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깃국 / 양문규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잔바람에도 뚝뚝 살을 내려놓는 늙은 감나무
열락과 고통이 눈 속으로 젖어드는 늦은 저녁
아버지와 시래깃국에 밥 말아 먹는다
세상 어떤 국이
얼룩진 자국 한 점 남김없이 지워낼 수 있을까
푸른 빛깔과 향기로 맑게 피어날 수 있을까
또 다른 어떤 국이
자잘한 행복으로 밥상에 오를 수 있을까
저렇게 부자간의 사랑 오롯이 지켜낼 수 있을까
어느 때라도 “시래깃국” 하고 부르면
일흔이 한참 넘은 아버지와
쉰을 갓 넘긴 아들이 아무런 통증 없이
공기 속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마주앉아 있으리라
세상은 시리고도 따뜻한 것이라고
내 가족 이웃들과 함께
함박눈을 밟고 겨울 들판을 휑하니 다녀와서
시래깃국 한 사발에 또다시 봄을 기다리는
수척한 아버지 얼굴에 박혀 있는 검은 별을 본다
-계간 『시와 시』 2010년 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0년 올해의 좋은 시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 양문규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오늘 밤에도 또 헐벗은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면서 겨울나무 밑둥엔 살기가 감돌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부질없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준다.
나는 이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면서
내 하는 작업이 더없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가혹하게 겨울나무 밑둥에 물 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또 사람들은 말하리라.
밤마다 겨울나무 밑둥에 물을 주는 나와
그 작업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나에 대하여,
무언가 소리 없는 비정한 분노의 싹이 곧 움틀 것이라고
그늘 속에는
- 양문규
하늘 받든 은행나무는 안녕하신지?
햇살 푸지도록 환한 날
다시 천태산 영국동(寧國洞)으로 든다
은행나무는 낮고 낮은
골짜기를 타고 천 년 동안 법음 중이다
해고노동자, 날품팔이, 농사꾼
시간강사, 시인, 환경미화원
노래방도우미, 백수, 백수들……
도심 변두리에 켜켜이 쌓여 있는
어둠이란 어둠,
울음과 울음의 바닷속을 떠돌던
사람이란 사람 모다 모였다
가진 것 없어 정정하고
비울 것 없어 고요한
저 은행나무 그늘이 되고 싶은 게지
하늘을 닮아가는 아버지도
밭둑가 구름이 드리운 그늘에
잠시, 고단한 몸 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그늘 속에서 쉬는,
키가 큰 만큼 생이 깊은
천태산 은행나무 아직도 법음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