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 ~ 1936)】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단재 신채호의 부인 박자혜 역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1880.11.7~1936.2.21)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유생인 고령 신씨(高靈 申氏)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7살에 아버지를, 15세에 친형을 잃었다.
선생은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얼마 후 위암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게 되면서 한말 언론계에 입신, 애국계몽운동의 이론가로서 그의 문명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이해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됨에 따라 황성신문의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의 논설로 조약을 규탄하게 되자 황성신문은 압수와 함께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1906년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 운강 양기탁의 천거로 다시 이 신문의 논설진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공식적인 사주(社主)는 영국인 베델(E. T. Bethell)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보안규칙이나 신문지법에 저촉을 받지 않았다. 선생은 여기서 자유롭게 필봉을 휘둘러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진력할 것을 계몽하였다. 논설기자로 입사한 지 얼마 후 이 신문사의 주필이 되었으며,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독사신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하였다.
선생은 언론인으로써 뿐만 아니라 실천지식인으로써 여러 활동에 직접 가담하였는데, 1907년 안창호등에 의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창립위원으로 참가하여 대한신민회취지서(大韓新民會旨書)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애국계몽사상가로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된 것은 민족역사에 대한 선생의 연구에 있었다. 전기물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 [을지문덕],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등과 사론(史論)인 [독사신론]을 비롯한 많은 논설에서 민족사적 영웅들의 전기를 통하여 민족자강주의를 구현하고 영웅사관을 제시하여 국가의 존망지추에 제2의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고대하는 민족자존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1910년 신민회 간부들은 일제의 침략 아래서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먼저 국외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함으로써 이를 근거로 삼아 장차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합의에 따라 단재는 안창호, 이갑, 이종호등과 함께 그 해 4월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靑島)에 도착하여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앞으로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는 청도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토지개간사업, 무관학교 설립, 교관양성 및 전문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였다.
한편 1911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12월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 김학만, 이종호 등이 설립한 권업회(勸業會)에서 그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자, 이 신문의 주필로 취임, 활동하여 러시아와 중국의 한민족을 두루 계몽시켜 일제병탄 후 명멸해 가던 한국혼을 되살리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3년에는 신규식의 주선으로 상해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고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조소앙등과 함께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중국에 있는 한국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에 가까워지자 국외의 망명지도자들 사이에는 국제정세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였고 선생은 이 두 선언서의 서명자로 참여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 천진 등에 유학하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청년단이 조직되었는데 이때 단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이어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그 후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였다. 서두에서 선생은 아래와 같이 선언하고 있다.
"강도(强盜)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 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
[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요인(要人)과 기관을 암살 파괴할 폭탄, 단총(短銃)과 함께 의열단원들이 휴대하는 필수품의 하나였으며 이들이 활동하는 국내, 중국, 일본 등 각지에 널리 뿌려졌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일제 당국은 큰 전율과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선생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주체성의 문제를 한국사 체계나 사관(史觀) 정립(定立)에 있어 기본전체로 삼고,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라고 정의하였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鬪爭) 사관이라는 격렬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그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일정하게 대응되는 것으로서, 조선사를 서술할 때 조선민족을 아(我)의 단위로 설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한국사의 범위와 그 서술방법을 역사론적으로 밝혀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민족 중심의 역사인식이 [낭객의 신년만필]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에 대한 경고로서 오늘날에도 교훈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