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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사랑할 시간] 05
1. 대학병원 / 엘리베이터 문 (낮)
(4부 엔딩)
미연과 정란 사이에 서 있는 지석.
말 없는 세 사람, 참 어정쩡한 침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블랙 화면 위로.
정란 (E) 미국 가서 치료해요.
사이.
정란 (E) 거기서 암은 암것도 아냐. 안 죽어.
사이.
정란 (E) 미국으로 가요...
... 띵!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면, 지하주차장이다.
충격에 휩싸여 서 있는 미연!
정란이 먼저 내리고, 지석이 미연 때문에 조금 망설이
다가... 내린다.
미연, 내릴 생각도 못하고 멍 해서 두 사람의 뒷모습
을 보는데,
걸으며 지석의 손을 꼭 잡는 정란.
망연히 서 있는 미연 위로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다.
2. 동 / 지하 주차장 (낮)
#차로 오는 지석과 정란.
지석, 뒤에 남겨져 있는 미연에게 온통 신경이 가 있
다.
정란 내가 운전 할께요.
못 듣고, 그냥 운전석에 오르는 지석.
정란, 그런 지석 보다가, 옆좌석에 오른다.
운전석에 앉은 지석, 생각에 빠진 표정이고,
옆에 앉은 정란, 그런 지석을 보는데,
지석, 시동을 걸고 부웅 빠져나간다.
차를 틀어 출구 쪽으로 가는 지석의 차.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언덕에서 끼익! 멈춘다!
지석,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간다.
정란, 놀란 눈으로 차 안에서 돌아보고.
#지석, 달려온다. 엘리베이터는 올라가고 없다.
주차장 안을 빠르게 훑는 지석. 아무도 없다. 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고,
핸드폰 열어 통화내역 클릭해 버튼 누르고, 그러면서
도 계속 두리번두리번...
정란, 차 옆에 내려서서 정신이 나간 듯한 지석을 보
고 있다.
#자신의 차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지석을 보고
있는 미연!
지석, 두리번대다 차 안의 미연을 발견한다!
핸드폰을 내리는 지석.
서로를 보고 있는 두 사람!
그때, 정란이 지석에게 다가와 선다.
정란 (지석 팔을 잡고) 왜 그래요?
지석 (시선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미연 (역시 시선을 떨구고)
정란 뭐 잃어버렸어요?
지석, 아무 말도 못하고 정란과 함께 차로 간다.
미연, 다시 고개를 들어 정란과 가는 지석을 본다. 울
듯 말 듯.
다시, 차 옆에 서 있는 지석과 정란.
정란 키 줘요. (키를 받아들고 운전석에)
지석 ... (미연 쪽을 의식했다가, 오른다)
#미연의 시선에서,
지석의 차는 안 보이나 부웅! 차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대낮에 헤드라이트 켠 불빛이 커졌다가 멀어지는 게
보인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숨이 확 터지는 미연.
(E) 와르르.. 터지는 방청객 웃음소리.
3. 방송국 / 개그프로 녹화장 (낮)
왈숙의 개그프로 녹화장이다.
무대에선 개그맨을 녹화 중이고, 방청객들, 연신 웃어
젖힌다.
무대 아래 한쪽에서 대본 든 왈숙이가 다급하게 FD와
얘기하고 있다가
객석의 한 곳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미연이 객석 맨 뒤에서 서서 멍한 눈으로 무대를 보고 있
다.
또 한 번 와르르르.. 터지는 방청객들 웃음소리.
미연, 그렁그렁한 눈에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지
며,
미연 벌 받은 거야 현지석. 벌 받은 거야. 하느님 참 공평하
다. 나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더니...!! (눈물이 떨어지며) 쌤
통이야... 정말 쌤통이야....
미연, 배꼽이 빠져라 웃어젖히는 관객들 속에서 홀로
운다.
미연 (NA) 미움이 사랑의 다른 얼굴이듯 웃음은 눈물과 쌍
생이다.
지난 9년간 나를 지탱해온 증오가 깨어지자,
웃음으로 위장했던 내 눈물도 잠금장치가 풀어지고 말
았다.
4. 지석 집 / 서재 (아침)
정란, 컴퓨터 앞을 서성이며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
다.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정란 (영어) 환자 상태에 대한 자료는 메일로 보낼께요.
이 부문에 미국 최고의 병원, 최고의 의사를 찾아내 주
세요.
한 군데만 하지 말고, 두세 군데로요. 최대한 빠른 시
일 내에 알아봐줘요.
그리고, (한 포즈 쉬고, 의미 있게) 우리 부모님은 모르
게 해야 돼요... 대니만 믿을게요. 부탁해요... 네...
정란, 전화를 끊고 힘이 빠져 자리에 앉는다. 암담하
다.
손이 떨리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정란 여보세요. (소리가 없다) 여보세요? (얼른 살갑게) 응,
혜진아. 아직 안 잤어?
여긴 아침이야. 어, 쫌만 기다려. 금방 갈 꺼야. (언
제?) 금방... 아빠... 방학하면... (눈물 꾹 참으며) 응.. 금방 방학할
거야... 엄마두 혜진이 보고 싶어...
5. 대학 / 지석 연구실 (낮)
지석,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고,
덕구,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후루룩거리며
덕구 서문을 확 땡기게 섹시하게 쓰래는데, 날 봐라, 섹시
가 가당키나 하나, 꼬옥 비유를 해도 안되는 걸루만... (반응 없는
지석. 괜히 눈치 보며) 다 종강했지?
지석 ... (가만있다가 느닷없이) 들어봐. 엘리베이터에 혜진
이 엄마랑 나랑 둘이 있어. 혜진이 엄마가 나보고, 우리 미국으로
가요. 미국에서 암은 아무것도 아냐... 안 죽어. 그러면 누가 암인
거 같이 들리냐?
덕구 ??
지석 혜진이 엄마? 나? 아니면 우리 부모님? ..누가 죽는 걸
로 들려?
덕구 (대답해야 되는 건가? 난감해 하다가) ... 너.
지석 그지! 나지! 아씨... 근데 연락이 없다...
덕구 ... ??
지석 우아... 독하다 고미연... 독해...
6. 방송국 / 연습실 (낮)
INS// 연습실 문에 붙은 안내문. <일일 시트콤 '청춘
무삭제판' 대본 연습>
대본 리딩하는 중. 연기자들과 정피디, 미연이 앉아잇
다.
미연은 자기 생각에 빠져 있고.
리애 (학원 선생 역) 옛날엔 밤새 편지 쓰고... 부칠까 말까
고민하구...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 애들은 띠디딕 문자 찍-보
내구. 메일 띡-보내구... 뭐니 그게.
남학생 대용량 메일도 있어요.
리애 밤새 고민하고 썼다 지웠다... 그런 게 없잖아.
남학생 수신취소 누르면 돼요.
리애 (슬슬 열받는) 낭만이 없단 말이다, 낭만이.
남학생 도토리 열개 있으면 버전별루 망만 쫙 까는데.
리애 (히스테리, 꽥) 누가 낭만을 도토릴 주고 사? 낭만이
사고팔 수 있는 그딴 건 줄 알어? 니들이 낭만을 알어? 백호 오빠
가 그랬어. 낭만에 대하여!
이런 대사를 치고받는 와중에, 미연의 얼굴에서,
정란E 미국으로 가요. 거기서 암은 암것도 아냐. 안 죽어.
[INS// 4부. 44씬. 나랑 살자 미연아. 3개월만 살아주
라. / 갖고 놀아? 내가 그렇게 만만해? / 미연아... 나, (죽어) / 미
친 놈, 넌 끝까지 미친놈이야.]
미연, 괴롭다. 한손으로 머리를 괴고 쓸어 올린다.
리딩하다가 괜히 미연의 눈치가 보이는 리애와 정피
디.
리애 (계속 연기) 백호 오빠는,
정피 (OL, 미연의 눈치 보며) 다시.
리애 (낮게, 미연 보며) 잘슨다 잘쓴다 했더니... 건방지게
어디서 인상을 쓰고.
여자 (소곤) 대놓고 좀 말해봐.
리애 기다려. 회식 때 붙을 꺼니까.
정피 (E) 다시이!
생각에 잠긴 미연의 얼굴 위로
리애 (E, 연기) 니들이 낭만을 알어? 백호 오빠가 그랬어.
7. 방송국 / 옥상 (낮)
미연, 문을 확 열고 나와 심호흡을 하는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 피가다 얼른 꽁초를 던져
버리는 왈숙.
왈숙, 입을 꾹 다물고 딴 데를 보고 있다.
왈숙 ...
미연 (멀리 보며) ... 끊었대매?
왈숙 (그제야 참았던 연기 나오고. 후... 콜록콜록. / 일어
나 괜히 죄진 듯 머쓱해서)
담밴 끊는게 아니라 평-생 참는 거야. 잘 참았었는
데... 시청률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담배를 물고 있더라. 내 꼭지
가 또 꼴지랜다.
미연 (멀리 보고만 있는)
왈숙 어젠 왔다 왜 그냥 갔어? 내 꼭지 시작할 때 안보이
더라.
너도 안 보는데 시청률이 나오겠냐? 아무래도 딴 자리
알아봐야겠다. 니네 씨콤에 자리 없냐? 니 밑에서 일할게. (미연
표정 보고) 왜? 누가 또 염장 질러?
미연 ...
왈숙 (뚱) 말해. 대신 조져 주께. 담배 피다 들킨 벌루. (보
다가) 뭐? 오늘 시아버지 제사 있대매. 벌써 스트레스 받는 거야?
미연 ...
왈숙 아님 뭔데?
미연 담배 피면... 좋아?
왈숙 ??
미연 잊고 싶은게... 잊혀져? 괴로운 게... 없어져?
왈숙 ... 아니, 더 깊어져. 잊으려는 것도 차분하게 깊어지
고, 괴로운 것도 분명하게 깊어지고... 그니까 넌, 피지 마.
미연,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는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문지르는데 손이 떨린다.
그런 미연의 모습 위로.
왈숙 (E) 왜 그러는데?
8. 지석 연구실 (낮)
핸드폰을 들고 서성이는 지석. 폴더를 열었다 닫
았다...
그런 지석 눈치 보며 뭔가 소심하게 안절부절 하고 있
는 덕구.
지석 분명히 암이라 그랬는데... 사람이 죽는다는데... 해도
너무한 거 아냐?
덕구 저기... 내가 이 말을 지금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지석 ?
덕구 이 타이밍에 이 말이 맞나 모르겠는데...
지석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새꺄.
덕구 (눈치 보는) 미연이... 결혼했대.
지석 ... !!
덕구 (괜히 눈치 보이는)
지석 ...!!
지석, 힘없이 자리에 앉는다. 씁쓸한 미소...
지석 ... 그래두 잘 살아가나부네... 하긴... 나두 살아왔으니
까... 꾸역꾸역...
9. 방송국 앞 (낮)
태훈 차 옆에 서있는데,
미연, 노트북에 가방 메고 나온다.
태훈, 미연의 노트북을 받아들고 (차에 타려는) 미연을
잡아 꼭 안아준다.
태훈 힘들지? 제사상 누나가 다 차린댔으니까. 꾀피우면서
해.
미연 (미안함에 애써 미소 지으며) 가요... (차문 여는)
태훈 누나도 그랬어. 그냥 와서 절만하래.
10. 대학 / 연구실 건물 앞 (낮)
지석, 건물에서 나와 말없이 차 쪽으로 가는데,
옆에 붙어 따라오는 덕구. 힐끗힐끗 지석의 눈치를 보
며,
덕구 ... 그냥.. 집으로 갈 거야?
지석 ...
덕구 ... 밥 먹구 가자. 내가 쏠께.
지석 ...
덕구 ... (반응 없자) 오늘 춥다 그지?
지석 (짜증나 버럭) 그럼 겨울인데 춥지 덥냐? 눈치 좀 보
지 마 새꺄! 사람 기분 드럽게 왜 이케 눈칠 살펴? 내가 뭐 당장 뒈
지냐?
말해놓고 나니... 죽는다! 어색한 침묵.
지석, 차문을 따려다가... 만다. 스산한 풍경 속에 쓸쓸
한 두 사람...
11. 동 / 언덕배기 (해질녘)
지석과 덕구, 지는 해를 보며 쓸쓸히 벤치에 앉아있다.
지석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
덕구 그거 내 십팔번이잖아. 30년 내 레파토리.
지석 누가 더 되는 일 없는지 얘기 해볼래?
덕구 해볼래? 난 태어나고 석달만에 엄마 돌아가셨어.
지석 난 태어나고 걷기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한테 맞았어.
덕구 ... 난 입학 허가서 받아놓고 비행기표 살 돈 없어서 유
학 못 갔어.
지석 난 비행기표까지 장인어른이 사줘서 비굴하게 눈치 보
면서 유학했어.
덕구 배부른 소리. 난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집사람도 없고
애기도 없어.
지석 난 돈도 있고, 집도 있고, 집사람도 있고, 이쁜 애기도
있는데...
덕구 ...
지석 난 쫌 있으면 죽어.
덕구 ...
지석 난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못 만나. 쫌 있으면 죽는
데... 못 만나.
덕구 씨이... 진짜 되는 일 없다.
지석 (울컥해 그래도 우기는) 내 레파토리라니까.
쓸쓸히 노을을 보는 두 사람... 멀리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벤치가 보이는데...
덕구 (E) 정수가 봤다 그러드라고. 어떤 남자 차에서 내리길
래 누구냐고 그랬더니 남편이라고...
지석 (E, 한참 만에) ... 어떤 놈이래?
덕구 (E) ... 모르지.
지석의 얼굴로 가면... 무슨 생각인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지석 ... 잘 산대?
덕구 ... 몰라.
지석 ...
12. 미연 집 / 거실 (밤)
나란히 서 있는 미연과 태훈으로 넘어온다. 태훈 부친
의 제사 중.
영화가 상을 다 만지면, 태훈, 앞으로 가 무릎을 꿇어
술잔을 든다.
영화가 잔에 술을 따른다. 향 위에 세 번 돌린 후 상에
올리는 태훈.
모두들 (영화와 영화 남편, 훌쩍 큰 예종, 태훈과 미연)
절을 하려 정열하고 선다.
영화 (태훈과 미연에게, 낮게) 소원 빌어. 애기 달라고
모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하는데, 미연이는 무
뤂을 꿇은 상태서 멈춘다. 상체는 숙이지 않고 무릎 꿇고 생각에
빠져있다. 멍한 그 얼굴에서.
[INS//2부. 미연의 옷 속에 입김을 불어넣어주던 지
석. 행복해하는 미연. -오디오 없이 그림만]
모두들 절을 하고 일어나는데 전혀 느끼지 못하고 여
전히 무릎 꿇고 있는 미연. 뭐라고 말은 못하고 그런 미연을 보고
있는 식구들. 미연, 뒤늦게 분위기를 간파하고 일어나 선다. 미연
이가 일어서자 다시 절을 하는 사람들. 이번엔 미연이도 엎드리
고. 다 같이 엎드린 모습에서.
13. 미연 집 / 주방과 거실 (밤)
미연, 굳은 얼굴로 씽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
다. 거의 마무리 단계.
태훈과 매형은 거실 상에 둘러앉아 간단한 술상을 마
주 하고 두런두런 얘기하고 있고, 영화는 과일을 깎고 예종은 TV
를 본다.
시선 내리고 묵묵히 설거지하는 미연의 얼굴 위로,
지석E 우리... 3개월만 살자...
미연, 이내 맥 놓는다. 초첨 없는 눈빛. 그러다 옆에 정
종병을 본다.
미연은 거실을 등지고 서서 몰래 밥그릇에 정종병을
기울인다.
물마시듯 고개를 젖혀 꿀꺽꿀꺽.
태훈, 거실에 앉아 있다가 그걸 봤다. 그러나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못 본 척.
미연, 다 마시고 그대로 맥놓고 있다. 가늘게 후...
14. 지석 집 / 침실 (밤)
등을 돌려 누워있는 지석. 눈을 감고 있지만 자는 건
아니다.
정란, 절망에 빠진 얼굴로 한쪽 테이블에 앉아서 그런
지석을 보고 있다.
정란 ... 언제 들어 왔어요?
지석 ...
정란 ... 늦었네요.
지석 ... (대답 없다)
정란 ... 덕구씨랑 있었어요?
지석 ... (대답 없다)
정란 (보다가 침대로 와 앉아 두 팔로 침대 짚고) 여보.
지석 ...
정란 혜진이 아빠.
지석 (그 상태로 눈만 뜬다)
정란 대답 좀 해봐요.
지석 덕구랑 있었어.
정란 ... 그게 다에요?
지석 ...
정란 ... 나한테도 좀 살갑게 해주면 안돼요? 당신 덕구씨나
학생들이랑 있을 때 보면, 재밌는 말두 많이 하고 가끔 무섭게 화
도 내고 그러든데... 나한테도 그렇게 해주면 안돼요? 왜 나한텐
안 그래요? (울컥) 내가 덕구씨만도 못해요? 당신 아내잖아. 당신
딸 엄마잖아.
지석 ... 이상하게 당신한텐 그게 안돼. ... 당신 집안 말아먹
은 죄인.
정란 여보!!
지석 ... 당신 앞에만 서면 입 다물어져.
정란 ... 꼭 그래야 돼요? 끝까지... 그래야 돼요?
지석 ...
정란 ... (손을 들고 똑바로 앉아 등 돌리고) 이상해... 말없
는 당신, 차가운 당신은 그대론데, 왜 나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
분일까. 당신이 더 절망적일텐데... 왜 나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
분일까...
15. 미연 집 / 거실 (밤)
식탁에는 씻은 제기와 그릇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영화의 식구들은 모두 가고 없다.
테훈,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미연의 앞에 다기
셋트를 내려놓는다.
태훈 (녹차를 따르며) 아까 뭐라고 소원 빌었어?
미연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만 살게 해 달라고. ... 시시해?
태훈 적당해.
미연 태훈씬 뭐라고 빌었어?
태훈 애는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 지금 만큼만 행
복하게 살게해달라구.
미연 시시해...
태훈 뭘 더 바래...
미연 (그런 태훈을 가만히 본다)
태훈 (잔을 들어 미연에게 주며) 마시구 푹 자.
미연 (손에 들린 잔을 내려다본다) ... 맞어... 뭘 더 바래...
(한 모금 마신다)
(F.O)
16. 대학 / 지석 연구실 (낮)
손에 들고 있는 [산업심리학과 2007년 1학기 학사일정
표]가 보인다.
병찬 (E) 뭘 그렇게 보냐?
지석, 학사일정표를 손에 들어서 보고 있다.
병찬이가 소파에 앉아 주머니에 손 넣고 가만히 있다.
지석 이천칠년... 1학기 학사일정표...
병찬 ...
지석 이천칠년... '서기 이천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
대...'라고 옛날에 김성희가 불렀던 노래. 기억 나냐?
병찬 ...
지석 우주도 못 가보고... 이천 칠년 앞자락만 살다 가겠
군...
병찬 ... 췌장암 3기라고 해도 호전되는 경우도 종종 있
어. ... 항암치료해보자.
지석 ...그 얘기 할라구 왔냐? 그만 좀 하자 그 얘긴.
병찬 (날선) 딴 환자들은 어떻게든 살려 달라구 아우성인
데, 넌 무슨 똥배짱이야? 어쩔라구 배짱 튀겨, 이 판국에?
지석, 한참 만에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지석 겁나. ... 병원 들어갔다가 영영 다시 나오지 못할까봐.
병찬 !!
지석 안 가구 싶어... (허한 얼굴로 창밖만 보는)
17. 대학 / 건물 복도 (낮)
미연, 벽에 기대어 신발로 바닥 툭툭 치고 있는데,
시경, 강의실에서 나온다.
시경 (의외, 반가움) 오, 아줌마가 왠일이야?
미연 ...
시경 왠일로 날 다 찾아왔어?
미연 ......
시경 어? 왜 말 못하고 수줍어하지? 뭔데 그래 아줌마?
미연 (고민하다가, 말자 싶어) 그냥 지나가다가 보고 싶어
서. 들어가. (돌아서는데)
시경 (막아서고) 사람 설레게 왜 그래? 그 말 진짜면 내가
여기서 연애 걸어야지.
미연 ...
시경 뭔데 그래?
미연 ....... (고미니하다가 결국) 컴퓨터 잘해?
18. 동 / 도서관 컴퓨터실 (낮)
시경, 컴퓨터 앞에 앉아있고, 미연, 의자를 끌어와 옆
에 앉은 상황.
시경 (검색하다가) 검색창에 찾는 사람 이름 치면 안 떠?
미연 ... 안 떠.
시경 (치며) 웬만한 대학교 홈페진 뜨던데. 이거 해킹하다
들키면 퇴학인데. 나 퇴학되면 아줌마가 책임질 거지?
미연 ...
시경 (미연 보며) 이름이 뭐냐구?
미연 ... 현, 지, 석. 교직원인지 교순지 아무 것도 몰라. 공대
나왔으니까. 그쪽으로 찾아보면 빠를 꺼야. 교수되긴 이른 나이니
까 연구원이나,
시경 (OL) 있네. 현, 지, 석.
미연 (모니터를 보는)
시경 교순데? 건축공학과. (클릭하며) 이 사람 맞어?
미연 (모니터를 보는 표정. 지석이 맞다)
19. 동 / 지석 교수실 안 (낮)
지석, 연구실에서 일반전화로 통화중이다.
지석 (차분하고 덤덤하게) 어 정수야. 나다. 지석이. 덕구한
테 니 얘기 들었어. 응. 같은 학교에 있으면서 얼굴보기가 쉽지 않
다. (듣다가... 아주 건성처럼) 참 미연이 결혼했대매? (듣는) 응...
어... 뭐하는 남자래? 은행? 무슨 은행? (듣다가) 아니, 그냥...
20. 동 / 밖 복도 (낮)
계단 끝에서 조심스레 천천히 올라오는 미연.
문들의 명패들을 하나하나 보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온
다.
한 명패를 보고 멈춰선다. [현지석] ... 미연의 눈빛이
출렁인다.
지석과 마주 서있듯이, 명패를 보며 분과 마주 서 있
는 미연.
[현지석]이란 명패와 미연의 서글픈 표정이 왔다갔
다...
그때 문이 안에서 덜컥! 열린다. 쳘렁하는 미연의 눈빛
이 간 다음.
문에서 나온 사람은 지석이가 아닌 여학생.
여학생은 근로학생처럼, 한손엔 빈꽃병과 걸레를 들
고 있다.
누구신지 하는 여학생의 표정을 뒤로하고 황급히 사라
지는 미연.
문틈으로 본 교수실의 지석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미연 (E) 오늘 늦어요? 그냥... 했어. 일찍 들어오라구.
21. 피비센타 / 상담실 (낮)
태훈, 책상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다.
앞에 사람이 있어 목소리를 낮추는...
태훈 안 늦어... 지금 상담중이야.
태훈이 시선을 들면 맞은 편에 지석이 앉아있다.
지석, 책상 위에 있는 미연과 태훈의 다정한 사진을 보
고 있다.
그런 사진을 보는 지석의 모습 위로.
태훈 (E) 음. 알았어.
태훈 (미소) 음... 나두...
지석 (그 말투를 정확히 캐취한 눈빛. 부부사이 좋군...)
태훈 (끊으며 정중하게) 죄송합니다. (부드럽고 친근하게)
고객님의 자산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상담내용이 달라지겠지만,
자산관리 방면으론 솔직히 아직까진 부동산이 안전하다는 게 저
희 생각입니다. 많은 분들이 펀드에 뛰어들지만, 수익을 내는 비율
은 이십 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석 (빤히 태훈을 보는)
태훈 ... ?..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 정확한 자산을 밝히
지 않으신 상황에선 이 정도 밖에 해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궁금하
신 거라도...?
지석 결혼한 진... 얼마나 되셨어요?
태훈 ? ... (사진 보며) 삼년... 돼 가고 있습니다.
지석 아인...?
태훈 .. 아직요.
지석 ... (미묘한 안심)
태훈 팔자엔 있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웃음)
지석 (유도심문) 아이 문제로 부부 사이에 금이 가기도 하
죠.
태훈 (이상한 놈이다 싶지만 직업적 친절로) 결혼의 목적이
아이를 낳기 위한 것만은 아닌데, 그 이유만으로 금갈 이윤 없죠.
지석 (유도심문) 남잔 그런데 스트레스 받다가 보면 사랑두
식고... (젊은 여직원을 보며) 다른 여자한테 눈도 돌아가고... 그러
잖아요.
태훈 (정말 순수한 진심으로) 남녀 사이에도 의리가 있어야
죠. 아시잖아요. 와이프만한 동지도 없고, 남편만한 동지도 없다
는 거.
지석 !! (이내 가볍게 웃으며) 독립운동하시려나, 웬 동지?
태훈 !!
지석 세상에 의리 지켜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남녀 사이
에까지 의릴 지켜요? 뭔 조직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 나타날 때
마다 그 사람하고 살면서, 짧은 인생 행복하게 살다 가는 게 장땡
이지... 참 깝깝하게 사시네.
태훈 (살짝 감정적이 된다) 사랑에 다음 단계 맛을 못 본 사
람들이 대개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지석 !!
태훈 사랑이 정이 되고 의리가 되고, 부부가 동지가 되는
데, 그게 연애하던 시절보다 절대 맛이 떨어지는 감정이 아니더라
고요. 사랑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변한 것도 아니고, 업그레이드
됐다고 해야 하나? 굉장히 든든해요. 연애할 때 보다 더 잘해주고
싶고.
지석 !!
태훈 결혼해서까지 사랑 운운하는 건, 철이 들 들었다고 봐
야죠.
지석 !!
태훈 (분위기 회복하려) 갑자기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렀
네요.
지석 (기운이 떨어진다)
태훈 (사람 좋게) 어쨌든, 고객님께 의리를 지키겠습니다.
지석 (그냥 본다) ...
태훈 ??
지석 (참 괜찮은 놈이구나 싶은. 그래서 쓸쓸한...)
22. 피비센타 앞 (낮)
일반 고객들로 분주한 은행 내부.
그 분주한 사람들 사이로 점점 멀어지는 지석의 뒷모
습.
그런 지석의 뒷모습을 말없이 보고 서 있는 태훈.
그때! 지석, 멈춰서 태훈을 돌아본다.
태훈 !!
지석, 미소 띠며 다시 돌아서 간다.
태훈, 그런 지석을 보고 있다. 뭔가 연민이 생기는 거
같기도 하고.
여직 (E) 김팀장님!
보면, 여직원,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 수화기 들고,
여직 소공동 지점 전홥니다.
태훈 돌려줘요.
지석의 뒷모습을 보고 센타 안으로 들어가는 태훈.
23. 은행 밖과 피비센터 안 (낮)
#지석, 밖으로 나와 은행의 커다란 유리창을 따라 걷다
가 문득 멈춰서 안을 본다.
유리창 건너건너 안에 태훈이가 자리에 앉아 전화 받
고 있는 게 보인다.
지석, 가만히 보고만 있다.
#태훈, 전화 통화를 하며 고개를 들다가 밖의 지석과
눈이 마주친다.
두 사람, 누구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쳐다보고
있다.
태훈의 시선에서 보면, 밖의 지석이가 강한 눈빛으로
태훈에게 뭐라고 말한다. 물론 소리는 들리지 않고.
지석 '(하는 말은) 나, 당신 아내 사랑해.'
태훈, 뭐라 그러는 건가 의아하면서도 뭔가 강한 땡김
을 받는데,
#지석의 컷으로 넘어가면,
지석 나 당신 아내 사랑한다구우!!
태훈 !!
지석 당신 아내랑 살다 죽는 게 소원인데... 그래두 돼?
태훈 !!
지석 ... 안돼?
태훈, 그 타이밈에 시선 떨구고 다시 통화에 몰두.
지석, 말없이 태훈을 본다. 쓸쓸한 얼굴...
#태훈,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어보면 지석이 없다.
태훈 !!
24. 미연집 / 거실 (낮)
소파 다 뒤집어놓고, 청소기를 밀고있는 미연.
[플래시 컷 2부.]
지석 너랑 나는! ...사촌이야. 짐승이 아닌 이상 이 땅에선
절대 안 되는 사촌.
지금도 문득문득 그 생각이 날 때마다 돌아버리겠는
데, 평생을 어떻게 사라아?
미연 (네발로 기어 박박 바닥을 닦으며) 죽는다니까 내 생각
이 났니? 왜? 그렇게 침 뱉고 버리고 갔으면서 왜?!!
[플래시 컷. 3부]
지석 우리... 3개월만 살자. 나랑 3개월만 살아줘라, 응?
미연 (빨래 세탁기에 처넣으며) 용서받고 가야 천국 갈 것
같아서? 용서? 난 못해. 어떻게 용설해? 난 못 해. 안 해. 죽어도 못
해!!!
[플래시 컷. 4부 엔딩]
엘리베이터. 미연과 정란이 사이에 서 있는 지석.
정란 미국으로 가요. ...미국 가서 치료해요. ... 거기서 암은
암 것도 아냐. 안 죽어.
그쯤 되자 주방의 오디오를 켜서 볼륨을 올려버린다.
시끄러운 음악이 쩌렁쩌렁.
미연, 필사적인 기분이 되어 뽀얗게 빤 식탁보를 베란
다 빨랫줄에 걸고 탁탁!! 물기를 턴다!!
미연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동정할 필요도 없어. 나랑
은 아무 상관도 없어.
미연, 악착같이 빨래를 터는데, 그때 음악이 바뀐다. <
샌프란시스코>
동작이 멈춰지는 미연... 마음이 무너져내려 시선 내리
고 가만...
25. 산소 / (해질녘)
지석, 무덤 앞에 등 돌리고 앉아, 쓸쓸히 산 아래 풍경
을 바라보고 있다.
지석 나 쫌 있으면 아부지 옆으로 가요. 좋으시겠어요. 맨
날 옆에서 때리고 구박할 수 있어서. ...아부지 땜에 병난 거에요
나. (핑그르) 인생 이렇게 짧을 줄 알았으면... 끝까지 아부지 말
안 듣고 개기는 건데...
지석, 풍경을 보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산소
쪽으로 돌아앉아 무릎 꿇고,
지석 아부지 나 말 잘 들으께요. 아부지 옆으로 가면 진짜
말 잘 들으께요. 그니까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줘요. ... 미연이, 미
연이 제발... 나한테 돌려 보내줘요. ... (떼쓰듯 크게) 아부지 귀신
이니까 할 수 있잖아!!
지석, 무덤에 머리박고 끄윽끅.. 울음 터지며,
지석 나 좀 어떻게 해줘요. 나 좀... 나 좀... 나 좀...
그렇게 무덤에 머리 박고 꺼이꺼이 우는 지석.
26. 미연 집 앞 (밤)
미연, 화단 턱에 쪼그려 앉아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
다. 추위에 코를 훌쩍이며, 콧물을 닦다가 피식, 헛웃음이 난다.
미연 웬 콧물...
퇴근해 오던 태훈이 미연을 본다.
태훈 뭐 해?
미연 당신 기다리다가 시트콤 소재 할 만한 아이템 생각나
서.
태훈 추운데 들어가서 쓰지.
미연 (콧물 훌쩍이며, 적고)
태훈 (다가와 옆에 앉으며) 재밌는 거야?
미연 제목. 코로 우는 여자. (또 훌쩍)
태훈 코??
미연 아주 독한 여자가 있어. 아무리 슬퍼도 절대 울지 않을
라구, 이 앙 물고 참는 여잔데, 슬픔이 극에 달하면, 눈물 대신 콧
물이 줄줄줄 흐르는 거야... 눈물은 참아져두 콧물은 안 참아지거
든. 아무리 아무리 참아두 콧물은 절대 못 참아. 캐릭터 딱 나온
다. 독하나 약한 여자. 게스트 활용해서 코로 물만 제대루 빼주면
대박이겠다.
태훈 으... 저질개그다.
미연 .. (목소리 커지는) 이게 얼마나 애절한 얘긴 줄 알어?
태훈 !
미연 ... 우리 할머니 얘기란 말야.
태훈 할머니가 왜 코로 우셨는데?
미연 ... 몰라. ... 그럴 일이 있었대. (훌쩍이며 콧물을 닦는)
태훈 ... (고개를 숙여 미연의 얼굴을 보고) 우는 거야? 코
로?
미연 이건... 감기야. (콧물 닦는)
태훈 (피식) 귀여운 짓만 골라한다.
27. 지석 집 / 서재 (밤)
정란, 컴퓨터 모니터에 뜬 답장을 보고 있다.
영어로 된 메일을 쭉쭉 올려보는 그림에,
남자(E) (영어, 자막) 미국이 선진의료라 하더라도, 이미 이 정
도로 진행된 암에 대해선 치료효과를 장담 못하는 건 한국이나 미
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답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정란, 암담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떨리는 손으로 핸
드폰을 누른다.
정란 (영어) 나에요. 박정란. 어디 어디 컨텍해 본 거에요?
이 분야에 최고래요? (언성 높아져) 최고냐구요? ... (터지듯, 우리
말) 누가 최고래, 누가아! (흐느껴 운다)
28. 지석 집 / 거실 (밤)
지석, (이제 막 들어온 듯) 서재 문 앞에서 서 있다.
안에선 정란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지석, 말없이 돌아선다.
29. 지석 집 / 침실 (밤)
지석, 침대 모서리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앉아
있다.
30. 미연집 / 침실 (밤)
잠을 들지 못하는 미연.
태훈이 몸을 뒤척이자, 미연,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
간다.
31. 미연집 / 거실 (밤)
낯선 곳인 듯 거실을 오가다,
바닥을 보더니 쭈그려 앉아 손가락에 침을 묻혀 얼룩
을 닦아낸다.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베라나다 밖 환하게 뜬 달을 바라
보는 미연.
미연 (NA) 할머니가 그리웠다. 만약 살아계신다면 지금의
날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 맘껏 울라고 하셨을까, 아니면 콧물도
흘리지 말라고 하셨을까? ... 할머니한테 물어보고 싶었다.
(F.O)
32. 식당 (낮)
손님없이 한가한 식당.
지석모가 고스톱을 치다가 판을 들러 엎어 싸움이 벌
어진 상황이다.
중년1과 싸움이 붙고, 중년2는 말리는 상황.
지석모 에우에우! 교양머리 없는 인간하고 상종을 한 내가 미
친년이지. 내가 미친년이야!
중년1 (OL) 허. 교야앙? 교양 있는 게 잘 놀던 화투판을 뒤집
냐?
지석모 이 여편네가 어따 대고. 너 우리 아들이 누군지 알어?
중년1 (OL) 알어알어알어. 그 눔의 교수 교수. 췌! 교순지 최
순지 알 게 뭐야. 말론 뭘 못해. 우리 아들은 대통령이다!
지석모 (확 일어나며) 이게 증말!
33. 식당 앞 거리 (낮)
지석모, 식당을 나와 뿌해서 터덜터덜 걸으며
지석모 가만있으면 팔만원 날라가게 생겼는데, 그럼 안 들러
엎어? (한숨) 왠수니 악수니 해도, 남편 그늘만한 곳ㅇ 없네. 그래
두 그땐 돈 땜에 쪼잔하겐 안 살았는데, 에으...
그러다가 멈춰서 핸드폰을 꺼내본다. 전화할까말까 하
는 표정.
34. 지석 집 / 거실 (낮)
정란, 통화하고 있는데 달갑지 않은 상대라 서둘러 끊
으려는 태도가 묻어난다.
뒤쪽 거실에선 아줌마가 장봉지를 들추며 난처한 듯
이쪽을 보고 있다.
지석모 (F) 아 어지간히 멀어야 가볼 엄두를 내지, 손녀딸 목
소리라도 한번 들을라치면 사둔어른들 신경 쓰여서 원...
정란 시간 맞춰서 전화하시는 거 뭐라 안하세요.
지석모 (F) 그래도 그게 쉽냐? 니가 몰라스 그나분데 사둔이
라는 사이가 원래,
정란 (OL) 혜진이한테 제가 자주 전화라하고 할게요. (끊으
려는 듯) 그럼.
지석모 (f, 끊을까 봐 서둘러) 참! 김치는 좀 있냐? 이번에 얼
가리 담았는데... 좀 갖다주랴?
정란 (참다못해, 그래 원하는 거 준다) 오늘 통장으로 용돈
넣어드릴게요.
지석모 (f, 좋으나 내색 않으려) 아유 뭘. 아직 날짜도 남았는
데...
정란 (깝깝)
35. 동 / 주방 (낮)
시커먼 장어를 탁탁 자르는 손.. 정란, 어설프나 의욕
이 앞선다. 일하는 아줌마는 정란의 서슬에 쉽게 껴들지 못하고 힐
끗 힐긋 눈치만 보는데, 정란의 칼질이 안 먹히는 듯 계속 탁! 탁!
힘차게 내려친다. 썰다가 손을 조금 베인다.
정란 스!
아줌마 제가 하께요...
정란 (OL, 차갑게) 됐어요.
물을 틀어 손을 닦고, 다시 탁! 탁! 칼을 내려치는데,
섬뜩하다.
36. 술집 (밤)
굳은 얼굴로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는 미연으로 넘어
온다. 이미 어느 정도 취했다. 연기자와 스텝들로 가득 찬 회식 자
리. 뚝 떨어져 앉은 리애, 슬쩍 미연을 흘겨보곤 비웃고, 주변 사람
들에게 오버해서 상냥하게 마셔요~ 하며 건배를 제의한다. 미연이
옆에 앉은 왈숙, 그런 리애와 미연의 기류를 느끼곤,
왈숙 왜 그래? 나 오기 전에 뭔 일 있었어?
미연 (자작하자)
왈숙 (병 뺏어 따라주며) 천천히 좀 마셔라... (가운데 앉은
정피디 흘기며) 남의 잔치에 불러놓구 뭐야 뻘쭘하게... 쫌 보재서
일 소개시켜주는 건줄 알고 얼씨구나 해서 왔구만...
남자 (대각선으로 멀찌기 앉아) 김작가님 한잔 받으셔야죠.
왈숙 나 챙겨주는 건 성태 밖에 없네. 그래 따라봐라...
왈숙이가 잔을 들고 그쪽으로 옮기고,
정피디가 미연의 앞으로 바짝 앉는다.
정피 작가가 되가지구 연기자들 불평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지... 연습 때 고작가가 기분 나쁘게 했지 뭐. ... (보다
가) 왜 그래 요즘? 친절한 미연씬 어디로 가고, 맨날 심각한 얼굴
로, 남편이랑 사이 안 좋아?
미연 (상대도 하기 싫다)
정피 작가랑 배우 사이에 껴가지구, 내가 아주 힘들어 죽겠
어.
미연 (덤덤) 그럼 죽어요.
정피 뭐?
미연 죽어. 죽겠다며. (따르며, 혼잣말 하듯) 못 죽으면서.
정피 (강단 있게) 고작가!
일순 사람들 모두 시선 집중하고, 왈숙도 이쪽을 본다.
상관없이 벌컥벌컥 들이키는 미연.
37. 술집 / 화장실 (밤)
왈숙, 미연을 밀며 들어와 개인구역에 넣는다.
왈숙 들어가. 어째 많이 마신다 했다.
개인구역. 미연, 변기에 안 앉고 벽에 머리를 박고 서
있다.
왈숙, 자신도 개인 구역에 들어간다.
미연, 벽에 머리 박은 채로 눈물이 흐른다. 그 모습에
왈숙 (E) 왜 생전 안 하던 지시을 하구 난리야. 늙었냐? ...의
유, 요즘 불안불안하다 했드니만 결국... 술기운 빌어서 사고치지
마라.
미연, 울다가... 나가버린다.
왈숙 (나가는 소리 듣고, E) 같이 가아!
38. 식당 앞 / 일각 (밤)
미연, 핸드폰을 손에 들고 걸까말까 괴로워하다가...
결심한 듯 확 플립을 여는데.
39. 대학 / 지석 연구실 건물 주차장 (밤)
지석, 시동 끈 차안에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가... 걸
기를 포기한 듯 시동을 걸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 액
정을 보고 멈칫. 미연이다. 떨린다. 받는다.
#식당 앞의 미연과 교차.
지석 ...여보세요.
미연 (대뜸, 저돌적) 누가 죽는다는 거야? 누가 죽는단 거
야??
지석 ...!!
미연 ... 말 해. 누가 죽는단 거냐구!
지석 ... 내가.
미연 (기막혀 웃음) 너 참 어처구니 없다. 누구 맘대루 죽
니? (억장이 무너진다. 눈물) ... 누구 맘대루 죽어? 누구 맘대루
우-? ... 내 허락 받고 죽어. 내 증오, 내 가슴에 남은 한, 내 미움,
다-- 바닥나면 그때 죽어. 그 전엔, 절대 못 죽어. 내가 억울해서,
그 전엔 안 돼. ... 난 아직, 난 아직, 증오가 가득한데, 죽어 없어지
면, 너무 허무해서, 너무 억울해서 안 돼. 내가 미워하고 미워하다
지치면, 그때 죽어. 내 가슴에 박힌 주홍글씨... 다 지워지면 그때
죽어... 대답해! 그렇게 한다구 대답해!
지석 ... (억장이 무너진다)
미연 (크게) 대답해-!!
그때 옆에서 확 핸드폰을 뺏어서 접어버리는 왈숙.
미연을 강하게 쳐다본다. 뭐하는 짓이야? 하는 시선.
미연,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이 달달달 떨린다.
40. 지석의 차 (밤)
#차 안.
지석 (끊긴 전화기에 대고, 크게) 나두 그러구 싶어! 그니까
같이 살자구우-!
핸드폰을 내동댕이친다.
#차 밖.
덩그러니 있는 차에서, 핸들에 머리박고 소리 죽여 우
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41. 식당 앞 / 일각 (밤)
미연, 아직도 진정되지 않은 듯 울고 있는데,
왈숙 (차갑게) 뭐하자는 짓이야? 허락 받고 죽으라는 게, 그
게 좋아한다는 뜻이지. 니 증오 니 미움 바닥나면 죽으라는 게, 그
게 아직도 좋아한단 뜻히지! 그 사람한테 그런 말하면 어쩌자는 거
야?
미연 ... 그 사람.. 죽는대.
왈숙 !! ... 그래서?
미연 죽는다구...
왈숙 그래서어? ... 미친 새끼. 정말 미친 새끼네 그거. 죽는
마당에 지하고 싶은 거 다 하구 죽겠단 거야 뭐야?
미연 (듣기 싫다) 그런 거 아냐.
왈숙 (OL) 너 버렸던 놈이야! 죽는다니까 양심이고 뭐고 없
어진 거야. 그냥 맘 가는 대로 막 살아보겠단 건데, 왜 그걸 몰라
이 바보야.
미연 (버럭)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냐!
왈숙 ... !!
미연 (마음 가라앉히고) ... 너무 고마워.
왈숙 ...
미연 그 사람은 죽는다는데! 난,죽기 전에 나 찾아와준 게
너무 고마워. 그 사람한테 나 그냥 흘러가는 물 아니었구나... 싶
은 게... 너무 고맙다고... (감정 솟구친다)
왈숙 ...
미연 그 사람은 죽는다는데 내 맘은 이래... 누가 더 나빠?
저 죽는다고 나 찾아온 그 사람이랑, 사람 죽는다는데 속없이 기뻐
하는 나랑, 누가 더 나쁜 건데-? (울부짖듯) 대답해봐. 대답해 보라
구--!
왈숙 고미연!!
그와 동시에 술집 앞으로 차가 와서 서고, 거기서 태훈
이 내리는 것을 본다.
바짝 긴장하는 왈숙.
왈숙 (낮게) 태훈씨 왔어. (미연을 잡고) 너 입 다물어. 꾹
다물어.
태훈 (미연과 왈숙을 보고 그쪽으로)
왈숙 (밝게) 안녕하세요.
태훈 (꾸벅) 안녕하세요.
왈숙 (밝게, 미연 보며) 좀 취했어요. 주는 대로 받아먹어
서...
태훈 (미연을 데리고 차로) 요령껏 마시지.
왈숙 (쫓아가며) 얘가 원래 요령껏이 안되는 애잖아요. 답답
이...
42. 식당 앞 / 일각 (밤)
태훈, 뒷좌석에 미연을 태우고,
왈숙, (안에서 챙겨나온) 미연의 가방을 차 안에 밀어
넣어주고,
태훈 (문 닫으며 왈숙에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왈숙 (상냥) 예.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태훈, 차에 올라타고 시동 걸고 출발하려는데, 차안에
서 고개 떨구고 미연의 모습이 왈숙의 눈에 위태하게 보인다. 출발
하는 차를 급하게 내려치며 잡는.
왈숙 잠깐만요 잠깐만요.
태훈 (앞 창문 여는)
왈숙 (안에 들이대고) 저두 하룻밤 신세지면 안될까요? 혼
자 택시 타기 무서워요. 저 이래뵈두 탐내는 아저씨들 많답니
다.
43. 달리는 태훈의 차 안 (밤)
미연,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뭐라고 말할 듯 왈숙
을 보는데,
왈숙, 미연의 손을 꼭 잡는다. 아무 말 말라는 듯.
미연, 창밖을 보며 눈물을 닦는데,
태훈 (룸미러로 보곤) 당신.. 울어?
왈숙 술버릇 또 나온다. 또 나와. 난 술 취해서 우는 여자
젤-싫드라. 젤-주접이야. 한 대 패면 다신 안 그러는데. 제가 언
제 날 잡아 한 대 패겠습니다. 괜찮죠?
태훈 (웃는)
왈숙 (능청) 아 대답 안하시네...
왈숙, 미연의 손을 조용히 꽈악 잡는다. 살얼음판 같아
서 조마조마하다.
44. 지석 집 / 거실 (밤)
적막한 거실과 주방.
정란, 소파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가스레인지 위엔 커다란 찜통에 방어를 고고 있다.
정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건다. 안 받는다. 핸드폰
을 놓는다. 답답하다.
45. 미연 집 / 침실 (밤)
미연, 외투만 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고,
태훈, 이불을 덮어주곤 보다가 나간다.
46. 미연 집 / 거실 (밤)
왈숙, 소파에 늘어져 앉아 있다가,
태훈, 나오자
왈숙 (일어나며) 자요?
태훈 곯아 떨어졌어요. 주무세요. (현관 쪽으로)
왈숙 어디 가세요?
태훈 약 사러요.
왈숙 너-무 자상해 주시니까. (배웅하며) 다녀오세요. (하는
데)
태훈 (나갔다 돌아보며) 저기..
왈숙 ??
태훈 요즘 미연이...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왈숙 예? (허둥지둥 수습) 아 오늘... (마신 거?) ... 별 일 아
녜요. 우리 술 마시는 일 뻔하잖아요. 시청률 안 나오면 작가 바꿔
라, 막 내려라.
태훈 ... 옛날에... 처음 만나던 해에... 디게 힘들어했었는
데... 요즘 꼭... 그때 얼굴이에요.
왈숙 (철렁!)
태훈 ... 남편한테 못하는 얘기, 친구들끼린 한다던데...
왈숙 (얼른 손사래) 아우 그런 거 없어요. 오늘 연기자 하나
가 미연이한테 뭐라구 했어요. 거기에 피디까지 거들고. 마실 만
했어요 쟤. 나 같음 그-냥 들이 받았을텐데 쟨 그게 안 되는 애잖아
요. 그냥 괴로워하구... 그거에요. 별 거 아녜요.
태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 왈숙씨가 미연이 옆에 있어
줘서 든든해요.
왈숙 (가녀린 척) 나 힘 안 쎈데... 빈혈두 있구...
태훈, 미소 지으며 나가면,
왈숙 (상냥) 다녀오세요...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굳은 얼굴로 침실 쪽을 본다.
47. 미연 집 / 침실 (밤)
왈숙, 침실 문을 열고 서서 안을 들여다본다. 차가운
시선.
왈숙 ... 깨지 말구 쭉 자라. 제발. (문 닫는)
미연,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48. 지석 집 / 거실과 주방 (밤)
어두운 실내. 시계소리는 새벽 한시를 가리킨다.
가스렌지 위에 불이 아주 약하게 켜져 있고, 그 위에
찜통.
문 따는 소리. 사람 들어오는 소리. 보면, 지석이다.
지석, 조용히 서재 쪽으로 가는데, 이때 어둠 속에서
정란 일부러 늦은 거에요?
정란, 식탁 쪽의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있다.
정란 일찍 들어오라고 했잖아요.
지석 ... 미안해.
정란 (혼잣말 하듯) 당신 머릿속이 궁금해. 도대체 무슨 생
각인지...
지석 !! (그냥 서재로 들어간다)
정란, 그런 지석을 본다. 지치고 화나지만 참아야 한
다. 일어나 찜통 쪽으로.
49. 지석 집 / 서재 (밤)
지석의 책상 위로 쟁반이 놓여진다.
장어 곤 약 종지와 옆엔 입가심용 초콜릿 접시와 한과
접시.
예쁜 접시에 초콜릿과 한과도 색벼로 담겨있다.
앉아서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는 지석. 정란이가 내려
놨다.
정란 마셔요.
지석 ... (내려다보기만 한다)
정란 장어 곤 거에요. 체력 회복하고 나서 항암치료 해요.
항암치료하고 어느 정도 잡히면, 그때 수술해도 늦지 않아요.
지석 ... (내려다보기만)
정란 ... (보다가) 그냥 마셔주면 안돼요?
지석 ... (쟁반 보며) 당신은 이 와중에도 예쁜 접시 찾아내
서 색깔별로 초코렛을 담지. 색 조합은 기본이고, 같은 색이 두 개
씩도 안 들어가게.
정란 ...그냥 정성으로 봐주면 안돼요?
정란, 벽으로 붙은 한쪽 의자에 앉는다.
지석을 정면으로 보지 않는 위치에 있는 의자.
정란 ... 그게 당신이 나한테 정을 안 주는 이유에요? 잘한다
고 한 게, 그게 당신을 숨 막히게 만든 건가...
지석 ... 나한테 철두철미했다기 보단, 스스로한테 철두철미
했지. 이 정돈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잘하는데, 받아주지 않는 저
사람이 문제다, 난 문제 없다...
정란 ... (자조 섞인 미소) 꼭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
람 같네.
... (차갑게 지석을 바라보며) 그래서? 못 마시겠어요?
지석 나 말기야. 말기에 항암치료는,
정란 (OL, 일어나 강단 있게) 효과가 있든 없든, 죽든 살든,
해요. 고통스러워도 해요.
지석 !!
정란 난 죽는 당신보다도, (설움에 목 메여) 내가 더 불쌍
해. 당신한테 사랑받으려고 욕 안 먹으려구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살아왔던 내가 더 안쓰럽고 불쌍해.
지석 !!
정란 태어나서 한번두 내가 과부가 될꺼라곤 상상도 못해봤
어요. 혜진이도 마찬가질 거야. 아빠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할 거
야. 그니까 해요. 나를 위해서. 당신 딸을 위해서, 고통스러워도 해
요.
지석 !!
정란 (좀 크게) 살아서 나한테도 따뜻하게 웃어주고 화내고
해줘요! 내 가슴에 한으로 안 남게, 열심히 먹고 살아서 나한테도
웃어주고, 화내구, 가슴으로 날 대해줘요. 가더라도 그렇게 해주
고 가요!
지석 (너무하단 표정으로 본다)
정란 내가 너무해요? (지르듯) 난 당신이 너무 해!!
지석 !! ..... 그만... 포기해.
정란 ... !! (떨린다)
지석 ... !! (묵묵한)
(F.O)
50. 지석 집 / 주방 (아침)
냉장고(에 문가 붙여놓은 듯)를 가만히 보고 있는 지
석. 프레임 아웃.
51. 지석 집 / 침실 (아침)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
정란, 눈감은 채로 한 팔을 이마 위에 올려놓고 가만있
다.
덜컥! 지석이 나가는 현관문 소리가 들린다.
정란, 눈을 뜬다.
52. 지석 집 / 주방 (아침)
정란, 냉장고의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대
로 멈춘다.
[이혼하자]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이혼서류가 냉장고
에 꽂혀있는.
정란, 떼어 들어본다 기가 막힌다.
53. 지석 집 / 욕실 (아침)
정란, 아무렇지 않게 거울을 보며 이를 닦다가 또 다
시 울컥.
진정하려 애쓰면서 이를 닦는다.
54. 미연 집 / 주방 (낮)
이제 막 일어난 듯 초췌한 얼굴로 식탁에 물컵을 놓고
전화하고 있다.
미연 언제 갔어?
#작업실과 교차
왈숙 (냉랭) 내가 거기 갔었던 건 기억나니?
미연 그 정도로 안 취했어.
왈숙 태훈씬 너 취한 줄 알어. 그러니까 취한 걸로 해. 취하
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절망적인 냄새 풍긴 거 어떻게 설명할라구.
그냥 취한 걸로 해.
미연 ...
왈숙 (F) 태훈씨가 그러드라. 요즘 니 얼굴이, 너 첨 만났을
때, 디게 힘들어하던 때, 꼬옥 그때 얼굴이라고.
미연 !!
왈숙 (F) 말없는 사람이라고 눈치 없을까. 정신 똑바로 차려
라.
미연 (듣기 싫어) 끊어.
왈숙 (F, OL) 그 놈한테 전화로 퍼붰던 것도 기억나겠네?
미연 !!
왈숙 (F) 퍼붓고 나니까 좀 시원하냐? 아직두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좀 시원해?
미연 (OL) 누가,
왈숙 (F, OL) 뻥치지 마. 너 그렇게 말했어. 이게 누굴 속일
라구... 너 그 뒷감당 어떻게 할라구 그렇게 막 질러대? 어쩔라구
그렇게 감정 질-질 흘리구 다녀, 어?
미연 끊어.
왈숙 (F) 끊긴 뭘 끊어. 술이나 끊어 기지배야.
OL 미연, 그냥 전화를 끊어버린다. 후...
55. 미연집 / 욕실 (낮)
미연, 세수를 하다가... 동작이 멈춰진다.
고개를 숙인 채로...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
56. 대학 / 지석 연구실 (낮)
지석, 책상에 앉아있고, 덕구, 소파에 앉아서 쳐다보
는.
지석 (혼자 생각에)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큰 거 같드라.
덕구 ...
지석 ... 난 버린 적 없는데. 맘속에서 한 번도 떠나보낸 적
없는데...
57. 원룸 / 주차장 (낮)
왈숙, (노트북을 들고) 차에서 내려 차문을 잠그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왈숙 네에. (반갑고 의외) 예, 태훈씨 왠일이세요? (부러,
샐쭉한) 식사만요? 난 술이 고픈데... (하다가) 아. 참. 안되겠다. 미
연인... 마시면 안 되겠던데요. (반색) 그죠? 걘 당분간 금주령 내
려야 돼요. (신나 가며) 그럼, 총알같이 튀어가겠습니다--.
58. 원룸 / 입구 (낮)
왈숙, 들어와 우편물을 빼 보다가 슬쩍 302호에 눈길
이 간다.
302호의 우편물을 꺼내 이름을 보는데, 받는 사람 이
름 보면, 양. 덕. 구.
왈숙 양... 덕.. 구?? (깬다)
몇 장 넘겨보는데 다 양덕구다.
그냥 김이 팍 새는 얼굴. 우편물을 구겨서 팍 쑤셔 넣
는데,
뒤 돌아보면, 이제 막 들어오려던 덕구, 왈숙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왈숙, 덕구를 보고 휑하니 그냥 올라가 버리는데,
덕구, 다가와 우편물 꺼내서 구겨진 걸 반듯하게 펴며
왈숙이 간 쪽 흘려보며
덕구 (꿍얼) 왜 남의 우편물은 꺼내 봐?
그때! 대뜸 위에서 휙 다시 나타나 장군처럼 내려다보
는 왈숙.
왈숙 착각하지 마요.
덕구 (살짝 놀라고)
왈숙 그쪽한테 관심 있어서 뒤져본 건 아니니까. 맨날 우리
집 문 다느느데, 어느날 갑자기 내 옆에 들어와 버리면, 이름이나 알
아야 신골 하죠.
덕구 (울컥 하나 뭐라고 대꾸 못하겠고)
왈숙 양. 덕. 구! 깬다... (휙 다시 올라가버리고)
덕구 (뒤로 넘어갈 지경) 지지지는! 김왈숙은 더 깬다. 씨이
왈숙 (홱 도로 나와서 보는)
덕구 (철렁!)
왈숙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뻔뻔) 나한테 관심 있나 부
네?
덕구 (기막혀 넘어가겠고)
59. 대형 마트 (낮)
#마트 일각. 태훈, 카트를 밀며, 야채, 훈제 바베큐 등
등을 담으며 통화중,
태훈 어 왈숙씨 초대했어. 어제 그냥 보낸 게 걸려서. 내가
장 다 봐서 가께...
#건강보조 식품 코너.
차가버섯 셋트를 집어드는 손. 정란이다.
점원 (E) 차가버섯이라구요 암환자들한테 좋은 버섯이에
요.
정란이가 굳은 얼굴로 그걸 꼼꼼히 훑어보느데, 그 뒤
로 태훈이가 카트를 밀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정란 (점원에게 넘기며) 이걸로...
하다가 뒤에서 오던 태훈과 부딪힐 뻔. 서로가 목례로
죄송하다는 제스쳐.
60. 마트 주차장 (낮)
#정란, 시동걸고 후진 기어를 넣으며 통화중.
정란 (차분) 오늘 왠만하면... 일찍 들어와요.
쿵!
정란, 놀라서 내리는데, 주차장을 빠져나가려던 태훈
의 차와 부딪힌다.
살짝 눌린 앞 범퍼를 보며 턱을 만지고 있는 태훈.
정란 죄송합니다.
#차 안. 정란, 앞좌석에 상체를 들이밀며 명함을 뒤지
다, 지석의 명함이 눈에 띈다.
#정란, 명함 뒷면에 자신의 연락처를 적어 건네며
정란 이리 연락주세요.
태훈 (받아보며) 연락할 것도 없을 꺼 같은데요 뭐. 신경 쓰
지 마세요.
하다가 뒷면을 보면 [한국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현
지석]
정란 남편 명함이에요. 남편 차라서요. 카센타에서 견적 나
오면 연락주세요.
태훈 (미소)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61. 미연 집 / 주방 (밤)
훈제 바베큐를 정성스레 썰어서 접시에 담는 손. 태훈
이다.
미연, 찌개와 함께 밥상을 차리고 있다. 와인잔도 놓
고.
왈숙, 당근 씹어 먹으며 태훈 옆에서 얘기중이고.
왈숙 나 소개팅 언제 시켜줄 거에요?
태훈 봐서요.
왈숙 왜? 제 얼굴 땜에 난감해요? 소개시켜주고 욕먹을 까
봐?
태훈 아녜요.
왈숙 얼굴? 상관없어요. 미인은 삼일 만에 질리지만, 못생
긴 얼굴은 삼일 만에 익숙해지거든. (돌아서려다 홱 다시) 그렇다
고 내 얼굴이 못생겼다는 건 아녜요. 목소리가 걸걸해서 사람들이
내 얼굴도 대충 보는 거지, 눈 코 입 하나하난 내가 미연이보다 훨
나요. (태훈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그죠?
미연 (앉으며 태훈에게) 와 앉아요.
왈숙 (차려진 상을 보고) 아 살 빼야 되는데. (앉는)
미연 살 뺀다면서 술이야?
왈숙 술 마실 땐 대신 밥을 안 먹잖아.
미연 (하여간...)
태훈 (접시를 갖고 와 앉고) 자 한잔 받으셔야죠.
왈숙 (넙죽 잔대며) 간만입니다아--.
태훈 (따르며) 올핸 꼭 좋은 사람 만나세요.
왈숙 아우 저두 바라는 밥니다-. (태훈에게 따라주고) 가만
보자, 올해라봤자 한 달 남았네. 이거야 원 괜찮은 인간들은 다 물
건너가고, 보이는 건 찌그래기들 뿐이니 원.
미연 그 남자는 어때?
왈숙 (눈 똥그래져) 누구?
미연 언니 위층 산다는.
왈숙 (김새는) 됐다.
미연 왜?
왈숙 이름이 화악-- 깬다.
태훈 (피식)
왈숙 (태훈 보고) 아니 왜 웃으십니까? 김왈숙 니 이름은 얼
마나 때깔 나는 이름이냐고요? 그래서 됐다는 겁니다. 방자와 향단
이도 아니고, 이름으로 부각될 일 있냐고. 끼리끼리 만났다는 소
리 듣기 싫습니다.
미연 이름이 뭔데?
왈숙 양덕구란다. 양 덕. 구!
미연 !! (멈칫, 아는 사람 이름이다)
태훈 심하지 않은데요 뭐.
왈숙 근데 요놈이 내 이름을 아네? 내 우편물을 뒤져본 거
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나한테 맘 있는 거죠? 그죠?
미연 !!! (양덕구)
62. 도로 (밤)
달리는 미연의 차.
63. 달리는 미연의 차안 (밤)
미연, 굳은 얼굴로 운전 중이고, 조수석에 왈숙 앉아
있다.
왈숙 (가슴에 손 얹고) 눈꺼풀이 뜨뜻-해지면서... 알콜 기
운이 퍼질락 말락 하는데... (김새는 얼굴로 미연 보며) 왜 일어나
래? 취해서 실수할까봐? 내가 넌 줄 아냐.
미연 (표정 굳어)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왈숙 누구?
미연 양덕구.
왈숙 (대수롭지 않게) 양덕구처럼 생겼어.
미연 나인?
왈숙 모르지, 내 또래..? (하다가) 왜?
미연 (양덕구.. 맞다...)
64. 원룸 앞 (밤)
미연의 차가 와서 멈추고, 그 차에서 내리는 왈숙.
왈숙 (차안에 대고) 조심해 들어가. 들어가서 전화하구.
(문 닫는)
왈숙, 원룸 건물로 들어가는데,
미연, 출발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다.
왈숙, 뒤돌아 손 한번 흔들어주고 가는데,
그때 덕구가 츄리닝 차림에 검은 비닐봉지 들고 터덜
터덜 오는 게 보인다.
미연, 덕구를 봤다. 맞다. 출렁이는 눈빛.
왈숙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미연에게 입모양 크
게) '저 인간이야. 양, 덕, 구!)
하는데 미연, 안전벨트를 풀로 내려서 덕구를 본다.
왈숙, 제스처하다가 벙찐 표정.
덕구, 뒤늦게 왈숙을 발견하고, 연이어 미연을 발견하
고는 역시 철렁하는 표정.
미연과 덕구,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왈숙, 이쪽저쪽 보며 두 사람의 이상한 기류를 느끼는.
65. 원룸 근처 (밤)
미연과 덕구, 살짝 비껴서 서 있다.
왈숙은 저쪽에 뚝 떨어져 이쪽을 보고 있고.
미연 지석씨... 지금... 어떤 상황이에요?
덕구 대충... 알지 않아? ...요? (오랜만이라 말 놓기 어렵다)
미연 ... 무슨 암이에요?
덕구 ... 췌장암..이요.
미연 ... (어렵게) 전혀, 가망이 없는 거에요?
덕구 ... 모르겠어요. 짧으면... 3개월이라는데...
미연 !! (아... 그래서 3개월만 살자고... 무너진다)
덕구 ... 난 말 주변머리가 없어서, 뭘 어떻게 말해야 될지,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지석이가 걱정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곰곰) 뭐라고 되게 슬프게 말했는데... (번
뜩) 그렇게 말했던 거 같애. 자긴... 미연이 한번도 버린 적 없는
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고... 마음속에서 한번도 놓은 적 없었
는데...
미연 ...
덕구 그것만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상처 없었으면
좋겠다고...
미연 ...
덕구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알아. 지석이 아버지,
사업 어려워져서 지금 와이프 집안에서 막아주지 않으면 안됐었는
데, 지석이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미적미적) 달려오는 차에 뛰
어드시고...
미연 (몰랐던 사실. 마음이 아프다. 후회와 자책)
덕구 지석이 많이 힘들어했어. ...그렇게 너랑 헤어지고 지
금까지... 한번두 내 앞에서 니 얘기 안했어. ...암이란 통보 받기
전까진.
미연 (하... 숨이 터져 나온다)
66. 원룸 앞 (밤)
뚜벅뚜벅 걸어 차로 가는 미연, 후회와 자책에 눈물이
쏟아진다.
덕구, 쭈뼛쭈뼛 왈숙 앞을 지나가는데,
왈숙 (차분하나 무섭게) 3개월만 같이 살잔 그 미친놈이, 그
쪽... 일리는 없고, 그쪽 친구요?
덕구 (기에 눌려 말 못하고)
왈숙 맞구만? ... 어떤 똘팍인지 내가 한번 보잔다고 전해줘
요. (미연 쪽으로 휙 가는)
덕구 (울컥하나 암말 못하고)
왈숙, 차에 올라탄 미연을 내리게 하려는데,
미연, 눈물을 철철 흘리며 그냥 움직이고.
왈숙 (차체를 치며) 내려. 내려. 이따가 가! (미연의 차 그
냥 쉭 빠져가자) 야! 고미연!!
왈숙, 차 꽁무니를 보다가 덕구를 홱 노려본다.
덕구, 쭈뼛쭈볏 외면하고 만다. 비닐봉지만 만지작...
67. 달리는 미연의 차안 (밤)
미연, 울면서 운전을 해간다.
덕구(E) 자긴... 미연이 한 번도 버린 적 없는데.. 마음속에서
한 번도 놓은 적 없었는데... 그것만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68. 지석 집 / 주방 (밤)
홈 빠 정도. 정란, 투명 잔에 보리차 같은 색깔의 차가
버섯 물을 내놓는다.
그 앞엔 지석이 묵묵한 얼굴로 앉아있다.
정란 그냥 물마시듯이 마시는 거에요. 역겹지도 않고 마시
기 불편하지 않아요.
지석 ...
정란 나한테 짐 안 되려고 애쓰지 마요. 그러지 않아도 돼
요. 난 당신 살라고 싶고, 우리 잘 됐음 좋겠어. ...나랑 같은 편 돼
줘요.
지석 ... 당신 인생은... 재미도 없는데 억지로 읽는 소설책
같애.
정란 !!
지석 재미없으면 안 읽어도 되는데, 당신 성격상 손에서 절
대 안놓지. 끝까지 읽기 전엔.
정란 ...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언젠가 재밌겠지... 하면서.
재미없어도 어쩔 수 없지... 하면서.
지석 ... 기회야. 덮어.
정란 (무시하고) 살다보면 재밌는 부분 나올 꺼에요. 나오
게 해줘요. 치료받고 오래오래 살아서 그렇게 해줘요. 그럼 나도
당신이 원하는 거 다 들어주께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지석 !!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정란 네.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그때 테이블 아래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린
다.
액정을 보고 그대로 굳는다. INS// 액정에 보면 미연
이 번호다. [고미연]
지석, 떨림을 누르고 조심스레 받는다.
지석 ... 여보세요.
69. 미연 집 근처 (밤)
차 안의 미연. 핸드폰을 들고, 눈물범벅인 얼굴로 쉽게
말문을 트지 못한다.
70. 지석 집 / 주방 (밤)
지석,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주방을 지나 베란다로 나간
다.
정란 ...!!
71. 미연 집 근처 (밤)
#차안의 미연,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는데,
#베란다에서 주차된 미연의 차를 빼꼼히 내려다보는
태훈. 왔구나... 하는 미소.
#차안의 미연. 여전히 울음 때문에 말을 못하는데,
72. 지석집 / 베란다 (밤)
지석 ...........고맙다. 전화해줘서.
정란 !!
73. 교차 (밤)
#그말에 '하...' 숨이 터지는 미연의 모습.
#전화를 들고 있는 지석과 그 앞에 앉아있는 정란.
#미연의 차를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태훈.
등등의 컷들이 이어지면서.
미연 (NA) 살면서 가장 힘든 건 이유를 찾는 것이다.
내가 고통 받아야 하는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
그는 살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해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손을 들고 소리치고 싶었다.
여기 봐봐! 여기 니가 살아야할 이유가 있잖아!
손을 들고 소리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