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에 대한 로마자 표기법’을 ‘외국인이 우리나라 이름(인명, 지명)을 발음할 수 있도록 우리말을 영어로 적는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하여 ‘외국인이 발음할 수 있게 대충 적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말 그대로 대충 적는다.
사실 20세기 초까지는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이 발음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름이 많지 않았고, 로마자로 표기되어 있는 표현을 봐야 했던 사람(서양인)이 많지 않았으며, 같은 지명을 놓고 다르게 써도 큰 혼란을 주지 않았다.
옛 문헌을 보면 평양에 대한 표기로 ‘Piongyang, Phyeongang, Pingyang’ 등과 같은 것까지 등장한다. 이로 인해 기차를 잘못 타는 외국인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로마자도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발음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한글맞춤법과 마찬가지로 ‘일관되게’ 쓰는 것이다. 로마자 표기법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소리나는 대로’ 쓴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각자가 ‘마음대로’ 쓴다는 말에 불과하다.
몇 년 전 조사에 따르면 서울 명동에 대한 표기가 ‘Myungdong, Myoungdong, Meeyoungdong’을 비롯해 무려 열두 가지나 됐다고 한다. 그렇게 쓴 사람 모두가 ‘외국인이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기발한 표기를 하려고 상상력을 십분 발휘했을 것이다. 문제는 각자가 생각하는 ‘외국인이 발음할 수 있는 표기’가 서로 다르며 심지어 같은 사람이 같은 말을 나중에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마저 보게 된다는 데 있다.
한자어에 대한 한글 표기와 비교하면 원칙을 따르지 않을 때 생기는 폐해가 어떤 것인지 분명해진다. ‘속리산’을 소리나는 대로 쓰게 되면 ‘송리산’이라고 쓸 수도 있고 ‘송니산’이라고 쓸 수도 있겠으나, ‘속리산’이라고 써야 우편물 배달사고를 방지하고 지도에서 제대로 찾고 인터넷 검색을 할 때 제대로 나오지 않겠는가?
‘국어에 대한 로마자 표기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안 따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어를 ‘영어식으로’ 적고 싶은 충동을 못 이겨서이다. 영어가 국제공용어가 되어가는 추세에 맞춰 표기를 ‘영어식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의 ‘현’자를 대부분 사람들이 ‘Hyun’이라고 쓰려고 하고 대통령 본인도 그렇게 쓰고 있지만 CNN에서 ‘남한 대통령 노무휸’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나 역설적인 것은 영어식으로 표기하자는 사람들은 흔히 ‘세계화’를 들먹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외국인이 똑같이 발음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 식이고 ‘세계화’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백인 중에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외국인이 발음할 수 있게 소리나는 대로 쓰면 된다’는 논리는 그래서 ‘외국인’이 아니라 ‘영어권 외국인’, 그중에서도 ‘미국인’만 고려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세계화에 역행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표기를 어떻게 하든 세계의 모든 외국인이 똑같이 발음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본어·중국어·아랍어 등 로마자를 쓰지 않는 언어들은 언어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개발한 각 언어를 위한 로마자 표기법을 차선책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0년에 개정된 정부의 ‘한글에 대한 로마자 표기법’은 그래도 최대한 많은 외국인이 원음에 가깝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하고, 보편적인 언어학적 원칙을 존중하면서 일반 한국인도 이해하고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어졌다. 국가경쟁력과 정보화가 크게 강조되는 요즘, 로마자 표기법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반석·미국인 네덜란드 레이든대 박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