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기억
강 순
모든 기억의 서막은 서서히 열린다
사춘기 아이는 방문을 잠근 후 서서히 말을 잃어가고, 식탁 위 꽃들은 노교수의 강의처럼 서서히 시들어 잊혀져간다
배고픈 달이 지구에 가까워져 서서히 속눈썹을 떠는 밤, 병든 아버지는 뱀의 허물 같은 늙은 관념을 껴입고 서서히 신음을 멈춘다
구름은 구름끼리 모여서 서서히 길을 잃고, 강물은 구름의 그림자가 무거워 서서히 몸을 뒤척인다
일 잘하던 직원은 지각하며 서서히 세태를 배우고, 과로한 버스기사는 쓰러져 세상과 서서히 멀어져간다
우울증의 남자가 투신하던 빗속에서, 팝콘처럼 입술이 부풀어 오른 조팝나무, 남자의 피를 빨아먹고 땅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숙인다
서서히 살아나는 기억은 서서히 지운 기억들 위로 포개어진다 그러므로 당신은 왼쪽에서 서서히 살아났다가 오른쪽으로 서서히 지워진다
바람난 남자는 바람난 여자의 머리카락을 서서히 애무하고, 바람나지 않은 여자는 바람나지 않은 남자의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이 서서히 권태로워진다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는 기억 한가운데 서서히 멈춰서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나는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 목마른 꿈속을 서서히 빠져나온다
모든 기억은 왼쪽으로 서서히 스며들어서 나는 왼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나의 오른쪽 목이 조금 더 늘어나 있다
⸺계간《미네르바》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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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 / 1969년 제주 출생.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