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에는 국보가 불탔다.
9시 뉴스에서는 거대하고 낡은 목조 건축물이 무
너지는 영상만이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영어 선생
님은 관사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
어, 언, 더, 디
모국어에는 없는
어, 언,더, 디.....
불을 지르고 싶어. 검붉은 저화질 영상이 서서히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초록색 칠판이 그을린 나무
판자가 되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지는 장면이. 흘
려 쓴 한자가 새겨진 현판이 그랬듯이. 느리게 되감
기는 비디오처럼 재 가루가 흩어지고
화재경보기의 버튼을 누르고 싶어. 교실을 태워
버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모두 대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단지 고개를 들고. 의자를
밀치고, 책상을 넘어뜨리고, 유리창을 깨부수고, 떠
나야 한다고
그해에는 노바디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노바디 노바디 벗 유
영어 선생님은 토막 난 단어들을 해석하지 않고
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굴었다.
아무도 아무도 그러나 당신......
나는 끔찍한 상상만으로도 교실의 공기를 견딜
수 있는 것처럼 굴었고.
단지 불을 지르고 싶었다.
어떤 세계에서 나는 광폭한 왕의 대리인이었다.
망상의 나라에서는 모두가 바닥을 보고 걸었다.
그게 내가 만든 법이었다. 그곳은 불 쇼가 열리는
서커스장이 아니었고, 불꽃은 장난이나 오락거리가
아니었지. 약에 취한 독재자처럼 커다란 성곽을 따
라 번지는 불길처럼 들짐승이 옮긴 역병처럼 걷잡
을 수 없는 붕괴처럼 차라리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아 전소된 지하의 노래방처럼 방음이 아주 잘되
는 고문실처럼
얘들아.
여기 캠프파이어 하러 온 거 아니잖아.
엄마 아빠 죽는 이야기 듣고 질질 울러 온 거 아
니잖아.
텅 빈 왕국에서 아이들을 모두 쫓아내고 싶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게 될까?
나는 유순한 아이였다. 고개를 숙이고 판서를 받
아 적고 망쳐버린 필기 노트는 찢어버리고 질문에
는 속엣말로 꼬박꼬박 대답하는 선하고 얌전한 아
이. 정말이지 성실한 인간이었어. 선생의 말을 끊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손을 들지 못하는 인간. 이
수업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인간. 터지기 직전까지
버티는 인간. 참는 인간.
나는 불을 지르지 않지. 그러므로 아무도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아. 죽이지 않아. 아무도 아무도.....
그러나 내 머릿속이 불타는 걸 방관하는 당신은?
어떤 후렴구는 해석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당
이 더 일찍 알려주길 바랐지. 어떤 선생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는 걸, 불을 지르는 대신 그냥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가면 된다는 걸. 이미 늦었다.
상상으로 세운 거대한 성에 기름을 붓는다. 성냥을
던진다. 번지고, 터지고, 무너진다.
그러나 당신,
이 방화의 유일한 목격자
어나 언이 아니라 디와 더인 당신은
나를 고발하게 될까?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모텔과 나방],현대문학,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