유명해진 명사였던 괴테도 “훔볼트와 하루를 보낸 것이, 나 혼자 몇 년 동안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지식에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훔볼트를 극찬하는 이유는 그가 탐험한 초인적인 활동을 그가 밟았던 경로를 따라 제작된 다큐인 남아메리카 횡단에 관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페루 연안을 흐르는 해류를 지금도 훔볼트 해류라고 부르며, 그 해류에 사는 대형오징어를 훔볼트오징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형 윌리엄 훔볼트가 세운 베를린의 훔볼트대학은 프로이센을 개혁으로 이끈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헤겔, 니체를 위시하여 역사학자 랑케, 본회퍼, 막스 플랑크, 하이젠베르크 등 많은 인재를 길러 낸 유럽의 대표적인 대학입니다.
제가 괴테의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라는 말을 인용했을 때는 우리 사회나 국력이 어느 정도쯤의 좌표에 위치하는가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하자는 것이지요.
매년 세계 각국의 국가 경쟁력 순위를 발표하는 평가기관 중에서도 가장 권위가 있는 스위스 경영개발원(IMD)의 경우 323개 항목을 잣대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국가 경쟁력은 19세기 프로이센의 전쟁역사가 클라우제비츠가 국가 경쟁력을 전면전(Total war) 개념으로 평가한 것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전면전은 한 나라가 전쟁에 동원 가능한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해 적국의 동원 가능한 자원을 궤멸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IMD의 경우 지난해 우리의 국가 경쟁력은 29위로 평가했습니다. 다른 평가기관인 세계경제포럼이 평가한 11위, 국내 산업정책연구원의 23위에 비해 낮은 평가입니다.
IMD 평가의 경우 우리나라의 장점으로 *근로자들의 노동력과 기능공들의 전문성 *인터넷 기반 시설이 탄탄한 점 *교육에 대한 열정과 인프라 등을 선진국과 같은 상위그룹으로 꼽았으나 *정부 효율성은 36위 *뇌물 공여, 부패 비리는 40위 *정부의 투명성 46위로 하위 그룹으로 내려갔으며 *회계 부정과 분식회계 분야는 63개국 중 최하위인 63위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나라는 선진국에 근접했으나 사회 신뢰 지수와 국가 위험도는 최고도로 높아진 것이 국가 경쟁력 평가에서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발목을 잡고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정도로 분석해 보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좌표에 위치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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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우리는 선진국이 아니라, 선진국으로 가는 도상에 멈추어 서 있는 사회입니다.
이러한 객관적 평가를 토대로 할 때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우리의 비판적 사유와 우리 공동체의 지향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판적 사유는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요즈음 ‘심심(甚深)한 사과’와 ‘고지식“을 싱거운 사과라던가 높은 지식으로 해석하는 문해력 부족이 회자 되고 있습니다.
문해력의 저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만,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산율은 0.8이며 OECD 국가 평균인 1.59에 한참 못 미치는 최하위입니다. 비혼주의자들이 늘어나고 노인 고독사와 젊은 사람들의 극단적 선택은 우리 공동체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통계는 우리 사회가 젊은 남녀가 결혼과 아이들을 양육하기 좋은 나라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어떻게 이룩한 나라인데 이제 우리는 미래세대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국가는 물적자본이나 인적 자본과 구분되는 제3의 자본인 사회적 자본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입니다. 사회적 자본은 호혜의 규범과 관용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 신뢰와 협력적 네트워크를 구성요소로 합니다.
옛날 성현(聖賢)들이 말하듯이,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물적 토대인 먹고사니즘의 식량과 주거 그리고 자주국방과 신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자가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한 것도 그런 연유일 것입니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을 썻던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공자가 말했던 사회적 자본인 신뢰를 소환하여 『TRUST』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사회적 자본이 경제적 번영을 창출한다고 하여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개념을 정의 하였습니다.,
”사회적 자본은 한 사회, 또는 그 특정 부분에 신뢰가 정착되었을 때 생긴다. 사회적 자본은 그것이 통상 종교나 전통, 역사적 관습 등 문화적 기제를 통해 창조되고 전수된다는 점에서 다른 형태의 인적 자본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 전통이 정착되지 않은 사회에서 새로운 밈을 심을 때는 창조적 소수자가 필요합니다.
이를 테면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자“라고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했을 때 그것은 기업의 생존뿐만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틀을 바꾸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경영자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경세가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승부수를 던질 때 이 세계는 답을 해줍니다.
우리 공동체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가임여성(可姙女性)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계속 떨어지고 있는 출산율과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노령화, 자살률에서도 OECD 평균치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소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물의 생태계는 자원이 풍부하면 개체 수가 늘어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의 종(種)이 그런 환경 조건이 갖추어지면 짝짓기가 늘어난다는 것이 생물학의 보편적 상식입니다.
생명 세계는 생존전략과 성적전략이라고 불리는 대체 불가능한 명제가 존재합니다.
일반 생태계와는 달리 인간에게는 자원확보를 위하여 생산과 소비가 따르며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이 발생하듯이, 남녀의 짝짓기도 결혼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을 만듭니다. 우리가 경제성장으로 물질적 부(富)가 높아짐에 따라 그렇게 활기차던 결혼 시장과 육아에 필요한 산업인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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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장과 산부인과와 소아 과가 이제는 기피 산업이 되고 있습니다.
자원이 풍부해지면 짝짓기와 개체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에게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든 겁니다. 사실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 자체가 현재만 생각하는 것이지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윈도 자연선택은 단순한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은 복잡한 걸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닌 겁니다. 인간은 쓸데없이 걱정을 많이 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삶도 중요합니다.
인간은 미래의 삶을 위해 꿈을 꾸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문명을 만드는 지적 존재가 된 겁니다. 그런데다 여성은 남성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자식의 미래까지도 생각합니다. 위인들의 존재 뒤에는 항상 어머니의 기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한국 여성은 여성으로서 불리한 대접을 받았던 경험이 어머니가 되면서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하여 자식에게 전력 투자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어느 나라 여성보다도 기질이 거세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때 여성은 어느 문명권에서도 남성에게 종속되어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세대는 젊었을 때 여성을 단순히 성(性)이 고려된 구체적 욕망의 대상으로 보았던 청소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순치하는 데에는 개인이나 집단은 교육과 문화의 힘에 의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 시간을 지난 후 거제서야 여성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순치되지 못한 남성들은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성추행이나 성범죄로 이어져 종종 사회로부터 격리되곤 합니다. 그것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평등한 인격체이다’
라는 개념이 자리 잡기 전에 우리의 교육과 법은 그 명제를 규범화한 이유로 남성들이 시차 적응하지 못한 무딘 감각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우리 사회의 성범죄와 ‘미투운동’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차 적응에 실패한 사회적 오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행정부에 여성가족부를 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고자 하는 면도 있지만, 세계 최저 출산율과 건강한 가정과 남녀의 성의식(性意識)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인 남녀의 성의식이나 성매매를 포함한 젠더 갈등과 출산율 제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때 유행어처럼 떠돌던 알파걸이나 골드미스 같은 유능한 여성이 비혼주의자가 되거나, 캥거루족같이 40이 넘도록 부모에 얹혀사는 탈락한 사람들이 증가한다면 결혼과 출산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공론화가 어렵지만 비혼주의자가 늘어나고 성매매가 금지된다면 짝짓기 시장에서 도태된 젊은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의 짝짓기 욕망은 오래된 본능입니다.
공쿠르상을 받은 한 프랑스 작가의 작품 『투쟁영역의 확장』에는 이런 문장도 나옵니다.
“어떤 이는 매일 수많은 섹스를 하고, 어떤 이는 평생 대여섯 번만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열댓 명의 여자와 섹스를 하고, 어떤 이는 한 여자와도 사랑을 하지 못한다. 이런 걸 일컬어 ‘시장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런 글을 읽어면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자연과 시장의 닮은 꼴이 떠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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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시장은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점과 정직하다는 면에서 닮은 꼴입니다. 그러나 정직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적인 언사로 말하면 냉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 약자에게 국가 차원의 복지가 불가결이듯이, 성(性)의 자유시장에서 밀려난 남성에게도 국가 차원의 배려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제동장치가 없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그렇듯, 성적 자유주의도 같은 이유로 절대적 빈곤층을 초래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국회의 특위인 여성가족위원회나 행정부의 여성가족부가 문제의 핵심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바는 없으나, 본질을 제대로 짚어가고 있는지 의심이 갑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의 양성평등이나 출산율 문제에서 변죽만 울리고 본질과는 동떨어진 젠더 갈등만 부각시키는 걸 죽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라는 말은 우리 여의도 선량들을 겨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의도 선량들이 말하는 언사(言辭)를 보면 소수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정제(精製)되지 않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면 장삼이사(張三李四)보다 못한 저자거리의 장돌뱅이에 다름아닙니다.
‘탈피’라는 개념을 자기 작품 속의 철학적 주제로 삼은 작가가 헤르만 헤세입니다.
『데미안』이라는 작품은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의 성장 소설로, 그의 친구 데미안을 통하여 이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에 데미안의 편지 속에 의미하는 것이 탈피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神)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神)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라고 한다”
아프락사스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며, 그 신(神)은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는 신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이해하게 되는 이 세계는 선과 악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공간이 아니며, 인간 세계는 씨줄과 날줄로 복잡하게 직조(織造)된 세계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선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하는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말이 정의(正義)라는 말입니다.
주로 종교인과 선동적인 정치가들이 그 말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가 철이 들면서 정의가 불편한 진실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무수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을 역사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근·현대사에서 일어난 이념 전쟁이, 영문도 모르는 채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정의를 외쳐 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현재도 정의를 누구보다도 크게 외쳐 오던 운동권의 민주투사들에게서 그것을 선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락사스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뜻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헬라어에는 지혜의 말이 많이 있습니다.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 합쳐져서 철학(philosopy)이 되었으며 그것을 학문으로 만든 사람들이 헬라인, 즉 그리스인들입니다. 바이블의 신약의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헬라인들은 지혜에 못지않게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신탁(神託)에 질문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신탁에 의지한 것은 지혜의 부족함 때문인가, 아니면 지혜로 알 수 없는 운명에 겸손하기 때문인가? 그리스의 유적들에는 그들의 신탁과 어떤 지혜를 추구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어 속에는 그들의 깊은 정신세계를 말해주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 개념이 확대되어 많은 학문과 예술을 낳았습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hatos), 미토스(Mythos)등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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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런 단어들을 나열하면 지금의 MZ세대들은 꼰대같은 소리라고 할지 모릅니다.
아마 그들은 “실력은 디테일에 있다.”라고 실용적인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 말이 맞기도 합니다. 왜냐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사실 이번 할로윈 참사도 디테일에 있었으니까요. 거기에는 실용적인 것과 악마가 공존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지식 정보화시대이며 과잉 연결 시대입니다.
엄청난 지식과 데이터가 우리의 PC와 스마트폰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지식이 지성과 비례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면 지식과 지성에는 단층이 존재하니까요. 우리 사회의 품격은 그 많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은 고양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지식을 조합할 수 있는 지혜가 없으니까요.
과잉 연결 시대인데도 우리의 관계는 엉성하며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독사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성과 미모를 갖춘 골드미스는 비혼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탈락한 남자들은 캥거루족이 되어 성적 욕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남녀의 조합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출생률은 낮아져 우리 공동체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외로움을 견딜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외로움은 고독과 다릅니다.
고독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지만 외로움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생존은 사소한 이점만 있어도 그것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이점이 있었기에 사람은 집단화되고 사회화 되었습니다. 다윈은 그것을 자연선택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협력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택했던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강력한 감정인 외로움에 휩싸입니다.
진화는 쓸데없는 것을 버리는 것인데 우리는 왜 외로움을 버리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까?
쓸데없는 것을 버리는 것을 자연도태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연선택의 다른 이름입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판단해보면 지금 무리에서 떨어져 있으면 매우 위험하니 빨리 너의 집단으로 돌아가라는 하나의 신호이며 명령입니다,
행복의 결정적 요인은 부(富)도 명예도 학벌도 아닌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라고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외로움을 더 심화시키고 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 각종 연구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30% 가까운 사람들이 항상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TV앞에 앉아서 화면을 보고 있는 일인가족이 늘어 갑니다. 개개인은 외로운데 TV방송이나 유튜브의 광고를 보면 세상을 화려하고 즐거움으로 가득합니다. 상대적 박탈감은 점점 외로움으로 몰고 갑니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일인가족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정의에서 우국지심(憂國之心)을 느껴 특정한 정치집단에 가입한다면 그들은 팬덤 집단이 될 확률이 큽니다. 그럴 때 외로움은 정치문제로 전환됩니다.
특히 현실에 좌절한 20, 30대의 젊은이들이 증오를 가지고 자기와 코드가 맞는 정치집단을 만난다면 무시할 수 없는 부정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지지해주는 젊은 유권자를 마다할 정치인은 없을 것입니다. 자질에 따라서 오히려 자기 진영의 행동대원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전한 공론의 장은 멀어지고 극단적인 증오의 정치가 시작됩니다. 점점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고 천박해집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3%의 염분 때문입니다. 이 현상을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에 적용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언제 100%의 청정을 바라기나 했습니까. 대중은 이슈자체보다는 이슈를 다루는 태도를 보고 지지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를 관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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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오랜 경험칙입니다. 소멸해가는 우리 사회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2023년 1월 18일 사이버 총무 김 정 율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