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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은 적당하다 싶은 자리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빼앗길세라 냉큼 앉았다. 야외에서 식사하게끔 되어 있는 레스토랑인지라, 화사한 색색의 꽃들이 심어진 갈색 빛 돌담 너머로 사람들에게 눈에 띄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솔직히 디자엘 재상처럼 멋진 남자와 식사를 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지는 것이 여자의 본심이기도 하였다.
카린은 재상과의 산책이 부담스러워 하던 전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맞은 편 재상의 얼굴을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확실히 외모만큼이나 출중한 능력으로 인기가 많은 재상이기에 이베이드나 제국에서도 쉴 새 없이... 거기에 아주 대놓고 러브콜이 오는 것이 자주 보였었다. 재상직에 오른 지 겨우 삼 년 만에 전 대륙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의 재능을 갖춘 팔방미인이니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제안을 재상은 한결같이 정중히 거절하였다.
강대국으로 넘어간다면, 드레마 같은 소국의 재상 따위를 하는 것보다 더욱 좋은 대우는 물론, 상당한 지위와 권력을 얻을 수 있음에도 왜 자신의 곁에 남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그녀의 머릿속을 문득 지나갔다.
"왜 재상은 나만 따라다니는 거야?"
카린은 머릿속에 들어온 궁금증을 아무 생각 없이 입 밖으로 꺼냈다. 그 말에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재상이 자신을 돌아보자, 이곳의 테이블이 생각보다 좁다는 것을 뒤늦게야 실감했다.
팔을 완전히 펴지 않아도 닿을 법한 지근거리에서 재상이 그 주홍빛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카린은 어색함에 얼굴이 빨개졌다. 어쩔 줄 몰랐기에 그녀는 레스토랑 건물 쪽으로 시선을 획 돌리고는 딴청을 피웠다.
하얀 지붕에 갈색 빛의 벽돌로 잡티 없이 깔끔하게 세워진 그 건물은 가게라기보다는, 동화책에 나오는 '과자로 만들어진 집' 같았다. 더군다나 가게 앞, 그녀의 주위 테이블에는 각양각색의 젊은 남녀들이 앉아, 잡담을 하며 식사를 하는 것이 연인들에게 특히나 인기가 많아 보였다... 라는 것은...
'나, 아무래도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곳에 발을 들인 것 같은데...'
카린은 입을 벌린 남성에게 애정을 담아 푸딩을 떠먹여 주는 여성의 모습이 보이자 보는 자신이 오히려 민망할 지경인지라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쪽으로는 길쭉한 과자를 양쪽에서 베어 물고서 점차 가까워져 가는 연인의 얼굴이 보이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잘 익은 사과처럼 귀까지 빨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이었다.
혼자서 우왕좌왕하다가 갑자기 얌전해지는 그녀의 어린애 같은 모습에 재상은 사랑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잠깐 지어 보이고는 카린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야, 전하를 놀리는 쪽이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재상!"
카린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이에 주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전의 일만 되풀이될 것 같기에 그녀는 그저, 입을 오리 주둥이처럼 삐죽 내밀고서는 눈빛으로 재상에게 항의했지만, 막상 재상이 진짜 대답을 회피했다는 것만큼은 깨닫지 못하였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로 메뉴판을 밀어 넣으면서 주문을 받으러 오는 여종업원의 말에 카린은 우선 메뉴를 보고자 그것을 받아 펼쳐보았다.
"에... 그러니까..."
카린은 메뉴판에 그려진, 귀엽게 의인화된 송아지가 소고기를 포크로 찍어 든 채로 맛있게 뜯어먹는 정신 나간 그림에 '패륜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표지를 넘겨 쭉 나열된 외국식 요리이름들을 보자니, 이름만으론 뭐가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런 비싼 가게서 사먹어 본 적이 있어야지...'
노점에서 파는 고기 꼬치구이나 사먹던 자신이 이런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을 넘겨본 일이 있었을까? 열다섯이 되기 이전이라도 부모가 있는 누구나라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비싼 가게서 비싼 음식을 먹어 본이야 있겠지만... 그녀는 그 '누구나'에 포함되질 못했다.
그렇다고, '이거 무슨 요리야?' 라고 묻기도 창피했다. 그럴듯한 남자랑 와서 이런 비싼 곳에 와본 적 없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자니 사람 보는 눈이 너무나 신경쓰였기에 그녀의 눈은 자연스레 주변의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주문하는 걸 따라 주문할까?'
그쪽이 무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카린은 고개를 돌려 아까 푸딩을 떠먹여 주던 커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만 해도 여성이 떠주던 푸딩을 잘도 넙죽넙죽 받아먹던 남자가 어째서인지 얼굴이 초록색이 돼서는 입에 초록빛의 게거품을 물고 있었다. 독이라도 먹은 것처럼 죽어가는 남자와 그런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강제로 계속해서 떠먹이는 여자의 모습에 카린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아까 과자를 양쪽에서 베어 물어가던 연인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쪽도 역시나, 양쪽에서 긴 과자를 잘도 베어 물어가던 연인이 어째서인지 입가에서 피를 주룩주룩 흘리며 그 자세로 굳어져 있었다. 양측에서 흘러나온 피가 과자를 타고 흘러내려 와 섞이면서 고여온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카린은 이 레스토랑이 무슨 요리를 취급하는지 의심이 들었다.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다시 메뉴판의 메뉴 쪽을 죽을 각오로(?) 주시하던 카린은 정상일 것 같은 요리가 보이지 않자, 시선을 들어 재상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재상은 이미 메뉴를 골랐는지, 양손을 깍지끼고는 거기에 턱에 괸 채로 자신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재상은 뭐로 골랐어?"
재상이 고른 메뉴라면 자신이 따라 골라도 괜찮을 것 같다 싶어 물은 것이지만, 재상의 미소는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이것입니다."
재상은 붕대 감긴 손가락을 들어 카린의 손에 있는 메뉴판의 한 부분을 짚었다. 어디보자... 재상이 고른 메뉴는...
'채식... 요리?'
채식인 전용이라면서 스테이크 요리라는 것은 둘째치고... 카린은 재상의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선 미각' 을 잘 알고 있기에 그녀의 생존본능이 그녀의 귀에 대고 자신이 따라 고를 메뉴가 '절대, 절대, 절대로!' 아니라고 외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메뉴판을 쥐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네모난 메뉴판이 풀썩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하는 것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막다른 절벽에 몰리어 하염없이 바닥에 추락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크게 뜨여진 그녀의 두 눈에는 처음에는 경악, 후에는 불안감이 지나가고는 마지막으로 눈물이 가득히 메워왔다. 그녀는 그 눈으로 재상을 올려다보았다. 순수하게 도움을 바라는 한 어린 소녀의 얼굴. 그녀는 연약한 두 손이나마 믿음직한 재상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애걸한 목소리도 도움을 구걸했다.
"재상... 제발 나 좀 도와줘..."
무언가 쓸데없는 감정이입 같았지만, 당사자인 카린에게는 그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선택이 될 것이기에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연상이자, 믿음직한 남자인 재상에게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예, 그러면 제가 임의로 주문하겠습니다."
재상은 그녀의 애걸로 가득한 모습에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수긍해 보였다. 그리고는 이런 손님은 자주 겪었다는 양, 귀찮기만 한 심정을 영업용 미소로 감추는 종업원을 올려다보고는 메뉴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것으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저쪽 분에게는..."
재상은 주문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돌려 카린 쪽을 보고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인다 싶다니, 계속해서 말하였다.
"어린이 세트로 부탁합니다."
.
.
.
"라르님, 라르님..."
"..."
말끝이 기어들어가는 어린 소녀 아이의 목소리에 라미엘은 고개를 돌려 그 아이를 말없이 응시했다. 자신의 흰 옷자락을 붙잡고 연신 당기며 졸라오는 귀여운 소녀 아이임에도, 그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 눈빛만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그런 그를 처음 보는 아이라면은 그 냉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함에 겁먹고 움츠리거나 울음을 터트리는 게 정상적인 반응이건만, 그를 부르는 [인연]은 그런 그가 익숙할 데로 익숙한 건지... 아니면 그의 아주 미세한 표정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밝기만 하였다.
그를 부른 [인연] 은 그의 옷자락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연신 잡아당기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세워 조금 떨어진 곳의 한 과자점을 가리키는 것이 꼭, 아빠에게 과자를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를 연상케 했다.
라미엘은 [인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여 그 과자가게를 보았다. 작은 가게이지만 달짝지근한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어 그의 코에까지 닿아왔다. [인연] 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벌써 유혹에 넘어갔는지, 아예 두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새끼원숭이처럼 잡아 매달려서는 갈색 빛 눈망울을 글썽글썽거렸다.
"마음대로 해라. [인연]"
"네에~"기사라던가...
라미엘은
라미엘은
평소에는 말끝이 기어들어가던 [인연]은 얼마나 기뻤는지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그 가게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라미엘은 그런 [인연]의 활기찬 뒷모습을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잠시 바라보고는, 그 가게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서 달리던 [인연]이 중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보이자 그의 발걸음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도 미묘하게 빨라졌지만, 곧 [인연]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일어서서 노란 원피스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내고, 갈색 머리의 노란 헤어밴드를 고쳐 쓰고는 다시 가게로 달리기 시작하자 원래의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라미엘은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춰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을 넘어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을 잠깐 주시하고는 다시 시선을 내려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번잡한 길 한가운데서 멀뚱멀뚱 서 있는 그이지만 막상, 그의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를 그저 나무나 큰 바위 같은 '장애물' 정도로 여기는 양, 눈살을 찌푸리거나 그를 바라보거나 하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비켜 지나갈 뿐이었다.
존재감이 없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무릎 뒤까지 닿는 푸른 긴 머리를 보는 이가 있다면 호수처럼 찰랑거리는 그 아름다움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눈처럼 흰 로브에 흰 허리끈을 매고, 흰 바지를 입은 흰색 일색의 그의 괴상한 옷차림은 물론, 어지간한 미남들은 고개도 못들만큼 여성스러운 이목구비를 갖춘 몽환적인 이미지의 미청년임에도... 그런 그를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는 주변인들의 반응은 이상하다 못해, 그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아주 가끔,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이렇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띄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드레마의 어린 여왕이라던가... 성검의 기사라던가...
라미엘은 다시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어 가게에 다다르자마자, [인연]이 자기 키보다 큰 지팡이처럼 생긴 과자를 들고와서는 그에게 보여왔다.
"라르님! 라르님! 이거 꼭 [상상]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 같아."
길고 꼿꼿한 일직선의 작대에 그 끝은 둥그렇게 구부러진 손잡이를 한 지팡이 모양의 과자를 [인연]은 두 손으로 가운데를 잡고서는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러던 중, 힘을 견디지 못하고 과자가 '툭' 하고 부러지자 [인연]은 처참하게 두 동강이 나버린 과자를 처참할 정도로 울상을 지은 얼굴로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새것으로 다시 골라라..."
"네에~"
라미엘이 그 부러진 과자를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며 말하자, 언제 울상이었느냐는 듯이 [인연]은 밝아진 얼굴로 가게에 다시 뛰어들어갔다.
어린 천사. [인연]이라는 '천사'. 그렇지만 [인연]은 이름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부르기에 그렇게 부를 뿐. 누가 그렇게 부르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람들' 이라고...
'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라미엘' 자신 역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연]이나 라미엘이나 결국은 '꿈'. '허상'. '허구'. '환영' 같은 것... 현실에 존재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럼 자신은 누구인가? '라미엘 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물어온 사람이 진정 솔직히 대답해 주기를 원한다면 자신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관심 없다.'
관심 없다. 길에서 우연히 지나친 이를 보고 누구인지 알려 애쓰려 할까? 아주 가끔씩 그러는 경우도 있겠지만, 백중 구십구는 그저 스쳐 지나갈 뿐, 몇 걸음 내딛는 사이 지나친 이의 얼굴마저 곧 잊어버릴 것이다. 타인이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자신도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우연히 지나친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그 사람이 정말로 '특별한' 사람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시간을 거슬러온 사람이라던가, 혹은 사람의 탈을 쓴 요물이라던가... 아니면 '천사'나 '요정' 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지나친 이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조차 모르니까.
허나, 그러한 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넘어온 사람도, 사람으로 둔갑하는 요괴도... 그리고 사람들이 상상하는 수많은 존재는 결국 '상상'. 존재할 리가 없다.
당연한 게 아닌가? '천사’나 '신'이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리도 없다. 자신들은 결국 꿈속에나 등장하는 '거짓말'이니까... 그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렇게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누구냐?', '네가 [인연]이라고 부르는... 저기 보이는 소녀는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그리고 물어온 이가 자신이 정말로 믿는 사람이라면은 자신은 대답해 줄 것이다.
'나는 그저 라미엘 일 뿐이고, 저 아이는 그저 [인연] 이다.' 라고...'
'유니콘'이라는 것을 들어봤는가? 어떠한 용맹한 전사도, 어떠한 흉포한 괴수나 짐승도 제압할 수 없다는 영험한 힘을 갖춘 환상 속의 생물. 말의 형태를 하였지만, 이마에는 흰빛을 띤 뿔을 가지고 있고, 그 뿔을 근원으로 그러한 무적의 힘을 가진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는 짐승. 그 뿔을 탐내는 수많은 자들을 세상 구석구석까지 헤매게 하였지만, 유니콘이라는 것은 '꿈’. 그저 환상, 허구, 거짓말 일 뿐이다.
사람들의 상상으로, 사람들의 꿈으로 만들어진 거짓 존재인 유니콘이 현실에 당연히 존재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 유니콘이 현실에 실존한다면... 그건 '꿈’이 아닌 '현실'의 유니콘 일 뿐이다. 그 '유니콘'의 존재를 실제로 본다면 사람들은 분명 놀라워할 것이다. 허나, 그것뿐일 뿐...
『'꿈'은 결코 '현실'이 아니다.』
'현실' 속의 '꿈’은 결코 '꿈’이라 부를 수 없는... 그저 '현실’일 뿐이다. 사람들에게 유니콘을 대령하든, 잡아오든 아니면 그것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든... 그것은 그저 피와 살로 이루어진 '현실’의 생물일 뿐이다.
한낱 짐승 따위가 흉포한 맹수나 숙달된 조련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영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유니콘의 뿔' 역시, 그저 돌출된 머리뼈의 일부일 뿐... 마술이나 요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는 '현실' 속에서 그것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라미엘이나, [인연] 이라는 '신', '천사’... 역시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저 '현실'의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과 똑같이 심장이 뛰고, 붉은 피가 흐르고... 음식을 먹고, 숨을 쉬고, 칼을 맞으면 죽고, 심장이 멈춰도 죽는 사람일 뿐이다. '천사의 날개' 같은 것이 당연히 있을 턱이 없다. 하늘을 날 수 있을 리도 없고, 기적 같은 것을 일으킬 수 있을 리도 없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신’ 이나 '천사'... 그러한 것들은 '현실’ 에는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꿈'에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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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로 나와주기를...'
식사시간만큼은 적어도 즐거워야하거늘... 주위의 사람들이 피를 토하거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그대로 뿜어버리거나, 심지어 들것에 실려가기까지 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카린은 왠지 모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는... 자신을 보고 있을지 모를 신에게 간절히 기원했다.
"어린이 세트는 그래도 정상적인 요리일 겁니다."
"확실해?"
맞은 편 자리에서 그녀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이며 말해오는 재상의 말에 카린은 여전히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확인차 물었다. 평소라면은 '어린이 세트'를 주문한 재상에게 항의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자존심이고 뭐고, 먹고 죽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족할 뿐이었다.
"아마도... 일 겁니다."
장난인지 아니면 그 역시도 장담할 수 없는지 애매한 재상의 말투에 카린은 다시 불안함이 가슴 속을 메워왔다. 카린은 '차라리 먹지 말고 그냥 나가자고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재상이 앞질러 말을 걸어오는 통에 그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든든히 드셔야 합니다. 국경을 넘을 때까지는 당분간, 제대로 된 식사는 어려우실 테니깐요."
"아... 응."
카린은 하려던 말이 막히자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는 막 떠오른 궁금증을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거야? 적어도 공작의 몸 상태가 좀 나아지면 그때 출발해도 되잖아?"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재상은 손가락 두 개를 세워 보이며 대답했다. 의아스러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과장답게 갸우뚱거리는 카린의 반응에 재상은 빙긋 미소를 짓고는 설명을 계속했다.
"첫째는 저희의 일정입니다."
"일정...? 아, 맞다!"
카린은 테이블을 두 손으로 탁 치며 재상의 말에 공감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은 이미 국경을 넘어 드레마의 영토에 들어섰어야 정상이었다. 허나, 전의 기습으로 어쩔 수 없이 북쪽의 국경이 아닌 동쪽에 있는 이곳, 살도르 도시로 도망치는 쪽을 택했고,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만큼 시간이 허비되고 말았다.
"할아버지... 걱정하시겠지..."
"예,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재상은 걱정스러워하는 카린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지만, 사실 걱정 정도가 아닐 것이다. 카린이 일개 범인(凡人)도 아니고 한 나라의 여왕인 이상, 여왕의 귀국이 늦는다면... 늦는 것에 더해 아무런 소식조차 없다면...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는다.
너무 늦는다면 최악의 경우... 나라의 긴장은 고조되고, 불안한 국정 속에서 여왕이 발을 들여놓았던 이베이드와 외교적인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돌아오지 않는 여왕에 대한 무의미한 추궁 끝에는 전쟁만이 있을 뿐이리라...
그렇게 말하는 재상이지만, 그의 진심은 솔직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린 여왕의 얼굴, 오른쪽 뺨에 남은 보기 흉한 화상자국... 지금은 붕대로 가려져 있지만,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지키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괴로웠고, 드레마에 돌아가서도 모두에게 그런 그녀를 보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라미엘은 자신에게 '훌륭하게 지켜냈다.' 라고 말하면서, 그 증거가 있다고까지 했지만, 솔직히 그 증거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관을 나오기 전에 한 번 더 말했었다. '증거는 항상 곁에 있다.' 라고... 물론, 그가 말하는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이 이 어린 여왕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증거 같은것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아니, 반증하는 것이라면 널리고 널렸다. 그녀의 화상은 물론, 그녀의 드러난 피부 이곳저곳에 남아 붉은 피딱지가 진 생채기들... 흉하게 부러져 짧게 다듬을 수밖에 없었던 손톱과 피로로메마른 얼굴...
솔직히 억지 미소로 감추고 있지만, 본심을 말하자면 자신에게 자격 같은 게 있을 리 없는 재상직은 사임하고, 이곳 살도르에 남아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살고 싶었다. 어린 소녀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나라를 이끌 능력 같은 게있을 리만무하다면... 그저 이곳의 작은 학교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그대로 늙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면 또 하나는?"
"예...? "
깜빡 잊어다는 듯이 멍청하게 되묻는 그의 말에 카린은 간만에 재상의 머리 위에 올랐다는 것에 신이 났다. 그렇지만 표정 관리, 표정 관리... 그녀는 말투만큼은 짜증난다는 어조로 물었다.
"뭐가 '예?' 야? 두 가지라면서?"
그녀의 질문에 재상은 아차 했다. 자신의 속마음을 이리도 쉽게 들어내다니... 두 번째 이유도 물론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서둘러 움직이지 않으면 간신히 붙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도망이란 도피처로 목적지를 바꾸려 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한 불편한 마음을 미소로 위장하며 재상은 어떻게든 말을 돌리려는 찰나, 그 두 사람의 사이를 주문된 음식이 가로막았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종업원의 말투가 왠지 모르게 '빨리 처먹고 나가떨어져.' 라는 뉘앙스로 들리는 것은 귀의 착각일까? 카린은 왠지 모르게 질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지기에 고개를 들어 여종업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지만, 종업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실거리는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자, 카린은 물증 없는 심증만을 품으며 다시 음식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뒤통수로 찌를 듯한 시선이 다시 느껴지는 것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던 것일까?
카린은 그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접시에 담겨나온 스테이크 요리를 살피었다. 우선 냄새를 한번 맡아보고... 그다음에는 포크로 한번 쿡 찔러보고... 나이프로 썰어서 고기조각을 요리조리 살핀 다음, 혀끝으로 한번 맛을 보고... 평범한 '어린이 세트’ 라는 것을 신중히 확인한 뒤에야 카린은 그것을 입에 넣었다.
'독은 없는 것 같네.'
카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기를 우물거렸다. 입 안에 퍼지는 고기의 육즙이 달짝지근한 것이 역시나 '어린이 세트’ 다웠지만 이에 불만이 없는 게 당연한 것이, 재상 쪽에 나온 요리를 본다면 누구나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카린은 자신의 입속의 고기를 꿀꺽 삼키고는, 포크를 들어 재상의 몫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한 조각만 맛봐도 돼?"
"물론입니다."
재상은 자신의 접시를 카린에게 가까이 내밀며 쾌히 승낙했다. 카린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팔을 쭉 뻗어서 포크로 재상의 스테이크 조각 하나를 '쿡’ 찍어 가져가서는 마치 감정을 하는 감정사 모양새로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고기가 녹색이 될 수 있는 거지?'
적갈색 빛을 띄는 게 정상적이거늘, 고기주제에(?) 논밭에 심어져 거름과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기라도 한 양, 잡초 같은 연녹색을 띄는 유별함에 카린은 전의 커플이 녹색 게거품을 물고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설마 먹고 죽겠어...'
카린은 여전히 포크에 꽂혀 있는 녹색 고기조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재상 쪽을 보았다. 재상은 평범한 음식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녹색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서 잘만 씹어 삼키는 모습에 카린은 경계심을 약간은 풀고서 그것을 조심조심 입에 넣었다.
'뭐, 괜찮네..'
입에 넣고 몇 번 씹는 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씹으면 씹을수록 마치 생풀을 씹는 것 같은 씁쓸함이 입안에 퍼지기 시작하는데... 약처럼 지독하게 쓴맛에 카린은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입속의 그것을 바닥에 '퉤퉤' 하며 급히 뱉어버리고는 주전자를 통째로 들어서는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베르제바브 대공이 곁에 있었다면, 그녀가 음식을 바닥에 뱉는 만행과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마시는 불결함에 화가 머리끝까지나서는 주전자 주둥이를 강제로 목구멍까지 밀어넣겟지만, 그만큼 먹기가 곤욕스러운 이런 음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있는 재상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재상은 이런 게 맛있어?"
"예, 저는 차도 그렇고, 음식도 씁쓸한 쪽이 기호가 맞더군요."
재상은 그녀의 말에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재상의 미각이 원래 맛이 갔던 건지, 아니면 어른들에게는 이런 씁쓸함이 오히려 입맛에 맞는 것인지 모르는 카린은 그저 그의 정상이 아닌 미각이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잠깐 실례, 합석해도 될까?"
누군가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빈자리라면은 저렇게 사람들이 실려가는 덕에 널리고 널렸거늘... 다른 자리를 내버려두고 자신들 테이블에 다가와서는 물어오는 말에 기분이 나빠진 카린은 누군가 싶어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검... 분명히, 리프 공작이 차고 다니는 성검 같았다... 그녀의 눈에 그것은 왠지 모르게 잠깐 반짝거린 것이 마치 뭐랄까? 아이가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린은 고개를 들어 그 검을 찬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은... 전신을 시꺼먼 로브에 시꺼먼 후드를 걸쳐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음침한 자였다.
- 위의 전체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 지명 등 모든 것은 현실의 정치,종교,지역,인물, 기타 등 모든 것과 절대 연관이 없으며 숨겨진 뜻 같은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