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꽃 단장을 하고 극장에 걸리는 개봉작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또는 봐야만 하는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리스트가 가능하다. 이 땅에는 영화에 목말라하는 시네필을 위한 시네마테크가 있으며 그들이 기획하는 많은 영화제들이 있다. 2003년에만 20여 개의 '작은 영화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올 한 해 시네마테크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꼼꼼하게 시간표 챙겨가며 즐감하시길.
프랑스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말로 시작해보자.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젊은 음악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을 수 없는 젊은 작가를 상상할 수 있을까? 자라나는 영화감독이나 비평가에게도 동등한 권리가 있어야 한다. 영화에는 미래가 있으되 그 과거가 죽어서는 안 된다.” 로메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누벨바그 세대들은 시네마테크의 아버지 앙리 랑글루아가 설립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 예술의 자양분을 받았다. 서구 시네마테크의 유서 깊은 역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렇게 약속된 시간에 특별한 공간을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이 있다. 시시때때로 시네필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시네마테크의 기획 영화제들이 그것이다. 2002년 5월 시네마테크 전용관으로 개관한 이래 장 르누아르 회고전, 나루세 미키오전, 영국영화제, 오시마 나기사 회고전 등 수다한 영화제들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서울아트시네마를 비롯, 시네마테크부산, 하이퍼텍나다는 올해도 방대한 영화제 릴레이로 영화 애호가들의 갈증을 달래줄 궁리를 하고 있다. 한 달에 평균 2회꼴로 영화제가 열리는 2003년의 라인업은 일년 전에 비해 한층 다양하고 체계화된 인상이다. 고전과 현대, 미국, 유럽, 아시아, 남미를 아우를 뿐 아니라 전위, 아방가르드, 다큐멘터리까지 장르와 스타일 면에서도 깊어지고 넓어졌다. 그럼, 떠나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설레는 영화제 기행.
1. 만국의 영화여! 단결할지어다
EU영화제(5월)
‘EU영화제'는 할리우드의 대척점에서 영화 예술의 자존심을 굳세게 지키고 있는 유럽영화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기회다. 근년 들어 열린 유수 국제 영화제의 출품작 위주로 선별한 작품이 상영 목록을 채우고 있다. EU영화제에서는 그리스, 덴마크, 아일랜드, 네덜란드, 핀란드 등 영화로는 생소한 유럽 국가까지 망라한 13편의 현재형 유럽영화들이 영화 애호가들의 예민한 감식안을 기다리고 있다. 빔 벤더스의 폭력에 대한 문화적 알레고리를 담은 <폭력의 종말>, 무기를 통해 전쟁에 대한 사회 인류학적 탐구를 시도한 에르만노 올미의 <무기의 기능>, 덴마크 올레 크리스티앙 매드슨의 디지털 영화 <키라의 사연: 사랑 이야기> 등이 상영된다.
프랑스영화제 ‘랑데부 드 서울’, 이탈리아영화제(6월)
초여름에는 두 개의 지역 영화제가 눈길을 끈다. 하이퍼텍나다, 프랑스 대사관이 공동 주최하는 ‘랑데부 드 서울’은 12편의 최신 프랑스영화들 외에 한.불 특별 교류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임권택 감독이 선정한 외화들, 칸영화제 동아시아영화 선정 위원인 피에르 뤼시엥이 선정한 외화 등 30여 편이 상영된다. 80년대 이후 침체에 빠진 이탈리아영화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이탈리아영화제’는 6월 말 관객을 찾아간다.
멕시코영화제, 발리우드 특별전(7월)
‘멕시코영화제’와 ‘발리우드 특별전’은 개성 만점의 지역 영화 축제다. 국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발리우드(뭄바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로 액션, 코미디, 뮤지컬이 뒤섞인 인도식 혼성 장르 영화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대표작 6~7편을 엄선한 발리우드 특별전은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특별전 프로그램으로 상영된 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순회전 형식으로 선보인다. 70년대 이후 세계 무대에서 사라진 남미영화의 전통을 거의 유일하게 계승하고 있는 멕시코와 아시아의 할리우드로 칭송받고 있는 영화 강국 인도 발리우드 영화들은 신선한 영화 체험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영국영화제(8월)
2002년 예상 밖의 성공을 거둔 영국영화제는 영국 대사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두번째 행사를 준비중이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한시협, 시네마테크부산의 공동 주최로 열리며 영국영화의 최근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작품들로 꾸며진다.
2. 명예의 전당에 오른 작가들
알프레드 히치콕 회고전(4월)
'꽃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한 제비처럼 4월에는 시네필들을 사로잡을 핵탄두가 온다. 불길함의 상징인 4자가 두 개나 들어가는 4월 4일부터 시작하는 서스펜스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회고전’이 그것이다. 시네마테크서울이 준비한 히치콕 회고전은 2003년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필견' 프로그램이다. 세상에서 가장 조마조마한 영화 <새>,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로맨스 <현기증>,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 <사이코>를 한꺼번에 필름으로 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 히치콕은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주름잡은 미다스였다. 다른 한편으로 히치콕은 관객을 매혹시킨 대중 영화 감독이었을 뿐 아니라 고전과 현대 영화의 경계에서 정교한 영화 언어로 서스펜스 미학을 창조한 완전 작가였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히치콕의 영국 시절을 대표하는 <39계단>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나이>에서 전성기 농익은 연출력을 보여준 50~60년대 할리우드 작품들까지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불과 한 달 후면 찾아올 12편의 히치콕 특선은 관객의 심리를 쥐락펴락하는 이 초인적 서스펜스 마스터의 마력적인 영화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흥분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니콜라 필리베르 회고전(4월)
화광들에게는 히치콕의 서스펜스가 전해주는 흥분해 빠져 허덕일 틈이 없다. 히치콕 회고전이 끝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프랑스의 다큐멘터리스트 ‘니콜라 필리베르 회고전’이 배턴을 잇기 때문이다. 니콜라 필리베르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돼 반향을 일으킨 미지의 감독이다. 회고전에서는 <마지막 수업>을 비롯, <귀머거리의 대지에서> <동물들> 등 필리베르의 전작 다큐멘터리 4편을 모아 상영한다. 대중과 친숙하지 못한 장르라는 이유로 시네마테크에서조차 접하기 힘들었던 다큐멘터리스트의 회고전은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기록영화 감독의 묵직한 영화 세계를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회고전에 맞춰 한국을 찾는 필리베르 감독은 한국 관객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빔 벤더스 영화제(6월)
시네마테크서울의 ‘빔 벤더스 영화제’에서 우리는 또 한 명의 거물 감독과 만난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스타로 대중들과 친숙해진 빔 벤더스는 현대 독일영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최근 들어 침체 일로로 빠져들고 있는 독일영화의 운명처럼 90년대 이후 그의 영화도 생기를 잃었지만 벤더스에게도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빔 벤더스 영화제는 이 화려했던 시절, 뉴 웨이브의 선두에서 새로운 독일영화를 진두지휘한 70년대 벤더스의 대표작들을 주 메뉴로 삼았다. 그 시절 벤더스의 영화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 정주하지 않는 유랑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 부박(浮薄)의 정서는 동시대 독일영화의 큰 흐름과도 포개졌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시의 앨리스> <미국인 친구> 등 벤더스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70~80년대 대표작들은 이제는 경계를 허물고 세계인으로 거듭난(?) 노회한 거장의 충만했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기회를 줄 것이다. 때로 거장은 그렇게 교훈을 주기도 한다.
미조구치 겐지 회고전(8월)
이름만 눈에 익었지 변변히 소개된 바가 없어 궁금한 감독들이 더러 있는데 일본 감독 미조구치 겐지도 그런 이들 중 하나다 시네마테크부산과 하이퍼텍나다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미조구치 겐지 회고전’이 그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와 더불어 일본영화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미조구치는 다양한 장르를 오갔지만 핍박받는 여성들을 다루는 데 능했다. 가혹한 운명에 놓인 여성의 이야기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는데 이는 구로사와의 역동적인 세계, 오즈의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와는 구별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미조구치는 구로사와, 오즈에 비해 뒤늦게 서구인들에게 발견된 작가였다. 우리에게도 그는 너무 늦게 소개되는 감독이다. 독창적인 스타일로 세상을 관조하는 미조구치의 작품들을 통해 일본 고전영화의 또다른 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 콕토 회고전(9월) ‘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가전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이어진다. 누벨바그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장 콕토는 손이 열 개쯤 되는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장 콕토는 시, 소설, 회화, 영화에 이르기까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넘나들며 두각을 나타낸 유례 없는 종합 예술가였다. 서울퀴어아카이브가 주최하는 '장 콕토 회고전'에서는 초현실주의, 큐비즘, 시적 리얼리즘을 넘나들며 전방위 예술가로 왕성하게 활동한 장 콕토의 영화들을 상영한다. 무수히 많은 리메이크를 통해 알려진 <미녀와 야수>를 비롯, <시인의 피> <오르페> <오르페의 유언>으로 이어지는 오르페 3부작, <영원한 회귀> 등이 상영작 목록을 채우고 있다.
데릭 저먼 회고전(11월)
문화학교서울 주최로 열리는 ‘데릭 저먼 회고전’은 2003년을 가장 뜨겁게 달구어놓을 회심의 기획이다. 80년대 영국영화를 대표하는 반골 감독 데릭 저먼은 대처리즘의 보수주의에 카메라를 들고 항거한 전사이자 게이 액티비스트, 회화, 사진, 팝 아트, 뮤직 비디오를 넘나들며 영화 형식과 내용의 분방한 실험을 꾀한 급진적인 예술가였다. 1993년 에이즈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그는 임박한 죽음을 예감한 순간에도 “두렵지 않다, 죽음이여. 어서 나에게 오라”는 전투적인 자세로 영화를 만들었다. '술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예술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저먼은 잠재된 저항 의식을 도발하는 문제작들을 내놓았다. 그의 삶 또한 그러했다. <대영제국의 몰락> <세바스천> <희년> <템페스트> <카라바지오> <가든> <에드워드 2세> 등 16편의 중, 단.장편영화들이 당신의 잠자는 의식을 번쩍 흔들어 깨울 것이다.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 회고전(11월)
‘덴마크 영화감독’ 하면 라스 폰 트리에 정도만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 회고전’은 북구영화의 유서 깊은 전통과 만날 수 있는 뜻 깊은 기회다. 칼 드레이어는 활동 초기에 번번이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들’이라는 비난을 들었지만 이제는 매년 연례 행사로 치러지는 ‘영화사를 빛낸 위대한 감독’ 순위에서 빠지지 않는 거장이 됐다. 이 회고전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형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복사판 비디오로 짜증을 배가시켰던 드레이어 영화의 진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죄악을 떠안은 듯한 소녀의 얼굴에서 숭고한 영혼의 표정을 추출해냈던 <잔다르크의 열정> <분노의 날> <오데트> <분노의 날> 등 칼 데오도르 드레이어의 기념비적인 작품 10편을 상영한다.
클로드 샤브롤 영화제(12월)
클로드 샤브롤은 2001년 프랑수아 트뤼포, 2002년 장 뤽 고다르에 이어 선보이는 하이퍼텍나다의 누벨바그 감독 시리즈 세번째 기획전이다. 50년대부터 지금까지(얼마 전 막을 내린 베를린영화제에 신작 <악의 꽃>을 내놓아 노익장을 과시한 바 있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샤브롤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에 심취해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 감독이다. 트뤼포, 고다르에 비해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히치콕에 경도된 밀도 있는 심리 스릴러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 앞서 누벨바그의 징조를 먼저 알렸던 <아름다운 세르주>, 애드리언 라인의 <언페이스풀>의 원작으로 알려진 <부정한 여인> <사촌들> <도살자>, 최신작 <악의 꽃>까지 10여 편의 대표작들을 상영한다.
루키노 비스콘티 회고전(12월)
문화학교서울의 ‘루키노 비스콘티 회고전’은 2003년 작가전의 피날레로 모자람이 없다. 비스콘티 회고전은 그간 입으로 전해진 소문만으로 전설이 된 비스콘티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나는 의미심장한 영화제가 될 것이다. 귀족 출신의 비스콘티는 네오리얼리즘, 마르크시즘, 탐미주의 사이에서 번민하며 충돌적인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불균질성의 영화는 연극, 오페라, 영화를 교합하는 비스콘티의 심미안을 통해 장중하고 아름다운 걸작들로 평가받고 있다. 파시즘에 대항하며 잃어버린 예술의 아름다움을 복원하려 했던 비스콘티의 영화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주최자인 문화학교서울은 <강박관념> <로코와 그의 형제들>으로 대표되는 네오리얼리즘 시절의 작품들, 후기작인 <애증> <베니스에서의 죽음> <표범>까지. 14편의 장편 전작을 상영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3. 5색 테마전
일본영화의 황금기, 15인전(3월)
주제별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테마 영화제로는 3월 20일 개막하는 ‘일본영화의 황금기. 거장 15인전’이 첫 테이프를 끊는다. 한국영상자료원과 동경근대미술관 필름센터가 주최하는 거장 15인전은 일본 고전영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15편의 작품을 엄선했다. “남자 영화는 구로사와, 여자 영화는 기노시타”라 불렸던 기노시타 게이스케의 <24개의 눈동자>를 비롯, 구로사와 아키라의 <백치>, 미조구치 겐지의 <오하루의 일생>, 이치가와 곤의 <열쇠>, 괴수 영화의 원조로 무수히 많은 후속작을 낳았던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 애니메이션의 고전 <백사전>까지 다종 다기한 장르가 망라돼 있다. 거장 15인전은 구로사와, 오즈, 미조구치 3대 감독으로 대별되는 일본 고전영화의 다양한 층위를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일본 퀴어 웨이브전(5월)
거장 15인전에 이어 5월에는 또 하나의 일본영화제가 기다리고 있다. 서울퀴어아카이브에서 주최하는 ‘일본 퀴어 웨이브전’이 그것이다. 퀴어 웨이브전은 일본 퀴어 시네마를 대표하는 두 감독, 하시구치 료수케, 오키 히로유키의 작품들에 주목한다. 하시구치 료수케, 오키 히로유키는 섹슈얼리티를 화두로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각종 문제 의식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게이로 커밍아웃한 하시구치 료수케는 카메라가 포착할 수 있는 미묘한 감정들을 끈질기게 파고드는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90년대 이후 일본 현대 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이끈 주역으로 꼽힌다. 퀴어 웨이브전에서는 전후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기형적인 가족 의식, 성 정체성, 섹슈얼리티 등의 예민한 문제를 탐사해온 두 감독의 전작을 소개할 예정이다. 장편 <스무 살의 미열> <해변의 신밧드> <허쉬>, 단편 <지난밤의 비밀> 등 하시구치 료수케의 작품 4편, 오키 히로유키의 <수영 금지 No Swimming Allowed> <풍경 포착 Landscape Catching> <마음속 Inside Heart> 등 10여 편의 작품이 목록에 올라 있다. 영화제 기간 동안 감독이 내한해 자신의 영화 세계를 피력하는 자리도 가질 예정이다.
호모아방가르드: 잭 스미스, 케네스 앵거 특별전(7월)
‘호모아방가르드: 잭 스미스, 케네스 앵거 특별전’은 모반과 반역의 기운이 만개했던 60년대 미국으로 시계추를 되돌린다. 잭 스미스와 케네스 앵거는 형식과 내용 등 영화의 전 영역에서 모반을 꾀했던 그 시절 최전위 아방가르드를 자처한 작가들이다. 범상한 눈으로는 불가해하기만 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그들의 영상은 관습과 자본의 게임으로 전락한 왜곡된 영화 예술에 메스를 가하며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다. 호모아방가르드전에서는 케네스 앵거의 <스콜피오 라이징> <루시퍼 라이징> <토끼의 달>, 잭 스미스의 <스카치테이프> <노 프레지던트> <오버스티뮬레이트디> 등 극단의 실험, 과격한 이미지의 탐구. 대중문화의 다양한 신화를 인용하며 전통적인 이성애 규범에 도전한 이 두 감독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퀴어 웨이브전, 호모아방가르드전을 기획한 서울퀴어아카이브의 서동진 프로그래머는 “두 영화제가 올해 계획된 수다한 기획 영화제 중 가장 적은 관객이 찾을 영화제로 꼽히고 있지만 또한 가장 급진적인 영화제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프랑스 포스트 누벨바그전(8월)
영화 산업의 주변부에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며 영화를 만든 것은 실험 영화 작가들만이 아니다. ‘프랑스 포스트 누벨바그전’에서 견고한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영화의 진정성을 고수하려 했던 작가들의 흔적과 만나게 된다. ‘포스트 누벨바그’로 이름 붙여진 이 기획전은 누벨바그 이후 프랑스영화가 낳은 뚜렷한 성과, 하지만 우리에게 뒤늦게 소개되는 장 으스타슈, 필립 가렐의 대표작들로 채워졌다. 1981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장 으스타슈는 국내 관객에게는 생소하지만 누벨바그의 영향력 아래서 새로운 프랑스영화의 흐름을 만든 감독이다. 순수한 영화의 형식을 고민하며 나온 그의 영화는 올리비에 아사야스, 카트린 브레이야, 클레르 드니, 브누아 자코 등 80년대 이후 등장한 촉망받는 감독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삶의 고통, 사랑의 불가능성, 절대 고독이라는 테마를 엄격한 미학을 통해 보여주는 필립 가렐 역시 영화 산업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시적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분투한 독보적인 작가다. <페삭의 처녀> <엄마와 창녀> <불쾌한 이야기> 등 으스타슈의 작품 7편, <폭로자> <비밀의 아이> <밤의 바람> 등 가렐의 영화 6편이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 속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퀴어 베리테전(12월)
테마 영화제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주자는 서울퀴어아카이브의 ‘퀴어 베리테전’이다. 얼터너티브 정신으로 똘똘 뭉친 퀴어 다큐멘터리의 문제작들을 한데 모은 퀴어 베리테는 퀴어 시네마의 상당수가 다큐멘터리를 내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퀴어 다큐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기간의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사뭇 도발적인 기획이다. 아직 영화제 기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상영작을 확정하지는 않은 상황. 서동진 프로그래머는 “첫번째 퀴어 베리테전은 최근 퀴어 다큐의 경향을 대표하는 신작이 중심이 되며 오는 7월에 열리는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이 다수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숨가쁘게 달려온 2003년 시네마테크 영화제 기행도 이것으로 끝났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20여 개의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수만 어림잡아 3백여 편. 한 해 동안 개봉하는 국내외 영화들에 필적할 만한 실로 방대한 편수다. 미친 척하고 다 보기로 작정한다면 몇 달 못 가 눈알이 시뻘겋게 충혈될 게 뻔하다. 물론 프린트 수급, 영화제 비용, 번역, 자막 등 돌발 변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스케줄대로라면 영화제로만 1년 버티기도 ‘환상’이 아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향기로운 영화 문화가 꽃피는 영화 선진국이 된 걸까? ‘그렇다’고 힘주어 말할 수는 없지만 2003년 한 해가 대한민국의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더없이 설레고 바쁜 나날이 될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