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사랑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게시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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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의 기억
6월부터 더위를 겪어서 인가 정작 8월의 불볕더위는 오히려 별거 아닌 느낌이다. 강원도 홍천이 6월에 벌써 섭씨 34도를 웃돌았고, 경남 합천은 7월 하순에 체온보다 높은 36.7도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조만간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가 될 것이라는 예견이 허풍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예측 불가능한 물난리
지구온난화는 필연적으로 기상이변을 동반한다. 예측을 벗어난 집중 호우와 잦은 태풍은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이지만 호우나 태풍이 할퀴고 간 잔해는 참혹하기 짝이 없다. 지난 7월 중순 발생한 제4호 태풍 ‘마니’가 한반도엔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
7월 중순 집사람이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13층 입원실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은 평소에 비해 유장하고 도도했다. 며칠 퍼부은 호우로 강물이 많이 불었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한강을 보다가 연례행사처럼 찾아왔던 예전의 물난리가 떠올랐다.
물난리는 7월 중순~8월 하순, 때로 9월 들어서도 나곤 했다. 9월의 물난리는 주로 태풍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1959년 한반도를 강타한 악명 높은 태풍 ‘사라’도 그랬고, 2002년의 ‘루사’, 2003년의 ‘매미’도 모두 9월에 한반도 일원을 강타했다.
상습 피해 지역 서울
그 중 아직도 기억에 선연한 것은 1984년 9월 태풍 ‘준’이 전국을 강타했을 적이다. 올림픽 대로를 4차선에서 8차선으로 넓히는 중이라 광나루 일대의 한강 둔치가 아직 정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팔당댐 수문을 통과한 급류가 몰아쳤다. 설상가상으로 목동과 풍납동 배수펌프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바람에 안양천 하류와 마포구 망원동 전역, 그리고 풍납토성을 비롯한 광나루 일원이 물에 잠겼다.
물난리가 나면 수재민은 인근 학교로 대피해 풍찬노숙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불 구경 다음으로 흥미롭다는 물 구경에 나선다. 당시 천호동에 살던 나도 광나루 근처에 나가 물난리를 바라보곤 했는데, 흙탕물 한강 위로 뽑힌 나무와 돼지는 물론 그야말로 집채가 떠내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아무튼 그때 물난리로 전국적으론 200명 가까이 숨지고 그때 돈으로 2000억원이 넘는 재산피해가 났다.
北 “구호물자 제공” 해프닝
며칠 후 북한으로부터 전격 제의가 왔다. “태풍 피해를 당한 남한 동포에게 쌀과 시멘트, 약품 등을 보내고 싶다”는. 당시 북한 주석이었던 김일성으로서야 설마 남한이 그 제의를 받아들이겠느냐는 심산에서 의중이나 떠보자고 한 제안이었던 것 같은데, 단순무식하지만 과단성이 무기(?)였던 남한 대통령 전두환이 “그러마” 덜컥 수락했다.
그때부터 북한은 그야말로 불난 호떡집 형국이었다는 것이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의 전언. 북한 전역으로 전통(電通)이 내려가고 쌀과 약품, 기타 구호품을 수집하느라 인민과 관청의 등골 휘는 소리가 도처에서 감청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작황을 풍작으로 보고 받은 수령의 물정 모르는 지시에 가뜩이나 빡빡했을 북한 인민들의 살림살이가 더 신산스러워졌을 것은 뻔한 이치.
아무튼 이러구러 ‘인도적 차원의 대남 지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수해지원물자를 실은 북한 선박이 쌀 5만석과 시멘트 10만t 등을 싣고 인천항과 북평항에 입항해 물자를 부리고 돌아갔다. 수해 가정은 ‘김일성 수령 하사품’을 받았는데, 쌀은 질이 좋지 않아 대부분 떡을 해먹었고, 약은 아예 배급받지도 않았다.
풍납동에 살고 있던 신문사 선배가 수령 하사품을 주위에 조금씩 나누는 과정에서 나도 한 봉지 받았는데, 북한 인민들의 땀이 어린 쌀이었지만, 솔직히 색깔도 누렇고 냄새도 나 그냥 기념으로 간직했던 기억이 난다.
‘평화의댐’과 愚民정치
물난리도 물난리지만 ‘평화의댐’ 건설은 물난리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우민정치의 전형이라는 점에서 지금 생각해도 씁쓸하다. 86년 가을 전두환 정권은 “북한이 파로호 상류에 건설 중인 금강산댐(임남댐)은 남한에 대한 수공(水攻)용”이라면서 불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땡전 뉴스’로 충성을 다하고 있던 방송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때라 북한이 금강산댐을 무너뜨릴 경우 서울이 63빌딩 중턱까지 물에 잠길 수 있고 수도권이 황폐화되는 상황을 서울시가(市街) 모형으로 재현했고, 신문은 신문대로 수리학(水理學) 전문가까지 동원해 그래픽과 만평으로 북한의 수공 위협을 설파했다. 순박한 백성들로서야 그대로 믿을 수밖에. 특히 서울 사람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그해 11월26일 정부는 평화의댐 건설 담화문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유치원생의 고사리 손으로부터 시골 촌로의 주름진 손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성금으로 600여억원이 모였고, 여기에 국고 1000억원이 보태졌다. 이듬해 2월28일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현장에서 첫삽이 떠졌고, 2년 간의 초고속 공사 끝에 1989년 가을 평화의댐은 완공됐다.
하지만 문민정부 시절 벌인 감사에서 금강산댐의 수공위협과 피해예측이 과장됐고 평화의댐 필요성도 부풀려졌음이 드러났다. 그나마 95년, 96년 연이은 집중호우 때 댐의 홍수 조절 기능이 입증됨에 따라 2002년부터 댐 높이를 80m에서 125m로 높이는 2단계 공사를 시작해 2005년 끝냈지만, 지도자라는 자가 백성을 속이면 얼마나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가를 입증한 촌극치곤 우울한 사건이었다.
‘불이 지나가면 흔적이 있지만, 물이 지나가면 흔적도 없다’는 말도 있듯이 물난리는 무섭고도 끔찍하다. 물론 요즘 한강을 보면 둔치가 잘 정비됐고 치수도 양호한 편이지만, 집중 호우나 태풍이 상륙할 때마다 괜시리 걱정되는 것은 예전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흔적이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광나루서 부르는 ‘바닷가의 추억’
집사람이 퇴원한 후 광나루에 가 봤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위도 낮아졌고 강물도 맑아져 있었다. 문득 7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사운드 키보이스의 ‘해변으로 가요’와 ‘바닷가의 추억’이 흥얼거려졌다. 강가에서 웬 바다 타령이냐구? 그럴 이유가 있다. 키보이스가 70년 내놓은 ‘해변으로 가요’를 재킷 타이틀로 내놓은 LP ‘키보이스 특선 2집’의 배경이 다름 아닌 광나루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목회자가 된 윤항기를 비롯해, 옥성빈, 차중락, 차도균, 김홍탁 등 기라성 같은 당대 보컬들이 바다를 소재로 한 앨범을 만들고 재킷으로 해변이 아닌 광나루 모터보트 위에서 옛 광진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썼다는 사실. 필시 앨범 만드는 비용 아끼려 레코드사 사장이 내놓은 얄팍한 아이디어의 소산이었을 터이지만 애교스럽지 아니한가! 그러니 내가 광나루 강가에만 가면 시도 때도 없이 바닷가의 추억이나 해변으로 가요를 읊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해변으로 가요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말은 안해도 (말은 안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꺼에요
붙타는 그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에 발자국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가요 (해변으로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가요 (해변으로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