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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예당님의 보경사 안내 활동 시연 내용이고, 여기에 붉은색으로 저의 수정 제안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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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시연했던 자료입니다. 강호진선생님의 음성을 녹음하여 재구성하였는데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조금 바뀐 부분도 있을 겁니다. 보경사가 점점 새로워져서요.
보경사 종각에서부터입니다.
이 종각은 지붕을 한 번 보십시오. 여덟팔자라고 해서 팔작지붕입니다.
여기는 사물이 있는데요, 보통 사물놀이 할 때 사물이라고 하면 무얼 말합니까?
북, 장고, 징, 꽹가리를 말하죠. 여기서는 제일 위에 법고, 북입니다. 그 옆에 구름처럼 생겼다고 해서 운판, 옆에 나무로 만든 목어, 밑에 범종 이렇게 있습니다.
북은 법고라고 부릅니다. 노래가사에 쇠북소리라고 하는데 그것은 쇠로 만든 북이 아니고 소가죽으로 만든 북이에요. 쇠북이라는 말은 한자 종(鐘 또는 鍾)의 우리말입니다. 이 소가죽은 절에서 만들 때는 원칙이 한쪽 면은 암소(음), 한쪽 면은 수소(양), 그래야 조화롭게 잘 나온다고 합니다. 절에서 시간을 내서 아침이나 저녁예불 시간에 법고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면 환상적입니다.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죠.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템플스테이라고 해서 절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제일 인상깊은게 법고 두드리는 소리에 매료된다고 합니다.
이 법고를 두드릴 때도 양손으로 心자를 그리며 두드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들어보면 길고 짧고 빠르고 늦고, 크고 작고 이렇게 들립니다.
사이에 운판 보이시죠. 이 운판은 보통 청동으로 만드는데 쇠소리가 납니다. 중국같은 경우에는 밥시간이나 모이라고 할 때 두드립니다. 구름문양이라고 해서 운판입니다.
아이들과 같이 오면 그런 질문 많이 할 꺼예요. “선생님, 절에 왜 고기를 걸어 놨습니까?” 그러면 그 옆의 아이가 “야, 스님들은 고기를 못 드시니까 그거라도 보라고 걸어놨다”하는데, 그게 아니고 저게 목어인데요, 이게 악긴데 배가 중간에 비어져 있습니다. 그 속에 두 개의 막대를 들고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데요, 이 목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냐면 설화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법명이 높은 스님이 제자들을 불렀는데 늘 말을 안 듣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제자가 병이 들어 일찍 죽었답니다. 그 제자가 죽어서 고기로 태어났는데 고기 등에 나무가 자라서 파도가 치거나 하면 늘 고통스러웠답니다.
고기가 한 번은 그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물고기 한마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더랍니다.
가만히 보니 그 제자더래요. 그래서 그래도 제자인데 해서 수륙제(수륙재)를 지냈답니다. 제(재)를 지내서 편안하게 생을 마치고 다음생에는 좋은 걸로 태어나라고 했는데, 다음에 그 제자가 꿈에 나타나 정말 고맙습니다 하며 다시는 나같은 놈이 나오지 않게 자기 등의 나무를 잘라 경계로 삼으십사하여 만든것이 목어입니다.
저걸 휴대용으로 바꾼 것이 목탁입니다. 목탁을 보면 입이 크게 찢어져 있고 양쪽에 눈이 있고 꼬리가 손잡이입니다.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목탁이라고 안 그러고 목어라고 합니다.
법고라고 하는 북은 네발달린 짐승들을 위해서 두드려 주는 겁니다.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새들, 목어는 물 속에 사는 중생들, 여기에 종은 죽은 영혼들을 위해 울려주는 겁니다.
종의 차이는 이 종은 음통이 있어서 전형적인 한국 종입니다.
저 종은 음통이 없어서 우리종이 아닌것이 아니고 신라가 쇠망하며 고려로 넘어가면서 고려시대(조선후기)에 유명한 기능장인 사인비구가 전국에 만든 종이 8개가 있는데 8개가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만든 종이 서운암에 걸려있던 종으로 (조선시대 자인현, 현재 경산의 구룡산 반룡사 종입니다. 언젠가 보경사로 들어와 공양간에서 시간 알리는 용도로 쓰이다가 전문가에게 발견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등록 이름으로 왜 서운암동종이라고 하였는지 모르겠다.) 보물 11-1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종의 위쪽을 보면 굉장히 박력있고 힘있게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 동종을 보면 상당히 약해요.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음관이 축소화 되고 그러다가 조선조나 고려말 때 우리것이 사라져 가고 용이 두 마리가 됩니다. 종을 거는 용뉴에 있는 이 동물은 포뢰라는 전설속의 동물인데 고래를 무서워해서 고래가 째려보기만 해도 엉엉 운다고 합니다. 용의 일종인데 바닷가에 나와서 우는 소리가 마치 종이 울리듯이 웅웅 운다고 합니다. 이 포뢰가 가장 무서워 하는게 뭐라고 했습니까“ 고래라고 했죠.
종각의 종을 치는 당목입니다. 처음에는 이 당목을 고래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앞에 고래모양으로 만들어서 안 그래도 잘 우는데 얼마나 잘 울겠습니까?
저 음관이 종의 내부와 통해져 있는데 중국이나 일본 종은 저런식의 음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치면 안과 밖의 소리가 단절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종은 치고 난 뒤에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밑에 바닥이 있잖아요. 바닥에 깔리고 위에 있는 저 음통을 통해서 소리가 안에서 싸이클이 몇 번 휘돌려 치다가 빠져 나오기 때문에 여운이 아주 길게 남습니다. 그래서 음관이 있으면 신라종, 한국종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신라종 중에서 지금 일본에 5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 상원사에 있고, 가장 큰 종이 경주 박물관의 성덕대왕 신종이고, 몇 군데 파편이 남아있고 그런데 일본에 있는 종이 참 예뻐요. 대부분 고려말 혼란기때 가져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와 하대가 있는데 상대는 종 위에 부분하고 종 몸하고 연결부분에 단단하게 하기 위해, 하대는 소리를 여미기 위해, 여기에 보시면 네모칸 안에 연꽃모양이 9개가 있는데, 젖꼭지 모양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두라고 합니다. 유두를 싸고 있는 것을 유곽이라고 합니다. 여기의 글이 종명이라고 해서 종을 만들게 된 내력이 쓰여 있구요, 옆에 보시면 코리안 엔젤입니다. 천사상이죠. 비천상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재밌는게 이 종을 치면 부처님의 말씀이 중생들에게 전파되어서 환희에 차서 기뻐할 것이다. 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보살상이나 여래상으로 바뀌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문화의 차이라는 것이 즐기고 여유있던 것이 경직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치는 부분을 당좌라고 하는데, 양 쪽에 있습니다. 포뢰가 고리 기능을 하는데 포뢰가 종을 꽉 물고 발톱을 지탱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는 대웅전입니다. 추녀끝의 귀솟음 부분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 기둥은 뭐냐면 활주라고 합니다. 이 기둥이 없으면 지붕이 무겁기 때문에 지붕을 받쳐주는 역할를 합니다. 활동한다고 할 때 활입니다. 습기가 차기 때문에 저 부분을 갈아주는데 전체를 다 가는 것이 아니고 밑부분만 갈아줍니다. 그걸 지붕 신 신긴다고 합니다.
부석사에 가 보시면 올라가는 계단이 108개입니다. 그래서 108번뇌라고 하는데, 과거번뇌 36, 현재 36, 미래 36. (6근X6경X3(과거 현재 미래)?)
불상 위에는 닫집이 있고, 뒤에 보시면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탱화(불화)라고 합니다. 탱화를 그리는 사람을 금어(金魚, 양공良工, 화원畵員이라고도 함)라고 하고, 화주는 주로 보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천왕문의 창건과 중건, 사천왕상, 천왕문, 내연산, 보경사 3점의 현판,
적광전 비로자나후불도는 특히 중요하고 아름답기에 설명을 잘 해야 한다.
한국불화명품선집의 표지화,
후불도의 존상 명칭과 보현, 문수, 대세지, 관음 보살과 비로자나불의 배치 이유.
보현보살 지물이 도교 문화인 영지버섯인 이유. 등등.
적광전 비로자나불 삼존상도 보물 지정 신청 중인데 10세기경까지 올라간다.
적광전 비로자나불 삼존상의 석연화좌대, 바닥의 전돌, 목책,
적광전, 사천왕문 신방목(둔퇴목 환조 사자), 적광전 옥돌 신방석, 고막이돌, 주춧돌,
금당 5층석탑의 자물쇠와 문고리 문양, 고탑의 존재, 5층석탑의 조성 시기,
탑 앞의 9세기 신라시대 양식의 석등 하대석, 간주석,
적광전 옆의 원조루 누각,
적광전(금당, 화엄종 사찰)-지장전(현재 대웅전 자리)-관음각(현재 팔상전 자리)의 가람배치가
숙종(숙종 어필 목판)에서 영조 시기에 현재와 같은 가람이 조성되었다.
대웅전의 18세기 조성 후불도가 1983년에 도난당함
대웅전 석가불삼존상에 특이하게 과거(제화갈라보살), 현재(석가불), 미래(미륵보살)의 3세불.
보물인 괘불.
주춧돌을 자연석을 사용하여 기둥을 세웠습니다.
비사리 구시-이것은 구시라고 하는데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밥통으로 사용합니다. 쌀 7가마(4000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습니다. (현재 안내문은 송광사 안내문을 그대로 베낀 것. 밥통이 아니고 닥나무 섬유를 만들 때 사용하던 지통(물을 채우고 표백, 불순물 고르기, 섬유 풀기-해리, 닥풀 넣기 작업 과정).
지통은 송광사, 통도사, 경남 고성 옥천사, 범어사, 석남사 등 닥나무 생육조건이 좋은 영호남의 대찰들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국가 관청에 사찰들은 종이를 만들어 세금으로 종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물품을 공납하여야 했기 때문에 사찰들의 부담이 아주 컸다. 지통(구유통, 구시통, 조槽)은 문화사(종이 제작 기술과 과학, 공예, 인쇄, 제책, 기록문화), 사원경제사 관련 유물이다. 재질은 관목인 싸리나무가 아니고, 느티나무 같은 교목이다.
절 입구에는 당간지주가 있는데 이것은 괘불걸이입니다. 괘불이 뭐냐면 큰 불화를 내어서 저 위에까지 펼쳐서 날 좋은 봄날 밖에서 모임을 야단법석이라고 들어봤죠. 그 때하는 괘불걸이입니다. 이 괘불은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보경사 괘불의 조성시기, 규모, 화원, 시주자 등 화기를 바탕으로 하는 설명이 있어야 하고, 괘불 꿰도 문화재이다.
원진국사비입니다. 고려고종때 국사는 고려시대에 왕사 국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국사는 추증하기도 하고, 실제 현재 계시기도 한데 원진국사는 추증된 겁니다.
이 절에 오래 계셨고, 팔공산 동화사에 암자에도 계셨습니다.
원진국사의 생애와 시대 상황, 한국불교사의 위치와 공헌, 진각국사 혜심
비문의 첫머리 읽어주기와 설명
비석의 형태와 테두리의 연화당초문, 고려 국제적, 귀족적, 불교적인 문화
비석 표면의 긁힌 사설 자국
원진국사의 승탑, 원진국사와 청련암의 창건, 원진국사가 호환을 당한 보경사의 전설과 그 의미 등
보통 비에 보면 비석받침을 거북 귀자를 써서 귀부라고 합니다. 귀부 위에 등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우고 비석 전체를 보호해 주는 뚜껑 돌이 있습니다. 이걸 이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경주 무열왕릉의 귀부가 가장 예쁩니다. 당당하고 흠잡을 때가 없습니다. 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있습니다.
이걸 보시면 거북이입니까? 용머리에 거북이 몸을 하고 있죠. 등껍질에 보시면 임금왕자를 죽 써(새겨)놨습니다.(왜 임금 왕자를 새겼지요? 왕으로부터 시호를 받고, 왕의 예우를 받은 국사이고 왕사였기 때문에 그 품격을 나타낸 것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고려시대 국사들의 비석에 비하면 귀부가 좀 옹졸하지요.) 신라 때는 거북이 한 마리가 비석을 잘 받들고 있었는데, 통일신라시대 후대에 접어들면서 거북머리(거북이, 머리 둘 달린 이상한 거북이가 아니다. 2마리가 나란히 있는 쌍귀부)가 1마리가 2마리로 바뀌고 점차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거북머리가 점차 용머리로 바뀌어집니다. 신라 하대에 나타나는 쌍귀부는 왕실 원당 사찰이기에 그 품격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요. 법광사의 쌍귀부처럼요.
이게 문화와도 관계가 있는데, 거북이가 쥐고 있어도 비를 잘 보호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하는데 그 당당함이 신라 하대로 넘어가면서 자꾸 무섭게 해야되지 않습니까! (신라하대로 가면서 왜 무섭게 해야되는지를 말하여야 한다. 실제여부와 관계없이 일방적인 표현이다.)그렇게 허장성세가 나타는 거예요. 그것이 고체화 된 것이(굳어진) 고려시대로 넘어가면서 용머리로 바뀝니다. 이에 물고 있는 거라든지 발에 잡고 있는 여의주가 있고, 상량문에 보면 계주 이름 쓰고 용용자와 거북귀자를 씁니다. (상량문에 용과 귀자 쓴 것은 건물이 삿된 기운이 들지 못하고 상서롭고 튼튼하고 오래가라는 뜻이겠지요.)
여기는 명부전이거든요. 죽은 사람을 위한 지장보살이 있고 10명의 왕이 있어 10왕전(읽을 때는 시왕전이라 하고, 10왕이 누군지 물으면 답해야 하겠지요)이라고 합니다. 염라대왕도 10왕중 한명입니다. 염라대왕은 책을 들고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정말로 책을 들고 있나요. 그 앞의 판관이 아닌가요?)
여기서 사람 죽고난 뒤에 재판과정이 잘했다 못했다 선악을 따지고 벌을 내리고 죄의 역량을 따지는데 49일이 걸립니다. 절에서 49제(불교에서는 각종 의식을 한자로 제祭라하지 않고 한자로 재齋라고 합니다. 49재, 천도재, 추천재, 수륙재, 기신재, 영산재 등)를 지내는 것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지장보살은 부처가 안되고 끝까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사셨기 때문에 승려의 복장을 하고, 사람의 생로병사에 종착점이 죽음 아닙니까? 죽음과 관계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장보살본원경의 내용을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지장보살은 일체의 모든 중생이 구원될 때까지 성불을 미루었지요. 주로 망자들을 지옥에서 구원하는 근본 서원을 실천하는 보살이지요. 할머니들 절에 오시면 법당에 갔다고 아무리 바빠도 여기 들렸다가 향꼽고 절하고 나서 어디 가느냐면 산신각을 꼭 들릅니다.
영산전의 영산은 영취산(발음을 영축산이라고 해도 됩니다. 줄여서 영산. 불교에서는 복모음이나 격음은 꺼립니다. 염불, 독경, 예불, 기도 등을 할 때 스님들의 음성이 아주 부드럽고 편안하게 들리도록 하려는 이유입니다. 약간의 콧소리도 넣지요. 영축산을 인도말로 그리드라쿠타라고 하는데 소리로 옮겨서 기사굴산, 줄여서 사굴산, 굴산이라고 하고 뜻으로 옮기면 신령스런 독수리가 서식하는 산. 인도 라즈기르, 왕사성 교외에 있고, 대승경전의 왕이라고 하는, 석가불의 3승1불의 설법이 펼쳐지는 법화경의 무대. 불국사 대웅전, 석가탑, 다보탑 가람도 법화경 설법 장면 표현. 대웅전 석가후불도인 영산회상도. 우리 음악에 영산회상.)을 줄인 말인데 석가모니가 제자들에게 설법을 한 곳입니다. 영취산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곳이 통도사 뒷산이 취서산이라고 하는데 영취산이라고도 합니다. 봉화에 가면 축서사도 있습니다.
복전함이 있잖아요. 복복자에 밭전자라고. 복은 우리가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을 만들어야 되고 갈아야 되고 심고 해야 되는 거라고.
거지들이 할 때 ‘한푼 줍쇼’라고 하잖아요. 적선하라고 하죠. 떳떳한 거지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적선을 권합니다. 좋은 일 하시고 좋은데 가라고.
원진각이라고 하는데 진영각이라고도 하고 영각이라고도 합니다. 부석사에 가면 조사당이라고 있잖아요. 스님들의 영정이 있죠. 스님들의 영정을 모시고 스님들을 추모하는 일종의 사당입니다. 넋을 기리기 위해 있습니다.
산신각은 산신령을 위한 공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보통 절이 산에 있기 때문에 산의 터주인 산신에 대한 배려고, 다른 나라에는 산신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와 재래 종교인 산악 숭배하고 하나의 배려하는 공간입니다. 그림에 보면 호랑이 그림이 있는데, 호랑이와 산신을 동격으로 봅니다. 산신각은 몸이 안 좋은 사람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 산신각(산령각)에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나요? 몸이 안 좋은 사람이 산신각에 기도하여 몸을 좋게 하려고 하는 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호랑이가 살 수 있을 정도의 깊고 웅장한 산의 생태계가 가지고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한자로 산신, 산령이라고 하고, 산의 에너지는 결국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범의 몸에 응축됩니다. 그러니까 신령스러운 산의 기운을 의인화하면 산신령이 되고, 동물로 표현하면 범이 되겠지요. 호랑이보다 범이 정확하고 순 우리말이라서 좋아요. 산신각이 언제부터 사찰 경내로 들어오는지 아시는지요? 제가 알기로는 조선후기입니다.
팔상전입니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개의 그림으로 그려서 모셔놓은 곳입니다.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보경사 팔상도 원본은 듣기로는 서울 조계사 옆의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 대여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조품이긴 하지만 팔상도의 그림 내용, 조성시기, 조성 주체, 조성 화원 등에 대한 지식과 정보도 알고 계시면 좋겠지요.
서운암동종-고려(조선후기인데 조성연대를 알고 있어야)동종입니다. 이 종은 사인 스님이 7개의 종을 만들었느데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보물 제 11-1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부도-원진국사부도인데요. 원진국사가 열반에 드시고 3년뒤에 이 곳에 모셔졌습니다. 보물 제 43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부도라고 하지말고, 승탑이라고 해야. 승탑의 특징, 명칭, 조성 연대, 비문과 달리 보경사에 전해오는 재미있는 원진국사의 호환 이야기
이 탱자나무는 약 400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과연 400년이나 되었을까요? 높이가 6m까지 자랐는데 몇해전 태풍의 영향으로 가지가 부러져 초라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아래 부분은 빠졌네요.
보경사의 보경의 의미,
해탈문 안의 보사공덕비, 설산장욱스님비,
사천왕문:
창건, 중건과 그 주체, 중건기 쓴 이종영과 오암대사, 편액 3점, 둔테목 환조 사자, 사천왕상 조성,
불교의 우주관과 사천왕 등
원조루圓照樓의 존재, 조성된 시기, 원조루의 옛 시 등
서운암의 아미타후불도, 신중도, 승탑군과 오암당 의민 선사, 승탑에 재활용된 보경사의 고탑
기회가 되면 저도 자료 챙기고 연구해서
문길 여러분과 함께 현장 설명, 질문, 토론 공부를 하고 싶군요.
내연산의 경관 명소 및 암자들
최근에 제가 쓴 논문
<내연산 명소와 보경사 암자의 연혁>,
<역주 유내영산록>(<<동대해문화연구>>13집(2013. 11.))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한 번 같이 답사하며 현장 설명을 드리고 싶군요.
기회가 되면 날 잡아서 3회 정도 내연산을 등산해봅시다.
내연산의 5가지 산이름들, 50여 곳의 경관 명소, 12곳의 암자와 암자터에
모두 이름표와 안내판을 세우도록 포항시 당국자에게 제안했습니다.
50여 곳의 경관 명소 중에 내연산의 랜드마크였고 가장 의미 부여가 컸지만
무려 400년 가까이 잊혀졌고 잃어버렸던 삼동석을 되찾았고,
주연을 비롯한 수십 곳의 새로운 이름들을 모두 되찾는데 성공했습니다.
암자터의 이름과 위치들과 연혁도 거의 확인하였습니다.
8. 보경사의 비사리 구시는 몇 명분의 주먹밥을 담을 수 있나요 ? 정답 ③
① 1,000명 ② 2,000명 ③ 4,000명 ④ 5,000명
이런 재미있는 퀴즈가 보경사 설명 자료에 들어 있군요.
지통(紙桶)을 (비사리)구유(구시, 한자로 조槽)라고 불러요.
명칭이야 어떠하든
용도는 한지 제조 공정에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단순히 지통이라고 하니 납득이 가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한지 만드는 공정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군요.
천 년을 가는 우리나라의 한지는 예로부터 중국인들도 최고품질의 종이로 여겼지요.
한지 제조 공정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아주 훌륭하고 재미있는 문화해설의 내용입니다.
아래에 제가 찾아 올려놓은 정보들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지통은 문화사(공예, 한지 제조 기술과학, 인쇄, 제책, 기록)와 보경사 사원경제사 관련
유물입니다. 매우 소중한 문화해설 콘텐츠입니다.
아래의 글에 제가 찾아놓은 보경사 한지 제조, 공납 관련 사료들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안내판을 당장에 시급히 바꾸어야 하고(포항시 학예사에게 제안했습니다.)
보경사성보박물관에 옮겨지고, 한지 제조 공정과 사원경제사. 문화사적인 의미를 담은
설명 안내문이 붙어야 하겠지요.
참고로, 한지제조 전문가이고 한지미술가인 영담스님이 운영하는
청도 운문사 가는 길가에 있는
영담한지미술관이나, 청송한지전시관에도 가보시고 실습도 한 번 해 보시길 권합니다.
학생들과 문화 전승을 위하여 한지 뜨기 체험학습도 하면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되겠지요.
한지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상을 받은 학생의 결과물이
포항 대흥중학교 곁에 있는 경북과학교육원에 있으니 한 번 관람하시길 권해봅니다.
비사리구시가 밥통이 아니라 지통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가지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기술과학분야인 한지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가져보시길 권해봅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비사리구시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로워서 해설을 할때 제일 좋은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안내판에 쓰인 이름 비사리구시, 내용이 잘못 알려진 것임을 안내하시고 문화사, 사원경제사와 관련하여 안내설명하시길! ^^
앞으로는 비사리구시라고 하지 말고, 지통이라고 정확히 안내하시고, 일명 구유, 구시, 구유통, 구시통이라고도 한다고 하시길. 그리고 안내판에 나오는 밥통이니, 4,000명분, 쌀 7가마 밥 등의 이런 이야기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지의 제조공정에 대한 지식 정보를 가지고 한지의 중요성을 문화사(신라 무구정광다라니경 고려 직지심체요절처럼 사원의 전통 공예, 과학기술, 제지, 인쇄, 기록의 문화사)와 사원경제사(조선시대 중기 이후 사원에 부과된 가혹한 종이 제조 부역과 공납으로 사찰이 빈절이 되었던 역사(지역을 강요한 국가 관청과 양반이라고 하는 대형 빈대 때문에))와 관련하여 설명을 하길 바랍니다.
아무리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잘못된 정보를 말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본의 아니게 시민과 어린 학생들을 호도하는 거짓말의 악순환은 막아야 하겠지요?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사실을 정정하며 지통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와 문화를 안내하시길. 인쇄와 기록의 문화사, 닥종이,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와 과학기술과 우수성과 미래의 발전 가능성, 조선시대 사원경제사의 비밀을 웅변하는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유물임을 부각시켜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설명 안내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