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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로어, 매력 만점 친구 신부다. 기회 닿으면 한 번 만나보고 싶다.
― ‘라만차의 사람’에서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현실과 돈키호테가 말하는 현실의 끊임없는 충돌을 본다. 사람들은 그의 현실을 이상주의라고 부른다. 그는 비싼 값을 치르면서 자기의 현실을 고집하고, 현실에 대한 그들의 슬픈 정의(定義)를 거부한다. 거울 든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네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억지로 보여주려고 한다. 우리는 때로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실제로는 눈을 밝히기보다 멀게 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돈키호테와 창녀 알돈자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요약된다. 그녀는 분명 창녀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말한다, “아니, 당신은 알돈자가 아니오. 당신은 둘치네아요!” 처음에 그녀는 그를 지겨워하며 욕을 퍼붓는다. “당신 정말 바보군. 난 창녀라고! 나쁜 년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둘치네아라고 부르며 말한다, “아니, 당신은 아름다워요. 당신은 착해요!” 결국 그의 보는 힘(power of his seeing)이 그녀를 이기고, 그녀는 그의 말을 믿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가 부르는 그녀로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와 같다.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고 증명해도, 우리를 가리켜 하느님의 딸이라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그 모든 증명들이 밑으로 가라앉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거울 속에서 흩어질 것이다.
날씨 제법 쌀쌀하다. 효선이 오늘 밤으로 내려오겠다며 서울 갔는데 치과 수술 결과를 원장에게 검사받아야 해서 내일 온다―는 문자 전해주러 소리샘이 왔다가 커피 한 잔 타주고 돌아간다. 추운 방에서 하룻밤 잘 지내고 내려오기를 속으로 빌어준다. (2017. 11. 16)
⎈ 이른바 행동반경이라는 것이 근래에 상당히 좁혀지는 느낌이다. 작은 방 책상에 앉아서 글을 읽거나 번역할 때의 행복이 갈수록 아쉬워 밖에 나갔다가도 서둘러 돌아온다. 신부 정호경이 오래 전에 말한 ‘천생 글쟁이’가 제 벌거숭이 본색을 드디어 발각시키나보다. 혹시, 정상(頂上) 또는 하구(河口)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조짐일까?
효선이 서울에서 내려오는데 몰골이 많이 상했다. 치과 수술이 까다로웠단다. 류 원장이 수고가 컸겠다. 고마운 사람들 참 많지만 특별히 고마운 친구다. (2017. 11. 17)
⎈ 오늘은 카비르가 재치 있는 노래로 슬픈 나를 위로한다.
사람 하나 죽으면 도무지 쓸데가 없고
짐승 하나 죽으면 여러 가지로 쓸데가 많다.
내 행실의 결과를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오, 아버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어요?
뼈다귀는 한 아름 장작처럼 불타고
머리털은 한 줌 풀처럼 불탄다.
카비르는 말한다,
“염라의 곤봉이 골통을 내려치면
그때서야 인간들은 깨어난다.”
토요명상.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도 반디, 신난다, 소리샘, 두더지, 바람빛, 은하수, 비파, 보리밥 등이 참석. 바깥 날씨에 견주어 따뜻한 시간을 함께 보냄.(2017. 11. 18)
⎈ 용화사 예배. 보리밥, 두더지, 반디, 소리샘, 바람빛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중간 중간에 긴 침묵 속으로 잠겨든다. …마치고 방에서 나오다가 벽에 걸린 달마화상 초상화 화제(畵題),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에 답하라고 하니, 반디가 한 마디로 끝내준다. “만법(萬法)!” 그렇다, 어리석은 이 중생은 땅이 하늘이고 알파가 오메가인 진실을 언제 깨칠 것인가? (2017. 11. 19)
⎈ 캐나다 밴쿠버 심 장로 내외가 오셨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건강해 보여 반갑고 고마웠다. 잃었던 밥맛을 되찾아 체중이 2킬로나 늘었단다. 학교에 들러 부산 맨발도서관 친구들과 환담하던 중, 이브 몽탕의 ‘고엽(枯葉)’을 감미로운 목소리로 들려준다. 조용한 감동!
밤에는 보리밥이 티켓을 사서 애니메이션 영화 ‘러빙 빈센트’ 관람. 고흐의 붓질을 시늉하여 그의 죽음에 연관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랜만에 괜찮은 영화 보았다. (2017. 11. 20)
⎈ 며칠 전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자장면 먹고 배탈이 나서 고생한 효선이, 이번 일을 겪는 과정에 한 가지 결심한 바 있단다. 당분간, 언제까지일지 모르나 어쩌면 죽는 날까지, 먹을 것 사러 따로 시장에 가지 않고 그날그날 한님이 주시는 것만 먹어보겠다고… 과연 하늘이 주시는 하루치 식량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를 실험해보겠다고… 게다가, 무슨 일이든 자기가 주체로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는 일의 한 부품이 자기라는 걸 깨달았단다. 곁에서 듣다가 진심으로 손뼉 치며 아멘 할렐루야, 한다.
삼인에서 책 ‘카비르의 노래’가 나왔다. 장정도 깨끗하고, 들인 정성이 눈에 띄어 고맙다.
성공회 강남교구 사제 피정 참석. 수십 년 만에 찾은 경기도 ‘성라자로마을’이 전에는 푸른 숲으로 에워싸여 있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숲을 헤치며 들어가야 한다. 그렇다, 세상에 바뀌지 않는 무엇이 있으랴? 흘러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2017. 11, 21)
⎈ 점심 먹고 경내를 산책한다. 반세기 전 어느 날, 당시에는 ‘문둥이’로 불렸을 몇 사람을 위하여 어느 외국인 신부가 오두막 몇 채 세운 것이 오늘 이렇게 규모 있는 마을로 바뀌었다. 수많은 건축물들에 얽힌 역사를 읽는데 예수의 겨자씨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무엇인가? 겨자씨인가? 겨자나무인가? 둘 다인가? 모르겠다. 알 것 없다. (2017. 11. 22)
⎈ 오후 5시에 피정 강론 마치고, 서울에서 볼일 보고 내려온 효선을 라자로마을에서 만나 순천으로… 매일 주시는 만큼만 먹고 살자는 약속에 대하여 킬킬거리고 웃으며 졸지 않고 잘 내려왔다. 보일러 온도를 낮춰놓고 갔더니 방안이 설렁하다.
학교 주소로 봉화의 현미 선생이 사과를 두 상자나 보내왔다. 고마운 사람. 한님이 주신 이 사과로 아이들과 무슨 놀이를 할까, 효선이 궁리하는 모양이다. (2017. 11. 23)
⎈ 늦잠 자고 일어나 골목 앞 목욕탕에서 피곤을 씻어낸다. 하루 종일 뒹굴뒹굴, 힘들여 사는 이들 생각에 마음이 가볍진 않아도, 밥 조금 먹고 조용히 지낸다.
간디 옥중서신, ‘예라브다 형무소에서’ 번역 마침. 왜 새삼스레 간디를 새로 읽히시는지 그 까닭을 절절히 느끼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출판사가 고맙다. (2017. 11. 24)
⎈ “인생은 의식의 성숙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경험들을 너에게 줄 것이다.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일이 너의 성숙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인 줄 어떻게 아는가? 그게 그런 까닭은 지금 네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에크하르트 톨레)
영화 ‘청원’을 중간부터 보았다. 기회가 허락되면 다시 봐야겠다. 왜 고양이한테는 안락사를 허용하면서 사람은 안 된다는 걸까? 고양이가 영화의 주인공이면, 사람한테는 안락사를 허용해도 고양이는 안 된다고 할까? 아마도 그러겠지. 저마다 자기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할 테니까. 사랑이 무엇인지, 생명의 존엄이 무엇인지, 왜 세상에 덜 착한 사람은 있어도 나쁜 사람은 없는지, 뭐 그런 이야기를 아름다운 색깔과 음악으로 시끄럽지 않게 들려준다. 마술사인 주인공이 어린아이였을 때 힘들게 사는 엄마 앞에서 보여준 첫 마술이 ‘쏟아지는 동전 비’냐고 묻는 제자에게 아니라고, 내 첫 마술은 ‘엄마를 웃음 짓게 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하는 대목에서 눈물이 나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영화란 참 재미있는 발명품이다.
토요명상 시간에 소리샘이, 몹시도 춥던 어느 날 바로 이 방에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던 그날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거듭된 여러 번의 천일기도가 파노라마로 지나쳐가는데 시방 아들과 함께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너무나 고맙단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지든지 그것을 우리의 성숙을 위해서 하늘이 내려준 선물로 받자는 이야기… (2017. 11. 25)
⎈ “십자가 처형에서 사탄이 발견한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된 뒤로 2천 년이 지난 오늘에야 겨우 그것도 용기를 내어 믿게 되었다. 우리가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곳, 우리의 가장 취약한 곳인 ‘육신’이 우리를 공격할 최적의 장소임을 악령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대하거나 그분을 찾게 될 마지막 장소가 거기인 것을 사탄이 알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오직 용서받은 죄인들과 영적 구도자들만이 거기에서 당신을 발견하리라는 것을 하느님은 아신다. 그래서 악령은 벽에 난 틈새를 찾고, ‘육신에 가시 곧 사탄의 심부름꾼’으로 우리 모두의 그곳을 공략한다. 불행히도 그의 작전이 먹혀들어갔다! 대부분 그리스도교 전통이 부정적으로 그리고 쓸데없이 육신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정의, 복음, 은총 등 중요한 주제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 엄격하고 위압적인 태도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그것을 ‘성결(聖潔)’이라고 불러왔다. 우리가 이렇게 반응한 것은 복음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악령의 가장 큰 승리였다. 인간다운 애정의 긍정적인 힘을 겁나게 틀어잡은 것이다. 그래도 그리스도는 당신의 수확물을 거두실 것이다. 오랜 세월 천한 것으로 외면당해온 인간의 나약한 육신, 바로 거기를 통하여 인간의 건강과 성숙을 드러내실 것이다.” (리처드 로어)
언제였던가? 내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기억하며 무엇이 내 곁에 항상 있는지를 찾다가 ‘몸’과 ‘허공’을 발견하고, 둘인 우리가 그동안 언제 어디서나 하나였음을 깨치던 그날이… 문득, 리처드의 글에서 친숙함이 느껴진다. (2017. 11. 26)
⎈ 태국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며 출국 인사차 온 토벽에게 근배의 안부를 물으니 세상 떠난 지 벌써 3년이나 됐다고… 엊그제 문득 궁금했는데 가버렸구나. 근배, 세상에 와서 고생 많았네. 그래도 놀 만큼 놀았을 테니 여한은 없었으리. 고마웠소. 오늘 글쓰기 공부하러 오기로 되어있는 댕댕이가 병원에 입원했단다. 속히 회복되어 밝은 얼굴로 만나기를.
12월 8일 공연을 위한 연습 구경. 다슬기의 비나리, 버럭의 북과 춤, 효선의 트레바르소, 노래 숨의 그레고리안 찬트가 어울려 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버럭의 춤사위와 얼굴 표정이 연습인데도 진지하고 묘연(渺然)하여 숨결이 차분해진다.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니 고마운 일이다. 다슬기의 소리와 표정도 엄정하여 결코 만만치 않다. 자칭 ‘노래로 숨 쉬는 순례자들’이라는 노래 숨의 콤비 또한 제법 근사하다. 괜찮은 공연이 될 것 같다. (2017. 11. 27)
⎈ 새벽, 남미의 어느 원주민이 자기가 배설한 똥으로 나를 대접해야 하는데 그걸 한 친구가 몰래 먹어치워서 난감해하는 꿈을 꾸었다. 자기 똥을 향기로운 기름과 소금으로 버무려서 대접하는 것이 최상의 손님 접대라는데 그 풍습이 조금도 이상히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같이 난감해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갓 태어난 새끼의 배설물을 먹어치우는 어미 새를 자연 다큐에서 보았다. 깨끗하게 먹었으면 똥이 더러울 이유가 없다. 새들이 하는 걸 사람은 못하는구나. 뭐 이런 생각이 들면서 웃음이 난다.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그것을 가져가는 이들이 참 고맙다. 오늘날 ‘환경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이야말로 봉급은 어떨지 모르나 영적으로 최선의 직업을 가진 복자들이다.
광주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 다녀감. 건강해 보인다. 체중도 좀 늘었단다. (2017. 11. 28)
⎈ 효선이 장보기를 하지 않은 지 열흘이 되어간다. 조개젓이 떨어졌는데 가서 살까 말까 한 번 살짝 생각했더니 현빈 통해서 재래시장 상품권을 주시더란다. 그것으로 조개젓을 바꿔야겠다며 웃는다. 하루하루 그날 주시는 것만 먹고 살아보자는 이 실험이 제대로 치러지기를, 그리하여 풍요로운 가난의 진미(眞味)에 취하게 되기를… (2017. 11. 29)
⎈ 골목 목욕탕이 텅 비었다. 혼자서 더운 물에 몸을 담그고 “여호와 나의 목자시니”를 부른다. 수증기들이 소리를 축여주어서 울림이 근사하다. 여호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며…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아니다, 내가 거기 거하는 게 아니다. 거기를 떠날 수 없는 내 운명에 감사할 따름인 거다.
며칠 전부터 조짐이 있더니 드디어(?) 효선이 자리에 눕는다. 한 이틀 푹 쉬라는 신호렷다. 약사(藥師)인 민정 아버지가 종합감기약을 값도 안 받고 건네준다. (2017. 11. 30)
⎈ 경기도 광주 지금여기교회 성서산책. 포항에서 올라온 내과의원 원장에게, 이번 지진에 많이 놀랐지요? 물으니, 너무 무서워서 죽는구나, 했단다. 그래서 그 순간에 무엇을 했나요? 기도했어요. 기도를 한 게 아니라 나온 거지요? 예. 맞아요,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왔어요. 잘 했어요. 그게 진짜 기돕니다. 뭐라고 기도가 나왔나요? 하나님, 함께 해주십시오! 그랬더니 어떻게 됐어요?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간호사들과 입원환자들에게 가서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말했지요. 내가 웃고 있는 줄 몰랐는데 간호사들이, 원장님 지금 웃음이 나느냐고, 그러더군요. 아주 좋은 선물을 받으셨군요. 축하합니다.
그렇다, 무서운 재난도 어떤 사람에게는 하늘의 선물이 담긴 보따리일 수 있는 것이다. 좋다, 인생 실패자가 되자. 한님만 믿다가 망가져버린 인생이 되자. (2017. 12. 1)
⎈ 몸이 쇠약해진 게 완연하다. 두 시간쯤 이야기를 계속하고 나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오전 시간 마치고 점심 먹기 직전 자리에 누워 혼곤히 잠든다. 점심 먹고 나서도 계속 자리에 누워 잠들다 깨다 한다. 나 지금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거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를 한 번 더 읽는다. 맞다, 언제 어디서든 사랑할 수 있으면, 그러면 됐다. 톨스토이의 감동적인 최후를 생각해본다. 나도 내 마지막이 남은 사람들에게 주는 하늘의 소중한 선물이었으면 좋겠다. 오후에 몇 영혼들과 개인상담. (2017. 12. 2)
⎈ 주일예배. 예배에 빈손으로 오지 말고 예물을 바치라고, 오늘 무얼 바치겠냐고, 물었다. 장 목사는 자기 뜻과 계획을 바친단다. 누구는 수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뒤 두려움 때문에 운전을 못했는데 그 두려움을 바친다고 한다. 좋은 예물이라고, 주님이 기뻐 받으시리라고, 말해주었다. (또 몇 사람이 생각지 못할 예물을 드렸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예배 마치고 포항 원장이 내려가는 길에 나를 괴산 신풍교회까지 데려다준다. 한참 있다가 그가 되돌아와서는 차에 두고 내린 목도리를 전해주고 급히 사라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다가 차를 돌려 다시 온 건가? 미안하고 고맙다.
아민이 오늘은 할아버지가 오신 줄 아는지 제법 내숭을 떠는 것 같다고, 제 이모가 말한다. 다른 날보다 의젓하다는 얘기다. 심하게 돋았던 태열이 말끔 사라지고 깨끗한 얼굴로 웃기까지 한다. 제가 웃는 줄 알기는 할까? 그건 모르겠다만, 보기에 고맙고 신통하다. 저녁 먹고 소리가 운전해서 엄정 집으로 오는데 괜히 눈물이 나려고 해서 민망했다. (2017. 12. 3)
⎈ 서울 용하 결혼식. 슬기 차로 상경. 누가 맏이 아니랄까봐 늙은 아비를 자상하게 챙긴다. 가는 길에 치과에 들러 인조 어금니 박고, 예식장에서 반가운 집안사람들 만나고, 생전 처음 폐백이라는 것도 받아본다. 명은이가 교회 사모 노릇을 하더니 제법 주변 사람들 보살피며 리드할 줄 안다. 할머니가 보시면 기뻐하실 텐데… 오는 18일, 어머니 아버지 묘를 이장한단다. 교수 은퇴를 앞둔 막내가 형 대신 수고가 많다. 고속버스로 귀가. (2017. 12. 4)
⎈ 목포 목우당이 하동 문 목사와 함께 왔다. 이 집을 위해서 수고하고 땀 흘린 두 사람이다. 효선이 집에 있는 재료로 정성껏 음식을 대접한다. 저녁에는 구례에서 은영 씨와 상철 씨가 와서 밥을 사준다. 상철 씨도 이 집을 위해서 애써준 일꾼이다. (2017. 12. 5)
⎈ 7, 8학년 마음공부. 보리밥 주선으로 일부(一夫)와의 대담을 시작하기 전에, 요즘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내 삶을 정리하는 작업의 한 몫으로 여겨진다고 말해주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았고 ‘행동과 묵상 센터’에 대한 나의 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당신이 원하는 일을 하느님이 하실 수 있게 하는 무슨 마법의 길이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도의 힘에 대한 오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길에서 장애가 되는 나 자신을 치워버릴 수 있도록 묵주기도가 나를 도와주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묵주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 그분께 무릎 꿇고 그분을 신뢰하여, 프란체스코가 그러셨듯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이든 내가 그 일의 도구로, 채널로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입증해드리거나 그분의 팔이 우리 쪽으로 굽도록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귀 기울여 듣는 것이 모든 기도의 마지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 옮긴 리처드 신부의 고백이다. 그렇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주어진 길에서 가장 큰 장애물인 나를 치워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일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거나 내가 해야 하는 ‘나의 일’이 아니라, 그분이 내 최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한테서 이루실 ‘당신의 일’이라는 것을… (2017. 12. 6)
⎈ 리코더 연주자 조진희 선생과 그의 제자가 어젯밤 순천에 왔다. 중앙교회 게스트하우스에서 일박하고 누룽지 끓인 것으로 바람빛, 소리샘 더불어 따뜻한 아침식사. 점심시간, 중앙교회 비전 홀에서 ‘리코더 마스터 클래스’ 구경하고 함께 수제비로 식사. 고맙게 보리밥이 밥값을 낸다. 리처드 로어 신부, 노리치의 줄리안 번역. (2017. 12. 7)
⎈ 조곡동성당에서 그레고리안 찬트와 비나리, 종, 북, 징, 피아노, 기타, 리코더, 콘트라베이스, 드럼, 트라베르소, 색소폰 그리고 사람 목소리들이 한바탕 어울려 바흐에서 현대 재즈 작곡가까지 수상하고 미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한님은 장차 이것들로 무슨 즉흥곡을 연주하시려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알려고 하지도 말자. 이제 조곡동성당에서의 공연은 세상에 없는 거다.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말자. 터무니없는 기대로 금쪽같은 지금을 망가뜨릴 순 없는 일이다. 거창 주 선생 내외가 오셔서 캠코더로 촬영해주신다. 민정이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를 거들어주고는 바람같이 사라진다. (2017. 12. 8)
⎈ 토요명상. 배움지기들이 모두 참석하여 오늘은 방이 그들먹하다. 돌아가며 사는 얘기를 하는데 저마다 힘은 들지만 잘들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나’에 대한 절망이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첫걸음이라는 얘기… (2017. 12. 9)
⎈ 잠에서 깨어나는데 한 마디 주신다. “너는 천사다. 인간들의 한숨을 위로 올리고 하늘의 위로를 아래로 내리는, 너는 중재자다.” 이어서 한 마디 더. “그 인간들 가운데 가장 먼저가 바로 너 자신이다.” 이 몸이 내가 아닌 줄은 진즉 알았지만, 내가 천사인 건 오늘 비로소 아주 조금 느껴진다. 오케이, 여기까지. 더 생각하지 말자.
효선은 그동안의 피로가 쌓였는지, 아침 먹고 목욕 다녀와서 곯아떨어진다.
재혼하고 처음으로 사람들 보는 자리에서 아내에게 화를 내었다. 중재자가 옮기는 것들 가운데는 한 에고의 못된 버릇과 다른 에고의 노여움도 포함되는 모양이다. (2017. 12. 10)
⎈ 다시 확인하고 새삼 다짐한다.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을 구하지 않고, 묻지 않는 말에 답하지 않고, 만사에 앞장서지 않는다. 효선도 이 다짐에 기꺼이 동참한다.
댕댕이가 밝은 얼굴로 찾아왔다. 입원해서 치료받는 동안 자기를 조금 바라볼 수 있었고 그래서 전과 달라져 있는 자기를 느꼈단다.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2017. 12. 11)
⎈ 9학년 졸업생 에세이를 봐주러 학교에… 현빈 집에서 점심. 날씨가 바짝 추워졌다. 노숙자들이 큰일이다. 효선은 언니와 함께 어머니 모시고 일본 여행 떠남. (2017. 12. 12)
⎈ 텔레비전에서 한 어부가 냉이를 캐러 다니며 말한다. “냉이가 없는 데는 없어요. 있는 데만 있지.” 맞다, 오늘의 명언(名言)이다. 냉이가 없는 데는 냉이가 없다. 냉이는 냉이가 있는 데만 있다. 그런데 그게 어찌 냉이만 그러하랴? 뭐가 없으면 그게 없는 데라서, 혹은 없을 때라서, 없는 거다. 그게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이 없는 곳 혹은 없을 때가 아닌 거다.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일러준다. 지금 너에게 무엇이 없다면 그것이 너한테 없어도 되거나 없어야 되거나 아직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심하자. 지금 너에게 없는 것을, 그게 무엇이든, 구하지 말자. 이미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충분하다. …고맙습니다, 한님! 여기가 선배들이 말하는 그 무망(無望)의 땅인가요?
“잘 익은 일흔 살 노인들 가운데 하나쯤 당신이 만났기를 바란다. 충분하진 않아도 나는 그런 분들을 좀 만났다. 나이를 일흔 살이나 먹어서도 성질머리 괴팍하고 고집불통인 늙은이로 산다는 건 정말이지 창피한 일이다. 사람은 마땅히 그 반대로 늙어야 한다. 그런 분을 만날 때 당신은 지금 당신이 큰 어른을 만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분이야말로 한 집안의 가장자리에 앉아서 모든 식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할아버지나 현자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는 딱딱한 교리나 정치적 견해 따위로 다른 사람들을 질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안전’과 ‘모험’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세계관을 제시한다. 대부분 아버지들이 주변에서 그런 할아버지들을 보지 못하고 그래서 무거운 인생 짐을 혼자 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스스로 성질 괴팍한 늙은이로 되어 자기 맘에 드는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농익은 지혜를 젊은이들에게 넘겨주는 그런 늙은이들이 없는 문명은 영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오늘 옮긴 리처드 신부 글이다. 이 친구, 정말 맘에 든다.
정희 장로 내외가 네팔에서 선교하는 부부, 네팔 청년 둘과 함께 다니러 왔다. 준서네 집에서 저녁식사 대접받고 여럿이 돌아가며 유익한 환담. 많이 웃다. (2017. 12. 13)
⎈ 정희 일행과 함께 아침은 함박 집에서, 점심은 전주에서 명은이가 사주는 전주비빔밥을 먹는다. 처음 먹는 것처럼 맛있다. 정희가 차를 운전하여 일부러 충주에 나를 내려주고 길을 돌아서 서울로 올라간다. 그렇다, 세월은 흐르고 모든 것이 고맙다. (2017. 12. 14)
⎈ 아민이 보러 신풍교회로…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녀석이 마치 뭐라고 말하는 것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빤히 쳐다본다. 제발 너희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 때문에 서로 미워하여 싸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런 세상 만들어달라고 속으로 빌어본다. (2017. 12. 15)
첫댓글 현동은 무슨 뜻일까요? 목사님의 한 해 말씀을 1년간 마음에 새기도 사는데
겨울...........이라는 뜻 말고....인터넷 찾아봐도.....없네요..
어떤 뜻으로 주신 말씀인지 알고싶습니다.
말씀모심 사랑방에 현동의 의미를 알려주셨네요. 찾아보시길요^^
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