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보태 '설악산 퀵 서비스'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계곡과 능선을 누비는 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설악산에서 짐을 옮길 때 그에게 부탁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란 데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임기종(46)씨. 열여섯에 시작한 설악산 지게꾼 생활이 벌써 삼십년. 현재 일하는 세 명의 설악 지게꾼 중 최고참이다.
케이블카나 헬리콥터가 닿지 않는 산장.휴게소에 음료수를 비롯해 각종 필요한 물자를 나르는 게 그의 일이다. 냉장고를 져 나른 적도 있고, 다친 등산객을 태우기도 했단다.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설악산 등산로 어딘가에서 자기 머리 위로 삐죽 솟은, 커다란 지게를 맨 오척 단구의 사내를 만난다면 그게 바로 임씨다. 거기에 등산화의 앞이 터져 있고, 풀잎을 연신 질겅질겅 씹어댄다면 더더욱 틀림없다.
한번에 나르는 짐은 보통 40㎏. 음료수 캔 다섯 박스다. "힘들겠다"고 말을 걸어 보라. 북한 말투 비슷한 강원도 사투리로 "뭘요, 등산객이라면 8시간은 걸리는 설악산 밑에서 대청봉 꼭대기까지, 짐지고 6시간이면 가는데요. 슬리퍼 신어도 그래요"라는 답이 돌아올 게다. 보통 사람은 입을 딱 벌릴 자랑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정작 내세울 만한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는 좀체로 꺼내려 하지 않지만….
30년째 이 일을 하는데도 집에 가면 바로 잠에 떨어질 정도로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임씨는 뚝 떼어 장애인과 홀로 사는 노인들을 돕는 데 쓴다. 자신은 어렵사리 마련한 월세 8만원짜리 영세민용 13평 임대 아파트에 살면서도 그런다.
"제가요, 옛날에 워낙 어렵게 살아서요, 어려운 사람만 보면 돕고 싶어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열세살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한 인생. 스물다섯 되던 1983년에 부인을 맞아들였다. 부인은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이다.
"지게꾼 선배가 처자가 있다고 해서 보러 갔는데, 처가 식구들이 그 사람을 막 구박하는 거예요.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다고요. 어찌나 애처롭던지. 내가 보호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 참, 식은 안 올리고 혼인 신고만 했는데, 언젠가 꼭 결혼식을 해 줄 거예요."
혼인 신고 이듬해 아들을 얻었다. 칠삭둥이였다. 서너살이 되도록 말을 못했다. 정신지체 1급 장애. 열서넛이 되자 집에서 돌 볼 수가 없었다. 임씨가 일 나간 사이에 집을 나가서는 남의 논밭을 망쳐놓기 일쑤였다. 고심 끝에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인 강릉의 사회복지시설에 아이를 맡겼다. 8년 전의 일이었다.
"보내고 나니 나만 편하려고 그랬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도 뭔가 할 수 없을까 하다가 용달차를 불러 과자 20만원어치를 싣고 갔어요. 다른 애들도 같이 먹으라고."
처음엔 스스로도 '너무 쓰는 것 아닌가'했단다.
"과자를 먹으면서 웃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싹 가시데요. 저도 진짜 기뻤구요. 그래서 다른 곳도 찾아다녔어요."
지금 임씨가 한달에 한번씩 30만원어치 과자를 차에 싣고 가는 장애인 시설이 두 곳. 강릉 '늘사랑의 집'과 양양 '정다운 마을'이다. 늘사랑의 집 고동길(34) 사무국장은 "개인으론 최대의 후원자"라고 했다.
속초의 독거 노인 다섯 분에게도 매달 쌀을 보내고 있다. 지난달에는 그 다섯 분을 포함해 노인 35명을 모시고 강원도 홍천의 온천으로 효도관광을 다녀왔다.
"한달 벌이 다 털었어요. 근데 참 이상해요. 남들한테 많이 쓰면 벌이도 더 잘돼요. 내년엔 어려운 학생 한명 뽑아 장학금을 줬으면 해요."
설악산 속의 산장에선 600원짜리 캔 탄산음료가 2000원이다. 그렇다고 투덜댈 일은 아닐 성싶다. 2000원의 대부분은 임씨가 짐을 옮긴 대가이니까. 그리고 그 대가의 상당 부분은 어려운 이들에게 돌아가니까. 오히려 설악에 가거든 일부러라도 음료수 하나 사 마실 일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