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2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내 손을 쥐었다. 열기가 느껴지는 체온이었다.
"고시에 패스하고 바로 결혼했지만 우린 정말 가난했어. 우리끼리 남의 도움없이
살려니까 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행복했단다."
눈물이 왜 그렇게 흔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강직하달 만큼 굳센 여자였는데.
"맞벌이를 하고 그이가 쪼개 쓰고 해서 우린 아파트 한 채를 살 정도가 됐어.
조그맣고 보잘것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부터가 문제야. 아파트 순위가 빠르기 위해선
정관수술을 한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매겨진다고 했어. 그런 적 있잖니. 그래서 그이는 딸만 하나
낳아놓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서 거짓말로 서류를 만든 거지. 아들을 꼭 낳겠다는 그이 뜻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어."
"가짜로 그런 서류를 만들었단 말이지."
"집은 사야겠고...... 그렇다고 어디 가서 부탁하기도 그렇고.....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궁여지책으로 서류를 만들어서"
"그게 무슨 문제란 말야?"
"들어봐.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은주 누나는 잠깐 사이에 차가울 만큼 침착해져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우린 애가 없었어. 병원에도 가보고 산에 가서 기도두 했지.
내가 그렇게 변하더구나. 애가 없자 그이는 자꾸 변해졌어, 뭐라고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지만,
그이는 큰 회사에서 마침 픽업을 해갔고 능력을 인정받아서 승진도 했어. 경제적으로 아주 윤택해졌고
그이는 수완좋게 부동산 투기도 했고 증권도 사들여 정말 없는 것이 없게 됐어. 걱정이 있다면 아들이
없다는 것뿐였어."
"아들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래. 나원참."
"누나 맘 알게 될 거야. 그래서 부러운 거 없이 살았는데...... 그이가 뒤늦게 바람이 났어.
아들 없다는 핑계로 차마 너한테 얘기할 수 없는 짓까지 하고 다녔어."
"그걸 그냥 뒀어?"
"아들 없는 죄지 뭐. 난 참고 견뎠어. 바보였지. 지금 생각하니 정말 난 바보였어.
그런데 뜻밖에 내가 임신을 한 거야. 얼마나 기뻤겠니? 생각해 봐. 정말 너무 기뻤어."
나는 담배를 피워대며 누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누나는 맥주를 잔 끝까지 마시고 탁자 위에 곱게 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이는 나보고 누구 씨앗이냐고 다그쳐 묻기 시작했어. 이런 원통할 데가 있니?"
"누난 정말 다른 일 없었지."
이혼하자구 할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하는건데. 그인 지독한 노랭이야. 원체 고생하며,
없이 살아와서 그런 거겠지만. 내가 봐도 너무 지독스러웠어. 위자료없이 이혼하려고 든 사람이니까.
난 악이 나서 악착스럽게 위자료라도 받으려고 했었어. 그인 그걸 노린거야."
"뭘 노렸다는 거야. 임신했겠다, 핑계가 없어진 거겠지.
갑자기 여유가 생긴 사내 새끼들 특유의 공통점이 오입질인 건데 뭘."
나는 꽤 아는 척을 했다. 은주 누나는 씨익 웃었다.
"그이는 정관수술을 해서 애를 가질 수 없다는 거였어. 그런데 내가 임신을 했으니까
부정한 짓을 했다는 거지."
"가짜로 아파트 추첨하려고 떤 거라며.
"휴유...... ."
누나는 맥주를 따라서 한모금 홀짝 마셨다. 얼굴이 붉어 오르는 기색이었다. 어두운
조명이었지만 확실히 은주 누나는 취한 것 같았다.
"확인했어. 그런데 놀랍게도 그이는 정관수술을 했어."
"그럼 병원에서 정밀 조사를 받으면 되잖아. 정충이 있는지 없는지."
누나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힘없이 웃었다.
"별 걸 다 아는구나. 왜 안했겠니. 했지. 정충이 안 나온대. 그러니 어찌 됐겠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난 앉은 자리에서 감옥에 가고 말았어. 간통죄였다. 내 팔자에
간통이라도 하고 살았으면...... ."
흐느낌이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어? 그게 무슨 얘기야? 생각해 봐, 잘 모르지만 그게 무슨
얘기야? 귀신이 곡하지 않고 배겨. 누나가
꼼짝없이 뒤집어 쓸 수밖에 없는 거잖아.
과학적으로 하자가 없고...... 누난
결백하다고 하고...... 당연히 누나가 감옥엘
갈 수밖에."
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교묘한 술수를 썼다고 하지만 그것은 혼란한 사건뿐이었다.
"하나님은 알 거야, 이 억울한 사연을. 정말 하나님은 알 거야."
누나는 내 손목을 쥐고 내 가슴에 쓰러져 울었다. 언제나 누나를 생각하면 내가 누나의
가슴에 파묻혀야 옳았다. 이젠 그것이 거꾸로 되었다.
나는 그 순간에 누나에게 장가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내 동정심으로 누나를 돕자는 각오를 했다.
"하나님이 뭘 알아. 이러지말고 더 얘길 해봐. 누나 생각은 어떻다는 건지 말야."
누나는 고개를 들었다. 좁은 공간 어디에도 눈빛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웠으니까
누나에겐 용기를 주는 장소였을 것 같았다.
"이건 연극이었어. 내 추측이 맞을 거야. 처음 임신했다니까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어.
그런 후에 감쪽같이 연극을 꾸몄을 거야. 정관수술도 몰래 했을 거고 계획적으로 나를 내쫓아서
위자료 한푼 주지 않을 작정을 했을 사내야. 내 말 못 믿겠지만 정말 그러고 신사가 됐고
나는 교육대학 출신에 못 생긴 예편네고...... 그래서 그이는 언제나 불만투성이였어."
나는 왠지 그 순간에 누나의 추리력을 믿었다. 상황이나 사내의 여러가지 조건과
욕망으로 보아서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과 그럴만한 재간이 있다고 믿었다.
"누나 지금까지 한 말 믿어도 돼?"
"하나님은 날 알 거야."
그 한마디로 나는 누나를 믿기로 작정했다.어디서부터 손을 써야만 이 가엾은 누나의
추리력과 내 상상력을 합치시키며 사내의 술수를 밝힐지 아득했지만 나는 일단 누나를
돕기로 결심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에 대한 내 최고의 자존심이었다.
누나는 밤이 새도록 얘기를 하고 싶어 홀짝거리며 마신 누나는 억울한 사연을 부끄러움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더러는 지나치게 자기 주장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어느 것은 전혀 믿어지지 않는
잠자리 얘기까지도 서슴없이 했다. 삼십대.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여자.
나는 은주 누나를 이렇게 단정했다. 아니 그것은 삼십대 여자의 공통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이도 적게도 살지 않은 어중띤 나이에 알맞게 부끄러움 따위를 팽개칠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여자 나이 삼십대에는 소녀 때나 신혼때처럼 체면 차리고 부끄러움 탄다면 자식들한테
어머니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고 살림꾼, 억척스런 여편네로서의 집안을 꾸려나갈 수 없는 것이다.
여자의 특권일 것이다.
"누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무슨 수를쓰더라도 그 새끼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거야."
"그렇게 해선 안 돼. 보통 사람이 아냐.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잖니."
"누나, 나하고 헤어진 게 열여섯 살 때야. 그 뒤에 내가 어떻게 살아온지 알아? 그런
새낀 한주먹으로 해치울 수 있어."
"안돼. 무슨 짓이고 할 사람야. 그렇게 출세한 것도 돈번 것도, 나를 몰아낸 것도 다
그의 계획대로 된 거야. 무서운 사람야. 너무 무서워."
"난 해낼 거야."
"안돼, 제발,정당한 수단을 써야 돼."
"물론이지."
목소리라서 새겨든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새끼가 어떤 새낀데...... 회사 돈 빼내는 데도 귀신 같은 놈인데..... . 나 얼마나 준지 아니?"
누나는 술에 취하자 용근이를 헐뜯기 시작했다. 마음 내키는대로 욕지거리도 했다.
"위자료 말야? 얼마 받았는지 아냐구? 내가 얼마 받았는지 말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흐으으...... ."
힘없이 웃는 얼굴 위로 증오의 빛이 떠돌았다.
"2백만원 주더라."
"2백만원!"
"그래, 2백만 원. 내가 처음 결혼하고 셋방
"그래서 그걸 받았어."
"받지 않고 어떻게 하니. 간통죄로 감옥에 앉았는데...... 변호사가 그러더라. 이혼 합의서에 도장 찍으면
취소해 준다고. 그래서 찍어줬어. 생각 같아선 감옥에서 평생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버티고 싶었지만."
은주누나가 감옥에서 풀려나오자 변호사가 2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고 했다.
변호사는 그러면서 그만큼 생각하는 남자도 없을 거라고 했단다.
간통한 부인을 석방시켜 주기 위해 뛰어다니고 이혼한 뒤에 충격을 줄이기 위해 여행이나 하라면서
2백만 원씩 주는 사내가 어디 있겠냐고 남편을 칭찬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말이었다.
"간통한 마누라에게 2백만 원씩이나 줄수 있겠니."
은주누나는 자조적으로 지껄였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계속 맥주를 마셨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잦아지더니 결국 은주 누나는 내게 매달려 울기 시작했다.
"내가 해결해 줄게. 이러지 마. 제발 정신 좀 차려."
나는 누나를 끌어안았다. 괜히 눈물이 흘렀다. 정말 얼마만에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울지 않고 살았다. 철이 나고부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눈물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형편없는 여자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누나,가자,어서 가자."
내게 매달려 겨우 걸었다.
"이거 너 가져라. 난 필요없어."2백만 원짜리 수표를 내민 누나의 팔목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나는 누나의 팔목에 입술을 대었다.
은주 누나가 늦게 들어오던 날 밥을 지어놓고 반찬을 만들다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누나는 내 손가락을 그렇게 빨아주었었다.하숙집 문턱에서 은주 누나는 완강히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나는 되돌아서서 가까운 여관으로 누나를 데리고 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반강제로 끌고 들어갔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누나를 범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랫목에 누운 누나는 울고 있었다.
흐트러진 치맛단 사이로 속치마가 보였고 훔치고 싶었다.옛날부터 갖고 싶던 누나였다.
누나를 끌어안고 자면서 언젠가는 내 것이 될 거라고 믿기도 했었다.
나는 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누나가 실눈을 뜨고 웃었다. 나도 웃어주었다.
누나는 금세 잠들어 버렸다. 이불을 덮어주자 한번 꿈틀거렸다. 치마를 여며주고 불을 껐다.
웃목에 앉아 나는 잠든 누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초췌했지만 예전처럼 예쁜 모습이었다.
갖고 싶었다. 아주 훔치고 싶었다. 그러나 난 누나를 훔칠 수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사랑했던
내 마음을 배신하기 싫은 고집이었다. 고통을 해결해 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이 밤이라도 용근이에게 달려가 앞뒤 따질것 없이 주먹으로 그의
음모와 술수를 털어놓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덕볼 게 없는 일이었다. 그만한 준비없이 연극을 꾸몄을 사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밤새 잠을 설쳤다. 나는 누나가 누워 있는 아랫목으로 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 마음속에 철조망을 치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 없었다. 난 누날 사랑했었다. 그 고운 사랑의 감정은
그대로 지켜나가고 싶었다. 괴롭지만 상쾌한 아침을 위해서.
햇살이 커튼을 뚫고 들어왔다. 누나의 평온하고 정숙한 모습이었다. 화장얼룩과 눈믈자국에서
나는 은주 누나의 한을 읽을 수 있었다.
누나는 눈을 떴다. 겸연쩍게 웃었다.
"누나 이제 정신 좀 났어?"
"으응. 내가 여기서 잤구나."
"술먹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미안하다."
"이젠 좀 어때?"
"조금은 후련하다. 네게 괜히 푸념만 했나부다."
"얘기 잘해 줬어. 나는 그 사람한테 응어리가 많은 놈이야."
은주 누나는 내 응어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누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누나와 결혼한 용근이가 미워했다는 것을
"술 먹은 날 아침엔 해장국으로 풀어야 돼."
우리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누나는 화장품으로 얼치기 세수를 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하숙집 아주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하숙방이지만 낯선 여자, 그것도 중년여인과 밤샘을 했다는 게 불쾌한 모양이었다.
"누나예요. 누나, 우리 주인 아줌마셔."
나는 정말 머쓱한 기분이 되었다. 누나도 겸연쩍은 눈길로 인사를 했다.
해장국을 한 그릇씩 비운 우리는 엊저녁에 못다 나눈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누나는 용근이와 가까운 여자의 주소와 환경을 자세히 얘기해 주었다. 처음에 아파트
해 주었던 병원에 대해서도 아는 데까지 얘기를 털어놓았다.
"누나,정말 결백한 거지?"
"내가 결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널 찾아올 수 있었겠니?"
걸찍한 목소리였다. 결혼한 후에는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누나의 처녀 때
성격으로 미루어 거짓말을 할 여자는 아니었다.
"누나도 악착같이 조사를 해봤을 거 아니겠어. 정관수술을 가짜로 했다는 병원 얘기며......
수술한 자리 보면 대충 얼마쯤 됐다는 걸 모르나?"
"나도 할 만큼은 해 봤어. 꼬리가 잡히지 않아. 잡힐 만큼 그 사람이 바보도 아니지만."
"있으면 죄다 얘기해 줘야 돼. 조그만 꼬투리가 단서일 수 있으니까. 가령 가까운 친구 가운데
이번 일을 아는 사람이 있다거나 누나에게 동정적인 그 쪽 집안식구가 있다거나 말야."
"없어. 그만큼 치밀한 사람이니까. 우리집에서 해볼 만큼 했지. 왜 가만 있었겠니?"
"만약 내가 매듭을 잘 풀었다고 가정해서...... 누난 어떻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거야."
"생각 같아서는 생매장하고 싶지만. 우리 윤정이나 찾아오고, 내가 부정한 여자가 아니고
농간에 넘어갔다는 거나 확실히 밝혀야겠지. 그런 사람은 사실 벌 받아도 싸."
남자 행세를 할 수 없게 만들어도 하나님이 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누나 원풀이 한번 해볼게."
그러면서 나는 수표를 누나 앞에 내밀었다.
"이건 네가 써. 난 돈 없어도 살 수 있는 여자야. 이번 일 해내려면 돈도 많이 필요할 거야."
"누나 날 뭘로 보구 이래."
"그 사람이 보통 아니라구 했잖니."
"난 필요없어. 이거 가지고 어디 여행이나 하구 와. 그나저나 하필 내게 부탁하는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사실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돈을 내밀어서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몇 번 신문에 난 기사를 읽었어. 그래서
"그럼 왜 이제사 연락했어. 그런 소식 들었을 때 연락않구?"
"가뜩이나 이혼하자구 해대고 하는데 무슨 정신으로...... 너라두 만났다간 대번에 날벼락이 칠 텐데......
넌 그 심정 모른다. 한 여자가 시집가서 살 만하니까 이혼하자고 할 때..... ."
은주 누나는 몸서리를 치듯 했다.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더러 지상에 내 이름이 떠돌 때가 있었다. 가엾은 여고생의 등록금 소매치기 사건이나
골동품의 밀반출 사건 때 내가 나서기 때문이었다.
"너만 믿고 갈게."
은주 누나는 힘없이 일어섰다. 나는 그런 누나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시험 준비를 하면서, 또 시험을 보면서 나는 줄기차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뽀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증거도 없이 무조건 잡아다가 더러운 행위를 털어놓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증거를 잡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기다리다가는 증거만 더 묻히게 할 수도 있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용근이가 좋아한 여자를 찾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 여자의 임신 여부나 그 여자의 입에서 어느 정도 증거가 될 만한 얘기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용근이가 자주 들랑거리는 술집부터 뒤지기 때문에 손쉽게 여자를 조달하기 위해서 자주
들랑거리는 술집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용근이를 접대한 적은 있었지만 술집 접대부들
자신이 먼저 방비를 했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여러날째 집요하게 용근이 뒤를 밟게 했다. 어딘가에 감춰 둔 여자가 있을 거라는
누나의 의견에 내 마음이 굳혀졌기 때문이다.이런 일일수록 그의 주변이나 측근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진행시켜야만 했다. 눈치빠른 그가 감쪽같이 증거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근무하는 회사의 소문을 들어보기 위해 나는 선배에게 부탁을 했다.
선배는 근무한 적이 있어서 비교적 상세히 용근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형, 그럼 좋아한 여직원이 혹시 없었는지 좀 알아봐 줘요. 만약 그런 사실도 없다고 하면
요 몇년 사이에 퇴직한 여직원, 적어도 대졸 이상의 학력이거나 괜찮은 집 딸들에 대해서 알아봐 줘요."
선배는 앞뒤 안 가리는 내 성깔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연조차 묻지 않고
내게 여자의 명단을 넘겨 주었다.나는 할 수 없이 애들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력이나 집안이 괜찮고 인물이 빼어난 여자들만을 골라 뒷조사를 시켰다.
예상 외로 내 작전은 자꾸 빗나가기만 흘러갔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만큼 여러 각도에서 치밀하게 조사를 해도 작은 구멍 한 개를 뚫을 수가 없었다.
"형, 비상수단을 써 보는 게 어때요?"
"무슨 비상수단이 있어."
"얘가 유괴된 것처럼 꾸며 보죠."
"그건 안돼. 아무리 그 자식을 때려 잡을 수가 없더라도 애를 장난 삼아서라도 그럴 순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 봐. 뭐든 있을거야."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갔다. 은주 누나는 몸이 달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너무 정직한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요.보름 가까이 됐는데 너무 도덕군자처럼 산다 말예요.
뭐 눈치 챈건 아닐까요."
내가 초조해 하는 것 이상 애들도 신경을
"할 수 없다. 정면 공격이다. 손 빠른 애들한테 수첩 빼오라구 해."
내 명령이 떨어진 뒤 불과 두어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그의 수첩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나는 수첩을 사진복사한 뒤에 다시 원상대로 용근이의 호주머니 속에 넣도록 했다.
수첩을 가지고 다시 우리는 다각적인 작전을 짜나갔다.
우리는 이튿날 밤에 C동으로 달려갔다. 아파트 단지가 운집한 C동은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용근이의 정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54평짜리 고급아파트에 그렇게 감쪽같이
여자를 숨겨놓고 살 거라는 건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다.
용근이는 수첩만 봐도 치밀한 사내였다.
결과 은성이란 요정이었고 대하주식회사는 대하홀이었다. 모든 게 그런 식으로 눈가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파트 철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누구냐고 확인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였다.
"이부장님께서 급히 이걸 전하라고 해서 왔습니다. 부장님 모시고 있는 미스터 장입니다."
문이 열렸다. 나는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찢어서 편지 내용을 읽는 여자의 눈빛에서
나는 제대로 찾아왔다는 실김이 났다. 물론 편지는 내가 타이프 쳐서 만든 가짜였다.
"다른 말씀 없으셨나요?"
상상한 것보다 훨씬 세련된 용모였다. 연락도 하지 마시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이 더 필요하시면 저보고 찾아다 드리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능청을 떨었다.
"일이 뭐, 잘못됐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부장님께서 다른말씀은 일체 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걱정하신다고요.
대신 저 보고 편히 모셔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보살펴 드리라고 했습니다."
"얘기해 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 ."
나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커피를 끓여 오고 옆에 앉아 애원하는
여자에게 마음이 약해진 척 이렇게 말했다.
"경찰에서 조사를 시작했나봐요. 그 여자가 부장님이 만약 정관수술을 엉터리로 한 뒤에
지난번에 한 것처럼 몰래 했다는 게 발각되거나 사모님이 기르시는 애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 나는 거죠. 그래서 애하고 사모님을 숨어 계시라는 거죠."
"그 여자가 그렇게 질긴가요. 위자료를 준다고 해도 뻗대고 그러더니......
어떻게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예요.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잖아요."
나는 아파트에 앉아서 능청스럽게 이용근 부장의 심복부하처럼 굴어서 몇 가지
결정적인 사실을 캐낼 수 있었다.은주 누나의 짐작대로였다. 용근이는 그 여자에게서
아들 두 명을 얻었고 아파트 추첨 때문에 뗀 증명서는 가짜였다는 게
몰래 정관수술을 했다는 심증이 굳어진 셈이었다.
내 교묘한 수단에 휘말린 여자는 만나게 된 동기부터 지금까지 몰래 살아온 고통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이제 떳떳하게 사나부다 싶었는데. 우리 사랑하면서도 이런 고통을 겪어요. 미스터
장은 결혼 안 해 봐서 우리 맘 잘 모를 거예요. 그인 사회적으로 이름이 난 분이고......
그러니까 더 어려워요."
"그러실 거예요. 가끔 부장님도 그런 말씀 하시곤 해요."
나는 여자를 안내하고 아파트에서 내려왔다.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여자와
이부장이 감춰놓은 아들을 태우고 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내 치밀한 작전대로 움직여 주었고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서울 근교의
호텔에 짐을 푼 여자는 내게 소식 자주 줄 것을 당부했다.
은주 누나는 내가 낚아올린 얘기를 듣고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이제 억울한 건 풀어지게 됐어. 이젠 어떻게 새 출발하느냐가 중요해."
"그래, 열심히 살게."
누나를 보낸 뒤에 나는 이튿날 이부장과의 신경전에서 솜씨를 보이기 의해 만반의 준비를 서둘렀다.
하나님, 지켜봤죠? 저런 사내가 있답니다. 아니 이 땅에 저런 사내보다 더 악랄한
여자의 일생만 망친 게 아닙니다. 회복할 수 없는 부정한 여자로 전락시켜 놓고 저 혼자만
신나게 살 궁리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일 나는 그 작자를 데려다 분이 풀릴 만큼 혼내 줄 참입니다.
부부가 한평생을 살면서 마음에 맞지 않아 이혼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있어 줘야 재미도 있는 거겠지만 이건 너무 했잖습니까. 두 눈 멀뚱히 뜨고 보고만 있어서야 됩니까.
하나님, 인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습니다. 제발 실력 발휘를 해주십쇼.
사람다운 사람들끼리 살 수 있게 말입니다.조그만 죄를 짓고 사는 거야 인지상정이니까
못본 척하는 게 하나님다운 것이지만 저런놈은 때려주십쇼.
용근이는 의젓한 동작으로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감옥에 가주셔야겠소. 가짜 정관수술 증명서 떼준 의사하고 함께 말요."
용근이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물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는지?"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는 책상을 내리쳤다. 서류뭉치가 굴러 떨어졌다.
"내가 장총찬이다. 너 같은 놈 때러잡으러 다니는 장총찬이다."
사무실이 발칵 뒤집혀졌다. 부장이 멱살잡혀 끌려 나가는 걸 말리려 들지도 않았다.
"여러분, 이 새끼가 즈이 마누라를 부정한 정관수술을 가짜로 해줬다고 자백한 의사가
있습니다. 또 숨겨놓은 여자가 아들을 떡두꺼비처럼 낳아서 잘 키우고 있습니다.
54평짜리 아파트도 사줬구요. 이 회사 경리장부를 한번 정밀 검사해 보십시오."
나는 되는대로 큰소리를 치고 사내를 끌고 나왔다.
경찰서에 넘길 사내를 때릴 수가 없었다. 웬만큼 마음이 넓은 척하던 나도 이번만은
경찰에 넘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전처럼 따끔한 맛을 보여 줘서 해결할 수가 없었다.
불쌍한 은주 누나의 죄명을 벗겨주기 위해선 사내의 죄를 법정에서 벗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의 의사도 자신의 위증을 인정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나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실컷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히 은주 누나에 대한 복수심만은 아니었다.
내 어렸을 때의 감정도 포함된 것이었다.
한 여자의 단물을 다 빼먹고 출세하자 그 여자를 부정한 여자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는
철면피한. 나는 울분을 삭이며 그를 경찰에 넘겼다.
조사가 끝나자 누나는 죄명을, 그 억울한 죄명을 공개적으로 벗게 되었다. 신문과
방송으로 용근이의 치졸한 죄악상이 공개되었고 회사에서는 그의 공금 유용과 횡령을 밝혀 내었다.
또한 가엾은 여자가 곤경을 당하는데도 끝까지 의사라는 신분과 위신을 내세워 정관수술을 자기 손으로 직접
시술했다고 고집하던 의사도 구속되었다.용근이의 재산은 거의 모두 은주 누나에게
용근이에게 속아 살아온 여자에게 주었다.
"윤정이하고 그 여자가 낳은 애들을 내가 맡아 키우기로 했다. 내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시킬 거야."
은주 누나는 이렇게 말했다. 용근이를 믿고 살던 젊은 여자는 애들을 고아원에 맡기겠다고 했다.
은주 누나가 그 애들을 자기 자식으로 삼는 것을 나는 기쁘게 찬성했다.
"그러다가 데려갈 남자가 없으면 어쩌려고. 자신 있어?"
"그럼 혼자 살지 머. 재산으로 남 돕는 사업이나 찾아보겠어. 네가 좀 도와줘."
은주 누나와 나는 밤늦게까지 지난 얘기만 했다.
내게 미치도록 아름다웠던 과거를 쉼없이 우리는 쏟아놓았다.
누나와 나는 그날 밤, 모처럼 정말 모처럼 옛날같이 팔을 베고 잠들 수 있었다.
첫댓글 소설속에 감추어진 생각까지 하면서 잘 읽고 갑니다....물안개님 계속 수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답한일이 있는데 그나마 소설을 읽으며 속풀이를 합니다~!!고맙게 잘봤읍니다!!
잘 보았습니다,,,^^^
잘 읽고갑니다~~
감동.....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