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1-27
그때에 21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소중한 인연을 아름답게 맺어주시는 주님
우리 어머니는 여든아홉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쪽머리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머리부터 잘 만지시고 촛불을 켜고, 성무일도로 아침기도를 바치시고 묵주기도를 하시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십니다. 평생을 한복으로 차려입고, 반듯하게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아 모양을 내고 다니십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성당에 가시면 젊은 사람들이 신기하듯이 쳐다보기도 하고, 어떻게 저렇게 곱게 사실 수 있느냐고 한마디씩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쪽머리 때문에 어머니 머리는 많이 빠지셨습니다. 그전에는 머리타래가 그래도 두툼했는데 여든 중반부터는 숱이 많이 빠져서 아주 허전하게 보였습니다. 몇 가닥 없는 머리에다가 흰 머리칼을 보면 괜히 속이 상했습니다. 젊어서 우리들은 어머니 머리를 자르고 파머를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쪽 지으신 머리가 좋았습니다. 지금은 더 그립습니다.
그런데 쪽을 지으시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먼저 머리를 세 갈래나 네 갈래로 잘 빗어서 손을 뒤로 돌려 잘 엮어서 머리칼이 풀어지지 않도록 아주 끝까지 촘촘히 엮은 다음 끝 머리칼로 돌려 묶으며 타래를 짓고 비녀를 잘 꽂아 풀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깨가 아프시면 손이 돌아가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셨지만 머리를 빗고, 땋고, 쪽을 지으시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머리칼을 잘 빗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머리칼을 꼼꼼하게 땋는 것은 한 올이라도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지극한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머리가 곱게 빗겨지도록 빗으로 달래듯 어루만지듯 하는 정성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복을 입을 때도 치마나 바지나 저고리나 모든 것은 옷고름으로 잘 매야만 맵시가 나고, 옷의 태가 우러나온다고 합니다. 보기만 한다면 아주 쉬운 것 같고, 나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어머니가 옷을 입으실 때는 아주 쉽게 입고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옷고름을 매거나 치마끈을 매는 것이 정말 신기(神技)에 가깝습니다. 우리 민족의 몸단장과 옷치장에서 다른 민족이 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옷고름을 매거나 대님을 치거나 쪽을 짓거나 상투를 틀거나 모두 중심을 향하여 모두 모여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우가 매듭으로 만나는 것이고, 여러 갈래의 머리를 잘 엮어 맺음을 확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존우사상’(尊右思想)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옷은 모두 좌우의 끈을 서로 맺음으로써 그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혼인식에서도 청실홍실을 엮는 것에서부터, 머리를 자르고 산발하지 않고 곱게 땋은 타래머리를 하는 것이며, 단추를 달지 않고, 옷고름을 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기준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염습할 때도 모두 꼭꼭 동여맵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세상에서 맺은 인연을 저승에 가서도, 천국에 가서도 이으려는 아름다운 심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용서와 죄의 사함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화해의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맺어져 하나가 됨을 더 원하시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과 맺어진 소중한 일치를 교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한 올의 머리카락이라도 흩어져 따로 떨어져 혼자 풀풀거리지 않도록 빗으로 곱게 빗어 당신의 십자가로 비녀처럼 묶어주시고, 당신의 가시관으로 세상의 모든 아픔을 묶어주시고, 당신께서 허리에 띠를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옷고름처럼 맺어진 모든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 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2,1-2
1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축일9월 3일 성 그레고리오 1세(대) (Gregory I the Great)
신분 : 교황, 교회학자
활동 연도 : 540?-604년
같은 이름 :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또는 그레고리오)는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이미 두 명의 교황, 즉 성 펠릭스 3세(Felix III, 526-530년, 9월 22일)와 성 아가피투스 1세(Agapitus I, 535-536년, 9월 20일)를 배출한 로마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로마에서 법학 등 고등 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다. 574년경 아버지 고르디아누스(Gordianus)가 세상을 떠나자 성 그레고리우스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투스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 수도원에 입회하여 오래전부터 꿈꿔 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시칠리아(Sicilia)에 있는 가족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다. 578년 교황 베네딕투스 1세(Benedictus I)에게 부제품을 받고, 579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되었다. 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 생활을 계속하며 교황 펠라기우스 2세를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590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하자 그는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신심 깊은 인물로 출중한 행정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했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s)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고,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그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될 만큼 활동적인 교황이었다. 593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직접 랑고바르드족과 담판을 지어 로마의 평화를 지켰다. 이로써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이렇듯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실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중세 주교와 사제가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목 지침서”(Liber Regulae Pastoralis), “욥의 윤리”(Moralia in Job)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 전례 · 역사 · 사회학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Registrum Epistolarum), “그레고리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regorianum) 등을 집필하였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우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서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전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게르만족의 개종뿐만 아니라 영국의 앵글로 색슥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597년 성 안드레아 수도원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와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 켄트 왕국에 파견해 601년에는 영국에 요크(York) 대교구와 캔터베리(Canterbury) 대교구와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하였다. 그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의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이자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에 그의 다양한 활동과 영성적 위대함으로 인해 ‘대교황’이란 명칭으로 불린다. 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다.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12일에 지내오다가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라틴 교회에서는 그가 교황으로 착좌한 9월 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다. 동방교회와 영국 성공회, 루터교 등에서는 여전히 3월 12일에 지내고 있다. 그는 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대 그레고리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