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3세기와 4세기에 걸쳐 동아시아는 혼란과 분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중국은 진(晋)이 삼국시대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룩하였으나 흉노의 침입으로 남하하여 동진을 세우고 남북조 시대가 시작된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키면서 급성장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도 제각기 힘을 키우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유일하게 일본의 정치적인 상황을 전하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8세기 초에 편찬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거하여 3세기말경에 야마토 조정이 일본을 통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적 사실로써의 근거는 아주 미약하다. 이렇게 사료의 신빙성이 없을 경우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하여 그 여백을 메울 수 밖에 없다. 3~5세기의 시대에 일본열도의 풍부한 고분의 존재는 당시의 시대상을 살피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러한 고분문화를 통하여 그러한 고분 속에 숨겨진 역사적 반영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고분의 형식과 부장 유물
이전 시대에도 고인돌, 석관묘, 옹관묘, 적석묘 등의 매장시설은 있었다. 그러나 흔히 고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상에다 높다랗게 흙을 쌓아서 분묘 형식을 만든 고총식(高塚式)고분이다.
이같은 형식의 고분들은 보통 4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는데, 봉토의 형식에 따라서 원분(圓墳), 방분(方墳),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전방후원분은 제일 규모가 크며 전형적이고 보편적인 양식으로서 현재 약 2600여기가 발견되었다. 이 고분은 일반열도 내의 독특한 양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보이는 등으로 보아서 그 원류가 북방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그 엄청난 크기나 모양의 특이성 등으로 인하여 관심을 끌고 있으며 대체로 천황릉으로 불리워진다. 직경이 300m 이상 되는 전방후원분이 적지 않은데 고분이 큰 이유는 내부적으로 인민을 통제하고 외부적으로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뒤쪽의 원형부분에는 시신을 안치했고, 앞쪽의 평평한 부분은 제사지낼 때 제단으로 이용된 듯하다. 원분 꼭대기나 방분 꼭대기의 중심부에는 집 모양의 하니와를 세워놓고, 그 주변에는 사람이나 말, 또는 원통이나 항아리형의 하니와를 세워 놓았다.
하니와(墳輪)는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으로서 무덤의 주위에서 피장자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때로는 장송의식을 재현하고, 매장 당시의 모습 등을 그대로 남겨 일상생활, 매장방식, 문화형태 그리고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인물, 기마상 등의 하니와를 통해서는 당시 무사들이 사용한 무구와 의복 내지 전투력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집모양을 통해서는 당시의 주거형태를, 배모양을 통해서는 선박의 발달을, 악기모양을 통해서는 당시의 음악문화를 알 수 있다.
초기에는 원분(圓墳) 부분에다 수혈식 석실을 만들고 목관과 부장품들을 넣었다. 후기로 가면서 점차 횡혈식 석실과 함형 석관이 사용된다. 횡혈식 석실은 돌을 둥글게 안으로 쌓아 올려서 안으로 통하는 연도를 옆으로 파고 그 깊숙이에는 죽은 자를 안치하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 놓았다.
매장시설은 장대한 목관을 사용했으며. 뒤이어 상자형 석관을 사용했다. 석관의 종류는 다양하여 상자형, 집모양 외에도 長持形, 배형, 대나무 쪼갠형 등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도기로 만든 도관도 사용됐다.
고분 내에는 죽은 자를 위하여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이나 매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특수한 물건들을 집어넣어Te. 부장품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피장자의 신분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므로 해당 고분의 문화적 성격을 알 수가 있다.
부장품의 내용을 보면 지배집단의 성격이 완연히 변화하는 것이 나타나는데 전기에는 거울, 칼, 구슬 등 주술적이거나 보기적(寶器的)인 것이 많이 출토된다. 당시의 사회가 생산력이 약하고 정치권력이 공고하지 못했으며, 정치의 수장이 종교적 성격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요이의 전통을 유습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이러한 주술적인 성격은 고분시대에서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왕권의 성격은 달라졌어도 신성성은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신화에서 나오는 삼종신기(三種神器)나 아직도 일본천황가가 모시고 있는 삼종의 신기는 야요이 전통에서부터 전기 고분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후기에 가까워지면서 부장품의 내용은 달라진다. 즉 죽은 후의 생활을 위한 생활용품이나 그 모조품 등이 많이 출토된다. 예를 들면 청동거울이 감소된 대신 철제검 등의 철제무기나 갑주, 철제 단갑 등이 격증한다. 또한 금·은세공에 의한 금동관, 금동제 신발, 팔찌, 목걸이 등의 장신구, 철제 농공구, 그리고 호부적 성격을 가진 곡옥 등이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특징적인 각종의 무기와 마구가 나타난다.
이처럼 문화관의 변화를 보여주는 당시의 부장품은 피장자의 성격이 정복적인 기마문화와 관련이 있으며,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복적인 성격을 가진 중기 이후의 피장자들은 분명히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했거나 아니면 한륙도에서 직접 건너온 기마집단의 한 분파일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후나야마 고분에서는 금동관, 대소 칼 14자루 등이 발견되었으며, 사이타마현의 이나리야마 고분에서는 철검, 후꾸이현의 二本松山에서는 독특한 금동제관 등이 발굴되었다. 지배계급들은 수입되거나 직접 만든 금동관이나 금으로 장식한 칼 등을 차고 위엄을 부리며 인민을 지배하고, 밖으로는 대량생산한 철제무기들을 사용해서 정복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면서 주변세력을 복속시켜 나갔다.
이처럼 전방후원분은 당시를 대표하는 고분양식으로서 일본열도가 정치·문화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6세기에 들어서면서 전방후원분은 점점 적어지면서 방분으로 변화된다. 고분문화가 퇴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치를 주도하는 집단의 성격이 변화하는 것이다.
한편 6세기 초부터 축조된 장식 고분은 현실 내부에 벽화가 그려진 특이한 고분이다. 촉의 고분은 후꾸오까, 구마모도의 유명해와 가까운 지역이나 강을 통해 내륙으로 연결된 곳에 많다. 그러나 중기 이후에는 오히려 돗도리현에 많이 축조된다. 이 고분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전국적으로 89기가 발견되었는데, 특히 배와 관련된 그림이 많이 발견된다.
Ⅲ. 고분문화의 시기구분과 역사적 반영
고분문화는 불고의 도입을 게기로 질적으로 다른 두 시기로 구분된다. 불교의 수용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6세기 중엽으로 인정된다. 불교의 수용 이전과 이후의 일본열도는 신앙형태와 논리구조는 물론 외적으로 드러나는 문화형태까지도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고분문화의 담당자나 축조한 사람들의 정치·문화적 성격도 다르므로 시기 구분 역시 불교의 도입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눈다. 그러나 특징을 좀더 세분화시켜 구분할 경우에는 3시기로 나눈다. 시기적으로나 문화의 양 및 질로 볼 때 흔히 이해하는 고분문화는 전기 혹은 중기에 해당하며, 고대국가의 형성이 격력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는 중기에 해당된다.
ⅰ) 전기 : 3~4세기
이 시기는 난립했던 소국 시대가 점차 극복돼가면서 정치집단의 규모가 커지는 시기이다. 백제세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선주민과 이 시기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기마군단을 중심으로 고대국가를 형성해가는 초기 단계이다. 이 시기의 고분은 주로 큐우슈우 북부지역이나 세도 내해 연안에서 키나이 지방에 걸쳐 축조가 되었다. 이는 서부 일본의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세력이 성장해 간 사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일본지역에 야마토 정권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거대한 통일왕권의 성립으로 보기는 어렵다. 단지 부장품에 제사용기다 많은 것은 당시의 수장이 정치적 지배자임과 동시에 사제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전방후원분, 원분 등이 구릉위 등에 축조되었고 무덤 주위에는 하니와들이 나타나나 발달하지는 못했다. 또한 발굴되는 부장품은 거울이나 옥, 하찌기(土師器) 등 제사의례적인 것과 검, 화살촉 등의 철제무기, 그리고 철제 농공구 등이다.
ⅱ) 중기 : 4~5세기
이 시기는 고분문화가 꽃피우는 시기로서 고분이 넓게 보급된다. 이 시기에는 기마민을 중심으로 정복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한륙도에서도 정치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해 온다. 고분의 종류로는 역시 전방후원분, 원분들이 있으며, 점차 대형화되고. 주변에는 호를 두른 형태로 변화가 된다. 매장법은 아직도 수혈식이지만 원시적인 관의 형태를 벗어나 긴 함형의 석관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고분문화의 성격변화는 특히 부장품의 내용에서 확연히 달라진다. 전기의 부장품들은 주술적이고 사제적인 성격인데 반하여, 이 시기의 것들은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동경, 옥제품 등 외에도 관, 무기, 갑주 등의 문구가 출토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피장자의 성격이 바뀌었거나 말과 관련된 신문화가 수입되었음을 시사한다. 특히 부장품의 내용이 한륙도의 것과 유사한 것은 수입된 신문화가 한륙도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무덤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지고, 무덤의 주위에는 인물이나 동물, 혹은 집 모양의 하나와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 위엄과 권위를 더해준다. 닌도꾸 천황릉으로 알려진 다이세이 고분, 미야자키에 있는 사이도바로 고분군, 아까야마의 스꾸리야마 고분 등은 이 시대의 산문이다. 이 고분들은 모두 대형 고분들로서 특히 다이세이 천황릉은 전장의 길이가 486m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고분이다.
또한 중기에 거대한 고분이 대략 축조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시기에 야마토 조정의 통일왕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기 고분은 방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왕권이 성립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5세기를 통하여 고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은 야마토 조정의 지배가 확대되면서 각지의 호족들이 지방관으로서 그 지배 하에 편입되어 갔음을 반영해주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ⅲ) 후기 : 6~7세기
이 시기에는 백제계 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그 문화 및 불교를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대중국 교섭 등을 활발히 하면서 고대국가를 확립해가는 시기이다.
이 때가 되면 이미 고분이 전국적으로 만들어진다. 고분의 전국적인 분포는 고분문화의 전반적인 보급과 함게 고분축조 능력을 가진 정치집단의 성장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을 의미한다. 즉 일본열도의 개척이 서부 일본이라는 한정된 지역을 벗어나 광범위화하는 것을 의미하고 열도 중심으로 질서가 편성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고분의 종류는 점차 다양해진다. 이 시기의 고분으로는 전방후원분, 원분을 비롯해 방분, 횡혈묘군 등이 있다. 고분의 숫자가 늘어나고 고분 축조능력 집단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고분의 규모는 축소되는 대신 다양한 형태로 변화한다.
매장법은 수혈식에서 횡혈식으로 바뀌어가고 종래의 석관 대신에 도기로 만든 도관이나 집모양 석관들이 사용된다. 그리고 장식 고분도 있는데 주술적이고 제사적 성격을 띤다. 메즈라사키총과 왕총 등에는 채색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특히 다께하라 고분에는 선박과 하늘을 나는 말, 그리고 둥근 잎을 가진 나무가 주술적인 색채와 분위기로 그러져 있다. 아스까에 있는 다카마쓰고분은 7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덤 내부에 고구려식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부장품들은 중기에 비해서 보다 전투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을 보인다. 금은 공예 장신구들을 비롯해서 무기, 무구, 마구류 등의 전투적인 것들, 그리고 하찌끼, 수에끼 등의 토기들이 있다. 중기의 고분들에는 하니와들이 열석처럼 있는데 반하여 이 시기에는 하니와들이 점차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후 7~8세기에 걸쳐 고분은 거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 원인 중의 하나는 야마토 조정의 중앙집권정책이 급속하게 진전되기 시작하면서 지방 호족들이 그 자립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6세기 중엽에 들어온 불교문화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화장의 풍습이 시작된 것도 하나의 원인인 것이다. 고분이 소멸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의 고대사에 대해서 그 윤곽을 잡을 수 있는 기록된 사료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Ⅳ. 고분문화의 의의
이렇게 고분의 형태, 부장품, 그리고 축조지역 등을 통해서 고분문화가 가진 일반적 성격과 정치역학 관계들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이것을 정리하여 그 의의를 보면은 첫째, 고분이 축조되고 성행한 시기는 대체로 4세기에서 5세기를 거쳐 6세기까지이다. 특히 전장 400m가 넘는 전방후원분들인 오진, 닌도쿠 천황릉은 그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정치집단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또한 이들은 기층민중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조직, 즉 국가형태를 이룩했음을 알려준다. 즉 고대국가의 기틀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둘째, 전방후원분들은 키나이 지방에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으며, 실제로 규모가 큰 것들은 대부분 이 지역에 있다. 그러나 큐우슈우, 오까야마현, 시마네현 등에도 고분군들이 밀집되어 있어, 이들 지역에도 키나이 지역에 필적할 만한 또 다른 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축조시기로 보아서는 북큐슈와 이즈모 등에서 시작하여 점차 키나이로 들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셋째, 고분의 축조한 집단의 성격문제이다. 고분은 외부의 진출자들, 즉 한륙도로부터 진출해온 집단들이 정착한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또한 주로 해안과 가까운 평야지대에 밀집되어 있어 고분축조 집단이 외래진출자임을 알려준다. 따라서 한륙도 각국의 문화적 특성이 각 지역의 고분 형태나 부장품에 표현되어 있다.
넷째,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점차 금·은 장식품과 철제 무구가 많아지고 있으며 특히 5세기 경에 이르면 기마민족과 관련된 유물들이 급격히 증가한다. 고분과 관련된 유물들은 한륙도에서 제작기술이 전해진 것이거나 직접 만들어진 것이 많이 지배세력이 한륙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Ⅴ. 결론
결론적으로 당시의 고분들은 그 시대가 생산력과 함께 산업이 발달하고 왕권이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분의 지나친 대형화와 각 지방 세력간의 경쟁적 축조는 통일정권이 없이 몇 개의 국가들이 격렬하게 질서 재편 작업을 하는 일본열도의 진통과정과 함께 힘의 중심축이 야마도(大和)로 점차 모아지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신화에 나오는 건국과정과 짐무동정신화는 바로 이러한 고분시대의 격렬한 사회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고분축조의 담당자들, 피장자들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기마문화와 관련이 있으며 한륙도 세력과 직접 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같은 결론은 4~6c 사이의 장치 사정과 한륙도와 일본열도와의 관계, 정치·문화적 성격을 규명하는데 몇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임나일본부설, 기마민족정복국가설, 왜·한연합왕국설, 삼한분국설, 또 광개토대왕릉비문의 해석, 칠지도 문제 등은 다 이 시기와 관련이 있는 사건들이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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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 교양학부 일본사연구소 편저, 『日本史槪設』, 지영사, 1994
홍윤기, 『일본문화사』, 서문당, 1999
박동석 外, 『일본의 역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 좋은날, 1999
박화진·김병두, 『일본 문화 속으로』, 일본어뱅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