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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명학술원 원문보기 글쓴이: 혜명
한국사와 함께하는 영양의 역사와 문화 한국사와 함께하는 영양의 역사와 문화
강사 류동학 교수
영양 소재 불교 문화재를 찾아서
1.국보순례- 봉감 모전 오층 석탑과 삼국시대 불교
2. 보물순례- 보물 609호 화천동 삼층석탑과 현일동 삼층석탑과 통일신라 불교
3. 도 지정 불교문화재 순례- 용화동 삼층석탑, 현이동 모전 오층석탑,영양 연당동 석불좌상과 탑의 역사와 고려시대 불교
4. 도 지정 불교 문화재 자료 순례-
삼지동 모전석탑(83호), 신구동 삼층석탑(84호), 현동 당간지주(85호)와
불교역사 와 조선시대 불교
Ⅰ. 한국 탑의 이해
1. 개념
한국의 탑은 세계 불교 예술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조형미를 이룩하였고, 동시에 그 찬란한 예술적 감각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서민의 애환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끼가 있는 고색창연한 석탑에서 어딘지 모르게 조상의 숨결을 느끼고, 하늘 높이 솟은 상륜(相輪) 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따뜻한 인간의 정감을 느끼게 된다. 한국의 탑은 우리 고대 종교 건축의 독특한 양상이라 하겠지만 이는 한국이의 조형감각에 가장 적합한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음이 사실이다.
기원전 566년 인도에서 마가다국의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인간의 번뇌에서 해탈하고자 왕실을 버리고 출가하여 설산에서 입산수도한 끝에 해탈의 진리를 터득하였고 일생동안 수많은 장소에서 깨달음의 교리를 전파하여 여든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중생을 교화하였다. 석가세존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석가세존을 영원한 교주로 예배하기 위하여 시신을 태우고 거기에서 얻어진 유골을 모아 불사리(佛舍利)로 받들어 여덟 개의 탑에 나누어 안치하고 여기에 재를 모아 봉납한 두 개의 탑을 더하여 모두 열 개의 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불탑의 시초였다.
불탑은 고대 인도어로 수투파(stupa)라고 하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탑파로 음역되고 이를 줄여서 탑이라고 불렀는데 원래 수투파는 무덤을 의미한다. 석가세존의 사리탑은 인도의 산치(Sanchi) 등지에 세워진 불탑에서와 같이 무덤과 같은 형식으로 나타난다. 탑의 주변에는 난간 형태의 많은 기둥을 세우고 사방에 탑문을 세워 석가세존의 불법 전파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새겼으며 무덤의 꼭대기에는 보개(寶蓋)와 같은 성스러운 상징물로 장식하였다. 기원후 1세기경 인도의 불탑은 무덤 형식으로 정립되었으나 중국에서는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중국의 불탑은 중국 고유의 다층누각식의 건물에 인도탑이 축소된 형태가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중국 불탑의 형식이 우리나라로 전해져 삼국시대 불탑의 모체가 되었다.
2. 탑의 어원
'탑'은 범어(梵語)의 스투우파(Stupa), 또는 팔리(Pali)어 투우파(thupa)의 음사에서 유래된 약칭으로 사리의 봉안 유무에따라 탑파, 또는 지제(차이티야, Chitya)라고 하는 별개의 용어가 있다. 먼저 사리를 봉안한 탑을 '스투우파' 라고함에 비하여 사리가 없는탑을 '차이티야' 라고 구별하기도 하였다.
'스투우파'는 방분(方墳), 원총(圓塚) 또는 고현처 (高顯處) 등의 뜻으로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는 묘소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비하여, '차이티야'는 신령스런 장소나 고적을 나타내는 기념탑적인 것 으로 영묘(靈廟), 정처(淨處),복취(福聚) 등의 의미이다.
3. 탑의 유래
탑은 사리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불교의 독특한 조형물이다. 최초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열반 후 화장을 함으로써 사리를 얻게 되었고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 바로 탑파, 불탑이 되었다. 그러므로 불탑은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의 무덤이라 할 수 있겠다. 초기에는 근본되는 여덟 탑이 중심이 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탑파의 신앙은 더욱 왕성하여 수많은 탑을 쌓게 되었다.
특히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의 팔만사천탑 건립은 역사상 유명한 일이며 불도들의 종교적 염원에 따른 사리 분배에 의해 불교가 전파된 여러 나라에서도 수많은 탑의 건립을 보게 된다.
4. 탑의 전래
인도에서 출발한 탑파미술은 그 전파국에 따라 각기 독특한 건축 양식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불상과 같은 엄격한 규범 속에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건축기술이 적용되었다. 즉 불교가 전파되는 각국의 건축기술에 따라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그대로 탑파 건축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인도의 탑이 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복발(覆鉢)형( 뒤집힐 '복'자에 바리때 '발'자로 밥그릇이 엎어져 있는 형태를 말함) 불탑임에 비하여 중국을 위시한 북방불교 계통에서는 한결같이 여러 수를 지닌 중층(重層)의 탑으로 전개되어 중국에서는 목탑이 주류를 이루었고 한국에서는 산하 도처에서 생산되는 화강석을 주재로하여 수많은 석탑을 만들었다.
5. 탑의 종류와 형식
먼저 우리나라의 탑을 재료면에서 본다면 흙 • 나무 • 쇠 • 돌 • 벽돌의 다섯 종류로 분류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반도내에서 흙으로 만든 토탑이나 금속제의 소위 금탑이라 할 만한 것은 주로 사리장엄을 위한 공예적인 소탑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한국탑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명실공히 한국의 탑은 목탑 • 석탑 • 벽돌탑 3종류에 국한 시킬 수 있겠다.
목탑이란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후한 초 명제때 중국으로 전해지자 가람을 장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발생되었다고 짐작되는바 중국 고유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서 소위 사리 신앙을 위한 불전(佛殿)이면서 동시에 높은 누각 형식의 목조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탑으로는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의 목조 건물이 바로 5층목탑이다. 목탑의 형식은 전형적인 건축 구조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단층기단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각 층의 옥개는 기와를 덮고 기둥 사이에는 창방을 일종의 문호(門戶)로서 내어 내부에 출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내부 공간을 활용하는 건조물의 기능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상부에는 금속제의 상륜을 설치하여 신성한 장소임을 나타냄으로써 탑의 3부작이라 할 수 있는 기단 • 탑신 • 상륜부를 형성한 일반 석탑과 같은 형식을 취하였다.
목탑에 이어 발생한 석탑은 먼저 백제의 땅에서 그 선행양식을 살필 수 있다. 이들은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 위치한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으로서 대변된다. 그러나 한국 석탑의 전형 양식은 신라의 땅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는 무열왕과 문무왕때 반도의 통일과 함께 문화적으로도 통일을 도모하여 한국 석탑 예술의 최고봉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백제에 있어서는 화강암을 주재로 하여 목조탑 계통의 양식을 추종한 석탑을 만들었음에 반하여 신라에 있어서는 같은 화강암을 사용하였으되 탑신부는 전적으로 안산암의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분황사 모전석탑 양식을 기초로 하는 벽돌탑 계통의 양식에서 출발되고 있다.
이상 열거한 목탑과 석탑에 이어 순수한 벽돌탑이 경북 안동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벽돌탑 역시 그 형식은 동일하나 다만 옥개의 상하에 층급(層級)을 나타내고 있음이 일반 목탑이나 석탑의 형식과는 다른 점이다. 즉 옥개의 상하에 여러 단의 층단을 형성한 것이 석탑과 뚜렷이 다른 특징을 타나내게 되었다.
목탑과 석탑 그리고 벽돌탑에 관한 내용은 시대별 특징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6. 탑의 구조
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기단부는 탑신을 올려놓는 기초이고 기단 위에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부분이 탑신부이다. 상륜부는 노반을 기초로 해서 구륜 등 여러가지 장식이 수직으로 꿰어있는 부분을 말한다. 탑도 불전과 마찬가지로 여러 요소들로 장식되는데 불보살과 신장 등이 주류를 이룬다.
기단과 탑신부에 불국의 수호신을 새겨놓고, 그들로 하여금 탑속의 부처님과 그의 세계를 호위하게 하였으며, 오묘하고 신비한 장식물들을 상륜부에 베풀어 모든 개념과 형식을 초월한 부처님의 경지를 표상하였다.
1)기단부
건축•비석•탑 등의 기초가 되는 단을 기단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탑의 받침돌이다. 일반적으로 탑의 기단부에는 십이신장상, 팔부중상, 사천왕상 등이 장식된다. 십이신장상의 경우 보통 탑 기단 중석의 각 면을 삼등분하고 한 구획에 하나씩 양각하는데, 사람의 몸에 짐승의 머리(人身獸頭)를 한 모습에 법의를 걸치고 있는 형태가 많다.
십이신장상은 약사여래의 12대원(大願을) 수행하는 신장으로서 불법을 수호하는 기능을 한다. 팔부중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신장이다. 팔부중은 기단 면석의 한 면을 이등분하여 형성된 8면의 부분에 돌아가며 조각한 것으로 각 방위를 수호하는 신장임과 동시에 부처의 큰 덕을 사모하는 군중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탑의 기단부에는 비천상이나 용, 구름문양, 불․보살 등이 장식되기도 한다.
2)탑신부
석탑의 몸돌은 몸돌과 지붕돌(옥개석)로 구성되며 몸돌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보살상 등이 새겨지고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 것도 있다. 대개 몸돌이나 지붕돌로 탑의 층수를 알 수 있다. 사리를 안치하는 곳은 대개 1층이나 2층 탑신의 위에 사리공을 파고 사리를 안치한다. 탑신부가 일종의 부처가 머무는 집을 상징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3)상륜부
상륜이라는 말은 수연 밑에 있는 구중원륜(九重圓輪) 또는 보륜(寶輪)의 딴 이름이다. 현존하는 탑 가운데 상륜부가 조성 당시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상륜부는 아래로부터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 용차(龍車), 보주(寶珠)의 순서로 철심에 꿰어 올려져 있다. 수연 아래에 있는 테 모양의 장식을 특별히 상륜이라 하는 것은 표상이 높이 솟았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기 때문이다.
4)탑의 층수
탑의 층수는 3•5•7•9로 하늘의 양수를, 각은 4•6•8로 땅의 음수를 나타낸다. 이는 음양합일과 음양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불교의 교리나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우리나라를 비롯한 고대 동양의 우주관이나 음양오행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10층탑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3과 7의 양수가 조합된 것으로 홀수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길상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겠다.
5)탑의 이름
탑의 이름은 원칙적으로 절 이름, 층수, 재료의 순서로 붙여서 부르는데 절 이름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지명을 앞에 붙여서 짓는다. 그리고 절이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절터만 남은 경우에는 절 이름 뒤에 지(터)를 붙여서 말하고, 탑의 파손으로 층수를 알 수 없을 경우에는 생략한다. 특수형 탑은 그 모양을 이름에 넣는 경우도 있다. 탑의 재료가 돌이면 석탑, 벽돌이면 전탑, 나무일 경우에는 목탑, 그리고 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전탑양식을 따를 경우 모전 석탑이라고 한다. 영양소재 탑의 경우 마을 지명을 붙여 봉감 모전 오층 석탑, 화천동 삼층석탑과 현 1동 삼층석탑,용화동 삼층석탑, 현 2동 모전 오층석탑, 삼지동 모전석탑(83호), 신구동 삼층석탑(84호) 등 동네 이름을 따서 국보와 보물 및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7. 한국 석탑발생기
한국의 석탑발생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불교를 받아들인 4세기 후반부터 약 200년간은 목탑의 건립시기로서, 목탑의 건조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기술과 전통의 연마가 석탑을 발생하게 하였다.
백제에서 가장 먼저 석탑이 건조되었는데, 그 양식은 곧 당시 유행하던 목탑을 본뜬 것이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술이 발달하여 일본의 초기 사원 건립에 백제의 사공(寺工)이나 와박사 등이 건너가 공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이미 <사탑심다(寺塔甚多)>의 나라로 널리 알려져 신라의 황룡사구층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빙되어 공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7세기 초반 백제에서 건립된 석탑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국보 제9호)인데, 미륵사지석탑은 그 양식이 목탑과 가장 흡사하다는 점에서 한국석탑의 시원으로 보고 있다. 정림사지5층석탑 역시 목탑적인 면이 있으나 세부수법은 맹목적인 모방에서 탈피,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으로 발전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신라의 석탑은 전탑의 모방에서 출발하였다. 가장 오래된 것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조된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으로, 탑의 양식은 전탑형식이나 재료는 벽돌이 아닌 석재이다. 이와 관련된 탑으로 의성탑리5층석탑(국보 제77호), 영양 봉감 모전 5층석탑(국보 187호)을 들 수 있는데, 이 탑에서는 새로운 착상과 옛 수법의 간략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석탑은 전파된 지방에 따라 목탑계의 백제탑 형식과 전탑계의 신라탑 형식으로 그 특성을 나타냈으나, 양국의 초기 석탑이 그 기본 평면을 정사각형으로 하여 여러 층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8.탑의 명칭
# 기단부 : 탑의 기초가 되는 부분으로 탑신부와 상륜부를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지대석 : 지반 위에 처음 놓이는 석물
기단 : 건물의 외관을 장엄하게 하고 빗물이 건물안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하고 습기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건물은 단위에 세워진다. 이때 이 단을 기단이라고 부른다
면석 : 석탑 등에 있어서 기단의 대석과 갑석 사이를 막아낸 넓은 돌
갑석 : 뚜껑처럼 덮어 놓은 돌, 돌 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하고 판판한 돌
우주 : 바깥쪽 버팀, 건물이나 탑의 귀퉁이에 세우는 기둥
탱주 : 버팀목, 지주(支柱), 넘어지지 않도록 버티게 하는 기둥
# 탑신부 : 탑의 몸체를 이루는 부분으로 그 구성은 옥개석과 옥신석을 합쳐 놓은 것으로 기단 위에 안치된다
옥개 : 탑의 옥신석 위에 덮는 지붕 모양의 돌
옥신 : 석탑의 탑신을 이루는 돌
우주 : 건물이나 탑의 귀퉁이에 세우는 기둥
옥개받침 : 옥개석 아랫부분에 있는 계단형의 부분
전각 : 옥개석 모서리 부분의 반전된 부분
풍령 : 탑의 처마 끝에 달려있는 종형태의 장식
낙수면 : 옥개석의 지붕면
# 상륜부 : 탑두부라고도 하며 탑의 꼭대기에 있는 장식부분이다.
노반 : 탑의 상륜을 받치는 가장 위의 옥개석 위에 놓은 석탑신부의 맨 위에 해당하며 이 노반 위에 복발이 있다.
복발 : 노반 위에 있는 발을 엎어 놓은 모양의 석물
앙화 : 탑 꼭대기의 보륜 밑과 복발 사이에 꽃이 위로 피어난 듯이 조각된 부분
보륜 : 앙화와 보개의 중간에 있는 아홉 개의 바퀴 모양의 부분
보개 : 상륜의 보륜과 수연 사이에 있는 닫집(불좌 위에 장식으로 만들어 다는 집의 모형) 모양의 부분, 보석이나 구슬로 장식된 천개(天蓋)
수연 : 불꽃 모양의 것, 불탑의 구륜의 윗부분에 불꽃모양으로 만든 장식
9. 탑의 종류
1). 목 탑
우리나라의 탑은 나무로 만든 목탑에서 출발하였다. 그 형태는 방형 또는 다각, 다층누각형이었을 것이다. 재료가 나무이기 때문에 전쟁이나 화재로 인해 모두 없어져 조선시대 이전의 것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탑을 세웠던 흔적들은 남아있는데 신라의 것으로는 황룡사지 9층 목탑자리, 사천왕사지 목탑자리, 망덕사지 목탑자리, 보문사 동구 목탑자리 등이 있고, 백제의 것으로는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자리, 금강사지 목탑자리, 전북 익산군 왕궁면 제석사지 모탑자리가 있고, 고구려의 것으로는 평양 청암리사지 목탑자리, 평남 대동군 상오리사지 목탑자리 등이 남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목탑으로는 조선후기인 17세기 초반에 세워진 충북 보운군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사의 대웅전이 있다.(쌍봉사 대웅전은 1984년 불에 타 없어졌다가 1986년에 복원되었다.)
2). 전 탑
벽돌로 쌓은 탑이다. 탑을 세우기 전에 인공으로 벽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정이 복잡하고 작업과정이 어려워 전국적으로 파급되지 못하고 지역에 따라 일부에서만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경북 안동 신세동 7층전탑(국보 16호), 안동 동부동 5층전탑(보물 56호),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 57호), 칠곡 송림사 5층전탑(보물 189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226호) 등이 있고, 파괴되어 벽돌부재만 남아있는 것으로는 안동 대사리 모전 전탑(경북 문화재자료 제70호) ,안동 금계동 다층 전탑, 장묘동 전탑, 안동 개목사 전탑, 청도 불영사 전탑, 운문사 오작전 등이 있다.
3). 모전 석탑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탑으로 건조재료는 석재이지만 형태가 전조탑파(塼造塔婆, 줄여서 塼塔)의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전탑을 축조하는 데는 건탑(建塔)에 앞서 벽돌을 만들어내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진흙을 빚어 벽돌을 구워내는 일이 곧 석재를 다듬어 모전석(模塼石)을 생산하는 일로 바뀌어져, 이러한 연유에서 결국은 모전석탑을 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전석탑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으로서 한국석탑의 하나의 이색적인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전탑의 축조는 많은 수고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석탑에 비하여 극히 적게 조성되었고 모전석탑 또한 많이 조성되지는 못하였지만,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전탑에 비해서 모전석탑이 많이 건립되었음을 현존하는 유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돌을 좋아하였고, 또한 돌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모전석탑의 형식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돌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하여 축조한 형식이며, 둘째는 전형양식(典型樣式)의 석탑에서와 같이 석괴형(石塊形)의 탑신석과 옥개석을 쌓되, 탑신석에는 좌우의 우주(隅柱)를 생략하고 옥개석 낙수면에는 전탑에서와 같이 층단을 표시한 형식이다.
첫 번째 형식에 속하는 것으로는 영양 봉감모전오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국보 제187호)·군위남산동모전석탑(軍威南山洞模塼石塔,경북 문화재 자료241호)·제천장락리칠층모전석탑(堤川長樂里七層模塼石塔, 보물 제459호)·정암사수마노탑(淨巖寺水瑪瑙塔, 보물 제410호) 등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형식에 속하는 것은 선산죽장동오층석탑(善山竹杖洞五層石塔, 국보 제130호)·선산낙산동삼층석탑(善山洛山洞三層石塔, 보물 제469호)·경주서악리삼층석탑(慶州西岳里三層石塔, 보물 제65호)·경주남산리삼층석탑(慶州南山里三層石塔, 보물 제124호)·의성빙산사지오층석탑(義城氷山寺址五層石塔, 보물 제327호)·강진 월남사지모전석탑(月南寺址模塼石塔, 보물 제298호)·화순 운주사지석탑(雲住寺址石塔) 등이 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에는 두 번째 형식의 모전석탑이 첫 번째 형식의 모전석탑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건립되었고, 탑의 위치가 안동·의성·선산·경주 등 죽령(竹嶺)을 통한 불교문화 전파경로의 통로상에 분포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통일신라시대 모전석탑 중 가장 오래된 의성탑리오층석탑은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 내지 8세기 초의 건립으로 추정되며, 선산의 죽장동오층석탑과 낙산동삼층석탑도 8세기경의 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의성탑리오층석탑은 곳곳에 목조탑파의 양식이 표출되고 있는 점에서 귀중한 존재이다.
첫 번째 형식의 모전석탑이 분황사석탑과 같이 삼국시대에 이미 건립되었음에 대하여 두 번째 형식도 첫 번째 형식보다는 뒤지지만, 7세기 말부터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성탑리오층석탑의 중요성이 한층 커지게 된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경주 서악리와 남산리의 모전석탑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모전석탑은 7세기 전반에 건립된 경주분황사석탑에서 시작하여 이후 계보가 이어져 신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건립되었고, 그 여운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상당한 수의 모전석탑이 건립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와 다른 점은 첫 번째 형식의 모전석탑이 오히려 많이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경향과 같이 의성탑리오층석탑을 그대로 모방한 석탑이 의성군의 빙산사지오층석탑으로 나타났고, 경주의 서악리나 남산리모전석탑의 석괴형 기단과 같이 입방체 자연암석 위에 세우는 모전석탑이 가까운 거리의 경주시 천북면 오야리에 건립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석재를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모전석을 만들어 축조한 첫번째 형식의 모전석탑이 다수 건립되어 제천장락리칠층석탑, 정암사수마노탑 등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의 현이동오층모전석탑(縣二洞五層模塼石塔), 삼지동모전석탑(三池洞模塼石塔) 등과 같은 탑도 건조되었다는 점이다.안동하리동모전삼층석탑 (安東下里洞模塼三層石塔)
조선시대에 건립된 모전석탑은 아직 발견 조사된 바 없으나 정암사수마노탑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 해체 수리되었음을 사적기와 탑 안의 사리장엄구 및 탑지석(塔誌石)에 의하여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은 이러한 수리를 거친 뒤의 것으로서, 역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모전석탑의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석 탑
우리나라는 화강암으로 된 석재가 풍부하여 중국(전탑위주), 일본(목탑위주)과는 달리 석탑이 크게 발달하였다. 현존하는 1천여기의 탑의 대부분은 석탑이고 그 양식도 다양하며 수법도 다채롭다. 따라서 석탑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뒤에 다시 설명하도록 한다.
5). 청동탑, 금동탑
금속으로 만든 탑들이다. 다른 탑들이 사찰의 중심적인 존재인 것과는 달리 건물 내에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용도도 개인적인 성격이 강하다.
※ 석탑의 계통
10. 한국탑의 변천사
1). 탑의 종류
탑은 재료에 의해 목탑, 전탑, 모전석탑, 청동탑, 금동탑, 석탑으로 구별한다.
목탑은 그 재료가 목재이므로 불에 타기 쉬워 고대에 만들어진 실물은 없다. 그리고 모전석탑도 전탑과 마찬가지로 석재로 벽돌형을 다듬어 모전석을 생산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크게 유행하지 못했다. 청동탑과 금동탑 등 금속제 탑들은 하나의 공예탑 혹은 공예품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탑 가운데 대부분이 석탑이고 그 모양도 다양하며 다채로운 수법을 보이고 있어 한국의 탑을 이해하고 탑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곧 석탑에 대한 것을 아는 것이 빠른 길이다.
2). 석탑의 시대별 변화와 특징
(1) 삼국 말의 시원석탑
삼국 말 백제와 신라에서 건립된 초기의 석탑들은 일반적으로 시원석탑이라 부르며 이 시원석탑을 모태로 삼아 통일신라시대에 와서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 생겨나게 된다. 석탑을 처음으로 만든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의 석탑은 목조건축을 모방해서 만들어지게 되는데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 그 예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의 양식과 매우 비슷하여 이 탑을 목탑건조에서 석탑건조로 옮겨지는 최초의 탑으로 본다.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에 비해 정림사지 5층석탑은 석재수의 감소, 기단부의 정돈, 간략화되고 세장된 느낌으로 목탑양식에서 상당히 탈피한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에서 조성된 석탑은 경주 분황사모전석탑(분황사)이 있다. 이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처럼 깎아 쌓아올린 형태로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에 속한다.
백제계의 석탑은 화강암을 전용하여 목탑계 양식을 따르고 신라계의 석탑은 화강암과 안산암을 혼합하였으나 안산암을 주재료로 삼아 전탑계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석탑은 기본 평면을 정방형으로 하여 다층을 이루고 석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① 고구려의 탑
현재 고구려의 불탑은 남아있는 것이 없으나 기록과 조사된 자료에 의하여 몇 가지 형식적인 특징을 추정할 수가 있다. 우선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요동성을 순시하던 중 아육왕(아소카왕)탑이라고 불리는 세 겹의 토탑이 가마솥을 엎은 형태로 세워진 것을 보고 그곳에 다시 7층의 목탑을 세우게 하였는데 나중에 탑을 줄여 다시 세우려다 탑이 썩어 무너져버렸다는 기사가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1953년 함경남도 순천의 요동성총에서 발견된 요동성도벽화에는 실제로 성곽 내부에 다층의 목조건물이 그려져 있어 이 그림이 삼국유사의 요동성탑에 대한 기록과 어느정도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평양의 대보산에 영탑사팔각칠층석탑을 세우게 된 내력도 적혀 있어 팔각다층석탑의 존재를 일러주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평양의 청암리절터, 정릉사터, 대동군의 상오리절터 등지에서 조사된 탑자리에서는 제법 규모가 큰 팔각의 목탑이 세워졌던 자취가 확인되었는데 이 탑들은 한결같이 절 안의 한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주변의 동, 서, 북편에는 법당이 하나씩 배치되는 이른바 1탑 3당식의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이상의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고구려의 불탑은 비록 기록상으로는 토탑이나 석탑이 일부 존재하였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거대한 8각다층의 목탑이 주류를 이루면서 조탑술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② 백제의 탑
백제의 조탑기술은 실로 뛰어났음이 국내외의 자료와 유적으로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상의 불탑으로 기록되는 신라 황룡사구층탑도 사실은 백제의 공장 아비지가 신라의 초청으로 백여명의 기술자를 이끌고 가서 완성한 것이며 일본 최고의 탑으로 알려진 호류지(법륭사)의 목탑도 백제탑의 형식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목탑은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오직 국립부여박물관에 청동으로 제작된 탑신 일부가 전하고 있어 당시의 목탑의 형태를 추정할 뿐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목탑의 자취 또한 부여와 익산 지역에 편중되어 있을 뿐이며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목탑의 자취는 부여의 군수리절터와 익산의 미륵사터, 제석사터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탑에서 현저한 특징으로 주목되는 것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미륵사)은 낮은 2층 기단 위에 석재를 목재와 같이 잘게 나누어 짠 목조건물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1층 탑신의 네 벽은 밑이 넓고 위가 좁은 기둥들을 각 면에 여러 개씩 세우고 중심부에는 사방에서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내어 목탑에서의 사방에 출입문을 내는 형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탑신 내부의 중심부에는 탑신을 떠받치는 중심축과 같은 찰주가 세워져 있는 것도 목탑의 구조와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기둥 위로 처마를 구성하는 방식이나 넓은 판석을 덮어 지붕을 내고 추녀 끝에 네 귀에서 살짝 위로 들릴 듯 처리한 것도 목탑과 비슷하여 이 탑은 비록 석탑이지만 전체적인 외형은 목탑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부여의 정림사지오층석탑(정림사)에서 더욱 정제되어 나타난다. 즉 낮은 기단 위로 네 귀에 안정감 있는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벽은 두 장의 판석을 잇대어 마치 사방으로 출입문을 달아놓은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한 처마 밑의 석재맞춤 방식을 미륵사탑 보다 간략화되면서 정림사탑 특유의 예술성을 가미하였고 지붕돌은 평활하여 여유가 있으며 2층 이상의 탑신부를 설계함에 있어서도 정확한 감축비율이나 규칙성 등의 질서를 잃지 않고 있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완벽하고 조형기법이 탁월한 새로운 백제석탑으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은 백제에서 시작되었고 석탑의 원형은 목탑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는데 이와같이 목탑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석탑양식을 이룩한 창의성은 고도로 축적된 백제인의 조탑기술이 뒷받침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백제의 석탑은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석탑이 완성되기까지 기본적인 구성형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어 통일신라 석탑형식의 정립에 공헌한 바가 크다고 하겠다.
③ 신라의 탑
신라의 불교는 532년 법흥왕의 공인과 함께 급속도로 성장하여 원광, 자장과 같은 고승이 배출되고 이들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로는 불교문화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불탑은 불교공인이 늦어진 관계로 불탑의 조영도 6세기 중엽 이후에야 이루어지게 된다. 초창기의 불탑은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목탑이 먼저 세워졌는데 그 자취가 흥륜사나 천주사 등지의 탑자리에 남아 있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궁궐을 지으려던 터에 우물에서 용이 나타나는 상서로운 기운이 일게 되자 이 궁터에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를 짓고 절 한가운데에는 9층목탑을 세우고 법당에는 장육삼존불상을 안치했다고 한다. 그런데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가 226척에 해당하는 큰 탑으로 이 탑과 수백 칸에 이르는 건물들을 세우는 대공사를 계획하면서 신라왕실은 이 사업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결국 아비지를 비롯한 백제의 장인들을 초빙하여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실로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선덕여왕대에 이르러서야 건물들과 탑이 모두 제격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경주 황룡사터의 탑자리에는 사방으로 계단을 올린 기단 위로 사방 일곱 칸에 해당하는 탑신의 기둥을 세웠던 수십 개의 육중한 주춧돌들이 남아 있어 황룡사9층목탑의 규모를 짐작케 하고 있다. 이와같이 신라에서도 불탑의 주류를 이루었던 목탑의 전통은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신라에서도 7세기에 들어 석탑이 선보이게 된다. 현재 경주에 일부가 남아있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22)에 조성된 것으로 이 탑은 목탑을 모델로 한 백제의 석탑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중국의 전탑(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하여 일일이 돌을 벽돌처럼 잘라서 이를 포개고 짜맞추어 세운 것이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5층탑으로 여겨지며 규모가 제법 큰 탑에 속하고 있다. 탑의 기단 위에는 네모퉁이에 돌사자를 배치하고 1층탑신의 네 벽에는 돌로 문틀을 짜고 널직한 돌로 출입문도 달아 내부로 통할 수 있게 하였는데 문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조각되어 험상궂은 표정으로 문을 지키고 있다. 또 벽돌모양의 석재로 탑을 만들다 보니 탑에는 전혀 기둥이 없고 처마 밑과 지붕 위의 경사면은 자연히 층이 지게 되어 있다.
④ 탑의 특징
삼국의 불탑은 목탑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에 들어 석탑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목탑이 삼국시대 불탑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추정되며 그 중에서도 고구려의 목탑은 팔각다층탑이 주로 세워져 백제나 신라의 목탑과 구별된다. 또 탑과 건물의 배치에서도 고구려의 절터에서는 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면에 법당이 배치되는 이른바 1탑3당식이 성립되고 이 형식이 백제의 군수리절터나 황룡사터의 후기 건물배치에도 응용되었으며 이러한 형식은 일본의 아스카데라(비조사)의 당탑 배치형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밖에 탑과 법당, 강당 등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는 1탑1당식의 배치형식도 삼국에서 성행하였으며 역시 이 방식도 일본의 시텐노지(사천왕사) 건립에 응용되는 등 우리나라의 당탑 건립의 법식은 일본에 고스란히 전하여졌는데 특히 백제에서 영향받은 바가 크다. 이밖에 백제 미륵사의 경우처럼 3탑3당식으로 탑과 법당이 배치되는 특수한 배치형태를 따른 것도 있었다. 또한 삼국의 불탑은 대체로 그 규모가 매우 거대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는 왕실에서 사찰의 건립을 후원하여 대규모의 공사를 계획할 수 있었고 불상이 조성된 후로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 예배처로서의 비중이 커지는 가운데에도 아직은 불탑에 대한 신앙의 비중이 상당하였던 것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목탑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삼국시대 말기에 들어 우리나라 불탑에는 석탑이 등장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백제의 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석탑이다. 신라의 분황사모전석탑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한 것이고 고구려의 영탑사팔각칠층석탑은 기록으로만 전할 뿐 그 형태를 추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백제의 석탑은 이미 삼국시대에 뿌리를 내린 목탑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석탑의 재현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 말기에 성행한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나라 불탑의 주류가 석탑으로 바뀌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원래 돌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재질이 견고하여 화재의 위험도 면할 수 있는 석재로서 불탑을 조성하여 영원히 보전하려는 염원이 백제인으로 하여금 석탑을 창출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 7세기에는 서산마애삼존불, 군위삼존석굴, 반가사유석상, 무열왕릉 등의 격조높은 석불상과 석비들이 제작되는 등 석조미술의 조형활동이 크게 일어나는 시대적 분위기도 석탑의 발생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통일신라시대 이후 전국적으로 수많은 석탑이 세워져 우리나라는 전탑이 성행한 중국, 목탑이 많은 일본 등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 석탑의 나라로 불리우게 되었다.
(2)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① 탑의 개요
삼국을 통일한 신라왕조는 더욱 공고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불교가 융성하여 종단의 활동이 왕성하여지고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중국 당나라의 신진문물이 활발하게 도입되는 가운데 불교문화도 더욱 새롭게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승려들이 중국 또는 서역지방까지 구법을 위한 유학을 떠났으며 이들이 귀국하고 부터는 새로운 불교사상을 들여와 선종불교가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삼국시대의 불교가 국왕의 후원으로 발전한 반면 통일신라의 불교는 왕실을 비롯하여 귀족의 비호를 받아 전국 도처에 사찰과 불탑이 세워지면서 조탑신앙도 단순히 불사리신앙의 차원을 넘어 여러 가지 기원과 불교경전의 가르침을 실현하려는 욕구에서도 불탑이 조영되었다. 심지어는 풍수사상에 의하여 탑이 절의 건물 배치와는 상관없이 절 바깥으로 벗어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엄종의 우두머리 사찰인 부석사에서는 의상대사의 교시에 따라 탑을 세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석탑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어 8세기에 들어서면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완성하게 되고 이 양식은 또 하나의 우리나라 석탑양식의 전통으로 확립되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8세기 중반 이후에는 전형약식의 석탑이 성행하는 가운데 이형석탑이 등장하여 나름대로의 특색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9세기 이후로는 신라왕실의 쇠망과 함께 석탑의 규모가 축소되고 결구법식도 일부 생략되며 탑의 장식이 증가되기는 하나 전체적인 조형성이 퇴조를 보인다. 오히려 이때에는 선종불교의 등장과 함께 지방의 사찰에서 선승들의 승탑과 탑비가 격조높게 조형되어 신라시대 석조미술의 또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② 전형적인 석탑 양식
가) 전형적(典型的)인 석탑양식(石塔樣式)의 성립
삼국을 통일한 신라왕조에서는 삼국의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지며 특히 석탑에 있어서는 신라적인 요소와 백제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나타난다. 이와 같은 시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는 의성탑리오층석탑(疑城塔理五層石塔)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약간 돋아진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는데 기단과 탑신에 별개의 기둥을 배치하고 각 층의 부재들은 여러개의 석재들로 짜맞추고 있다.
초층탑신의 앞면에는 문틀을 내고 감실(監室 : 벽 안의 우묵진 공간)을 마련하여 내부에 출입할 수 있도록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지붕의 형태는 처마 밑과 윗쪽의 경사면을 층단형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기본적으로 목탑을 본뜬 백제식의 석탑을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지붕의 형태는 분황사모전석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백제탑과 신라탑의 절충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그런데 같은 시대의 석탑인 경주 부근 동해변의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지三層石塔)이나 국립경주박물관의 고선사지삼층석탑(高佃社地三層石塔)에서는 기단이 2층으로 높아지고 탑신부의 지붕돌 윗면은 밋밋한 빗면으로 처리하면서 처마 끝이 네 귀에서 살짝 들리는 등 진전된 형식을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신문왕 2년(682)에 낙성된 사찰이므로 탑의 건립 또한 이때로 추정되는데 2층 기단은 여러 개의 기둥돌과 벽판석(壁板石)으로 짜맞추어 잘 정비되어 있다. 탑신은 네 개의 기둥돌과 네 개의 벽판석으로 짜여지고 지붕돌은 여덟 개의 몸돌과 네 개의 받침돌로 구성되었는데 처마 밑의 층단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경주의 고선사지 삼층석탑에서는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어 이 두 탑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이 완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7세기 후반에 이미 전형을 이루기 시작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은 8세기 초의 경주나원리오층석탑이나 구황동삼층석탑으로 불리는 황복사지삼층석탑에서 보듯이 탑신의 부재를 기둥돌과 벽판석으로 분리하지 않고 한 면에 하나씩의 석재를 이용하여 거기에 기둥 모양을 세기는 등 석재의 결합이 더욱 간결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탑은 기단에 비하여 탑신이 장중하고 규모 또한 후대의 석탑보다 거대한 것이 특징이다. 8세기 중엽에 들어서는 많은 석탑들이 더욱 간략화된 결합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하나의 체계적인 법칙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면 8세기 중엽에 세워진 가장 대표적인 석탑인 불국사삼층석탑( 석가탑, 751년 경 건립)을 살펴보면 우선 기단의 벽면 가운데 새겨진 기둥이 아래층에는 새 개, 윗 층에는 두 개로 정비되었으며 탑신부는 3층을 기본으로 하여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씩의 돌로 짜여졌는데, 기단은 훨씬 강화되고 전체적으로는 초창기의 괴량감 넘치는 탑에서 다소 규모는 작으나 안정된 탑으로 정착되고 있다. 이러한 법식은 당대의 석탑에서 한결같이 나타나는 양식이므로 실제로 이 무렵에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하겠다. 이로부터 통일신라의 전형석탑은 왕경(왕경)인 경주를 벗어나 지방으로의 건립이 확산되어 경북 금릉의 갈항사삼층석탑(갈항사, 758년, 현 경복궁 소재)이나 경남 창녕의 술정리동삼층석탑에서도 동일한 형식을 보이고 있다.
③ 전형 양식의 변화
8세기 후반에 이미 확립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양식은 지방으로 확산되어 9세기에 들어서는 전국 각지에 상당수의 석탑이 서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신라왕조가 쇠망기로 접어들어 왕실의 기강이 문란하여지고 융성했던 문화도 더 이상 내실을 기하지 못하고 퇴조하였다. 반면에 지방 각치에서는 호족(豪族)들이 일어나 지방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유학승들로부터 새로이 도입된 신종불교가 지방 세력의 후원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각 처의 사찰과 선법을 전수하는 고승을 중심으로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하대에는 지방에서 중국에서 도입된 선종이 호족들의 취향에 맞아 크게 성행하였는데 풍수지리학설과 6두품, 노장의 은둔사상과 더불어 반 신라적 사상을 띄었다.
선종 구산 선문 내용
교단명
창시자
위치
내용
가지산파
도의
전남 장흥 보림사
최초 창건
실상산파
홍척
전북 남원 실상사
동리산파
혜철
전남 곡성 태안사
봉림산파
현욱
경남 창원 봉림사
사자산파
도윤
강원도 영월 홍녕사
사굴산파
범일
강원도 강릉 굴산사
성주산파
낭혜
충남 보령 성주사
무염.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
희양산파
지증
경북 문경 봉암사
도헌. 지증대사비. 사찰경제와 북종선 전래
수미산파
이엄
황해도 해주 광조사
왕건의 스승
당시의 세워진 탑으로 대구 동화사의 비로암삼층석탑(동화사琵盧菴三層石塔, 863), 전남 장흥의 보림사삼층석탑(보림사寶林寺三層石塔, 876) 등은 비교적 건립연대가 확실한 석탑이며, 이밖에도 충남 보령의 성주사지오층석탑(聖住寺址五層石塔), 충북 중원의 탑평리칠층석탑(塔坪里七層石塔),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 전북 남원의 실상사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전남 구례의 화엄사오층석탑(華嚴寺五層石塔)등을 대표적인 석탑으로 들 수 있어 9세기의 신라석탑은 경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탑들은 대체로 규모가 작고 기단의 폭과 기단에 배치되는 기둥의 수도 줄어들었으며, 처마 밑의 층단수가 감소하면서 동시에 층단의 두께도 얇아지는 경향을 띠고 있어 일반적으로 8세기 전성기의 탑보다는 안정감과 조형성이 감소되었다. 반면에 기단과 탑신에 팔부중상(八部衆像),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의 조각이 베풀어지고 기단과 초층탑신의 사이에 탑신 괴임돌을 삽입하는 등 장식화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9세기 이후 신라 하대의 석탑은 전체적으로 조형기법이 8세기의 전성기의 석탑보다 뒤떨어지며 이러한 조형성의 결핍을 외관의 장식으로 보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석탑에서 정립된 기본적인 형식은 변함없이 계승되어 후대의 고려시대 석탑에도 통일신라 석탑의 강한 전통에 상당한 기간동안 남게 되었다.
보물 114호 안동 평화동 삼층석탑 (安東 平和洞 三層石塔),
④ 이형 석탑
삼국통일 이후 7세기 후반에 성립되기 시작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은 8세기 중엽에 들어 정사각형의 기본평면에 안정감 있는 2층기단을 쌓고, 그 위에 탑신을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으로 결구하면서 치마 밑에는 층단받침을 내는 형식으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8~9세기에 걸쳐 전국적으로 이러한 형식의 석탑이 보급되었으므로 이 형식의 석탑을 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는 전형의 조영법식을 벗어나 기단이나 탑신부를 반형시켜 외형상으로도 일반형 석탑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석탑들도 일부 조성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형석탑은 불국사에 남아 있는 다보탑(多寶塔)으로 맞은편에 세워진 석가탑과 함께 8세기 중엽의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하고 있다.
이 탑은 사방에 계단을 마련한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네 귀와 중앙에 탄탄한 사각기둥을 올렸으며 원래는 기단의 사면에 석사지를 두어 탑을 외호(外護)하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한 마리만 남아 있다. 기둥 위는 사각지붕으로 덮고 지붕 위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그 안에서 탑신부를 받고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평면 팔각의 형태로 모든 부재가 결합된다. 탑신의 조형은 팔각의 난간, 대마디[竹節]형 기둥, 연꽃무늬의 원형화반석(圓形花斑石), 꽃술형 지붕받침 등이 결합되어 매우 화려하면서도 정밀하고, 전체적인 조화가 아름다워 신라 석조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전남 구례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은 상층기단을 네 마리의 돌사자와 가운데 공양상(供養像)을 배치하고 갑석(甲石:덮개돌)을 얹은 다음 삼층의 탑신을 받고 있으며, 경주 부근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定惠寺地十三層石塔)은 단층기단 위에 초층탑신을 목탑처럼 기둥돌과 벽면석으로 거대하게 조립하고 2층부터는 규모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마치 12층의 지붕돌만 포개놓은 형태를 하고 있다.
석굴암(石窟庵)앞의 삼층석탑(석굴암)과 강원도 철원의 도피안사삼층석탑(도피안사到彼岸寺三層石塔)은 탑신이 사각형인데 반하여 기단은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도피안사석탑은 단층의 기단에 위 아래로 연꽃무늬를 두르고 있어 마치 불상의 연꽃대좌[蓮化臺左]를 연상케 한다.
전라북도 남원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실상사,實相寺陌庵三層石塔)은 단층기단 위의 탑신 전체에 난간, 신중(神衆),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들이 조각되어 있고 경주 남산동동삼층석탑(南山洞東三層石塔), 경주 서악동삼층석탑(西樂洞三層石塔) 등은 기단과 탑신에 기둥을 새기지 않고 지붕도 위 아래에 모두 층단을 내고 있어 형식은 일반형을 따르고 있지만 조형기법은 전탑을 모방하고 있다.
이밖에 경남 양산의 통도사금강계단(通道寺金剛戒壇)은 우리나라 석종형사리탑(石鐘形舍利塔)의 대표적 유적으로 최초의 건립은 선덕여왕 때부터이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지 여러 차례 보수를 거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탑의 전체 또는 일부를 변형시켜 새로운 형태를 보이는 석탑이 조성되는 배경에는 불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석탑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더욱 엄숙하게 장식하려는 욕구에서 착상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시기적으로 이형석탑이 등장하는 것은 돌을 다루는 기술이 축적되어 능란하게 석탑을 조성할 수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므로 불국사 다보탑이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등은 8세기 중엽 이후에 들이 바야흐로 석탑조형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가운데 이룩된 것이라고 하겠다.
⑤ 전탑
전탑이란 벽돌을 구어 층층히 쌓아올린 탑으로 우리나라 전탑의 시조는 비록 전탑은 아니지만 신라 선덕여왕 3년(622)에 돌을 벽돌처럼 잘라 축조한 경주 분황사모전석탑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는 탑의 축조에 벽돌을 많이 이용하여 일찌감치 전탑의 조성되었고 인도에서도 초기에 불탑을 제울 때 벽돌을 사용하였는데, 지금도 중국에는 가장 오래된 전탑으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인 북위(北魏) 효명제 때인 정광 4년(523)에 건립한 숭악사십이각십오층진탑(嵩岳寺十二角十五層塼塔)이 남아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례가 없어 단지 백제의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벽돌을 사용했던 용례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분황사 모전석탑이나 『삼국유사』에 양지(養志)가 진탑을 하나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7세기에는 우리나라에도 전탑축조에 대한 인식이 이미 존재하였다고 하겠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는 실제로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전탑이 축조되고 있었다. 현존하는 전탑은 경북 안동의 신세동칠층전탑 (新世洞七層塼塔)과 동부동오층전탑(東部洞五層塼塔) 등을 비롯하여 제천, 안동, 의성, 영양 등지의 곳곳에 모전석탑과 더불어 십여 기(基)의 전탑이 남아 있는데 이와같이 우리나라에서는 일부지역에서만 전탑과 모전석탑이 축조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영양의 유일한 국보 문화재인 국보 제187호 봉감 모전 오층 석탑은 우리나라에 얼마 되지 않은 모전탑이라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국보이다. 삼지동 모전 3층 석탑(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83호)은 절벽을 이룬 산 중턱에 돌출된 암반 위에 큰 바위를 기묘하게 석탑 기단으로 이용하여 모전석탑을 건립하였다. 현재 2층으로 탑위에 노반(탑의 상륜을 받치는 가장 위의 옥개석 위에 놓은 석탑신부의 맨 위에 해당하며 이 노반 위에 복발이 있다)과 복발보주(노반 위에 있는 발을 엎어 놓은 모양의 석물)가 있어 상륜부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탑은 현존 연대암 부근에 영혈사(靈穴寺)가 있었는데 영혈사 소속의 탑으로 보이며 이 탑 감실 안에서 4좌의 신라 삼국통일전에 만든 금동불이 나왔으나 도난당하고 말았다.
전탑의 형식적 특징은 대체로 규모가 크고 낮은 단층기단에 비대한 초층탑신을 올리고 여기에 감실을 마련하여 출입문을 내고 있으며 더러는 후대에 들어 지붕에 기와를 입히고 있고 2층 이상의 탑신을 높이가 급격히 감소되어 촘촘히 층을 올리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탑 전체를 모두 벽돌을 사용하지 않고 기단, 감실, 또는 초층탑신의 일부에 석재를 사용하고 있어, 비록 전탑을 지으면서도 석재에 대한 미련을 전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 전탑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 건립된 충북 제천장락동칠층모전석탑(提川長樂洞七層模塼石塔), 강원도 정선의 정암사수마노탑(淨岩寺水馬瑙塔),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등의 모전석탑과 전탑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영양의 현2동 모전5층 석탑은 1단의 방형의 석축기단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흑회색 점판암을 쌓아서 건립된 5층탑이다. 제1탑신의 동서에 감실을 마련하고 화강암으로 만든 문주석을 삽입시키고 금강역사가 아닌 당초문을 양각한 이색적인 케이스다. 건축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아쉽고 임란때 국헌공 오수눌 장군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3) 고려시대의 석탑
① 탑의 개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후삼국으로 분열된 국토를 다시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국한 고려왕조는 개국 초기부터 불교를 국가종교로 받아들여 전국적으로 불교가 활발하게 융성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전 시대를 걸쳐 불탑이 가장 많이 조성되던 시기도 바로 고려시대였으며 탑의 건립에 대한 후원자로는 국가, 왕실, 귀족 등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도 참여하여 고려시대의 불탑에는 수준높은 작품으로부터 비록 서툴지만 지방적인 특색을 드러내는 작품들까지 나타나고 있고, 탑의 형태도 일반적인 사각다층탑으로부터 다양한 이형석탑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의 불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던 것은 역시 목탑이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만 개성부근의 사찰에 세워진 목탑과 남원의 만복사탑(萬福寺塔) 등에 대한 사실이 옛 기록들에 남아 있다. 그 중에는 이러한 목탑의 위용에 대한 내용도 간간히 살려있어 목탑은 고려시대에도 꾸준히 건립되고 있었으며 워낙 공이 많이 들기 때문인지 비교적 규모가 큰 사찰에서 주로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시대 불탑의 주류는 역시 석탑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통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약간의 변형을 시도하여 일반화된 양식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석탑양식이 이루어져 전국으로 확산되는 반면 일부에서는 지방적인 색채를 드러내는 석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옛 백제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식의 석탑이 부활되고,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 이남의 지역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의 전통이 강하게 계승된 점을 들 수 있다. 또 전체적으로는 탑에 새로운 장식이 첨가되기도 하고 여러 갈래의 이형석탑도 등장하는 등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석탑양식이 전개되었다.
② 석탑의 일반형
일반형의 고려석탑은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계승하여 평민 사각형의 2층기단 위에 단층의 탑신을 얹고 있는데 중부 이남지방에서 주종을 이루면서 약간의 변형을 가하고 있다. 대체로 기단과 탑신은 신라 석탑에 비하여 폭이 좁아지고 탑신은 층수가 많아져 전체적으로는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탑신 밑에 별도의 판석을 삽입하기도 하고 어떤 탑은 기단 위아래로 연꽃무늬를 돌려 마치 불상대좌와 같은 모습을 이루기도 한다. 또 지붕들은 두껍고 처마가 네 귀에서 위아래가 모두 곡면으로 들리며 일부의 탑에서는 기단도 단층으로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신라 석탑에서 보여주는 당당한 느낌은 줄어들고 비록 유연한 감은 있으나 대부분 늘씬한 형태를 이루어 안정감이 적다, 대표적인 탑으로는 경북 예천의 개심사지오층석탑(개심사), 충남 청양의 정산서정리구층석탑, 강원도 강릉의 신복사지삼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온 경기도 개성의 남계원칠층석탑과 경북 칠곡의 정도사지오층석탑, 그리고 전북 김제의 금산사오층석탑등을 들 수 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고려시대의 석탑이 이 범주에 속하면서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한편 영양의 보물 609호 화천동 삼층석탑과 보물 610호인 현일동 삼층석탑 등도 이 당시의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③ 다양한 석탑 양식
신라의 석탑은 비록 이형석탑이 존재하였지만 대체로 일반형 석탑이 주류를 이루는 일률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사찰의 조영과 불탑의 건립에 왕공귀족(王公貴族)뿐만 아니라 토착세력의 참여도 높아져서 고려사회의 새로운 성격이 부각되는 10세기 후반부터는 석탑에서도 새로운 조형의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첫째로 고려시대는 석탑이 지방적인 양식을 현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영남지방에서는 신라식의 석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에 옛 백제지역에서는 백제식의 석탑이 일부 부활되고 있으며 개성을 중심으로 한강 이북지방에서는 고구려 탑의 전통과 중국불탑의 영향으로 다각다층석탑이 성행한다는 것이다.
백제계의 고려석탑으로는 전북익산 왕궁리오층석탑(王宮理五層石塔)을 비롯하여 충남 부여의 장하리삼층석탑(長夏里三層石塔) 과 무량사오층석탑(무량사,無量寺五層石塔), 충남 서천의 비인오층석탑(扉仁五層石塔), 전남 강진의 월남사지모전석탑(月南寺址模塼石塔) 전남 진도의 금골산오층석탑(金骨山五層石塔) 등을 들수 있으며 이러한 탑들은 백제때 세워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을 모델로 하고 있다. 다각다층석탑으로는 강원도 오대산의 월정사팔각구층석탑(月定寺八角九層石塔)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지엽적이지만 전남 광주일대, 강원도 춘천일대 등지에서도 소규모적인 지방양식의 석탑이 조사되었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더욱 많은 지방양식 석탑의 계보가 찾아질 것이다. 이러한 지방양식의 석탑이 조성되는 배경은 뚜렷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신라석탑의 조형이 이미 쇠잔해진 가운데 각 지방의 우수한 석탑의 여파가 시대를 불문하고 지방양식의 모델로서의 영향을 미치거나 토착세력의 부각에 따른 새로운 형식의 고안, 또는 복고풍 석탑에 대한 향수가 특이한 지방양식의 석탑과 백제식 및 고구려식의 다각다층탑의 재현을 불리 일으켰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둘째로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갈래의 이형석탑이 조성되는데 이중에는 신라시대의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전통을 이은 것도 있지만 새로이 흑색 점판암을 사용한 이른바 청석탑(靑石塔)이 유행하기도 하고 탑신의 층층마다 괴임돌을 삽입하는 기법과 탑신 전체에 불보살상이나 여러가지 무늬를 새기는 기법이 새로이 나타나며, 상륜부의 특수형식이 등장하기도 하고 이밖에 전혀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발생하는 등 이형석탑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주목된다.
즉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을 모델로 한 고려의 이형석탑은 충북 월악산의 사자빈신사지다층석탑(獅子嚬新寺址 多層石塔)과 강원도 홍천괘석리사사자삼층석탑을 들 수 있다. 청석탑은 전북 김제의 금산사육각다층석탑이 있는데 세밀한 조각을 곁들일 수 있는 장점은 있으나 재질이 연하여 소규모의 탑재로서만 가능하고 또한 파손되기 쉬운 지금까지 완형으로 남아 있는 작품은 없다. 청석탑의 건립은 이미 신라시대의 해인사 원당암다층석탑(해인사,願堂庵多層石塔)에서 그 시원을 볼 수 있는데 본격적으로 조성되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神僕寺址三層石塔), 남원 만복사지오층석탑(만복사,萬福社 五層石塔), 경복궁의 홍제동오층석탑 등에서는 탑신의 층층마다 과임돌을 삽입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남원의 실상사백장암삼층석탑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탑신 전체에 인물상과 무늬를 새겨넣은 기법은 고려시대에 들어 개성부근의 현화사칠층석탑(玄化社七層石塔) 등에 계승되고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址十層石塔, 현 경복궁 소재)에 이르러서는 화려함이 극에 다다르고 있다.
아울러 고려말기에 들이 공주 마곡사오층석탑(麻谷寺五層石搭), 김제 금산사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여주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경복궁의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 十層石塔) 등의 상륜부가 이국적인 스타일로 등장하며 전남 화순의 운주사(雲住寺)에는 한 사찰에 수십 개의 석탑이 조성되는 가운데 탑신에 꽃무늬,×자무늬, 마름모무늬 등 전혀 생소한 무늬가 장식되고 원형다층석탑(圓形多層石塔),계란형다층석탑(鷄卵形多層石塔) 등도 세워진 특수한 예를 보이고 있다.
또 하나의 고려석탑의 특수한 예로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 十層石塔)을 빼 놓을수 없다.
이 탑은 고려말기인 충목왕 4년(1348)에 세워진 것으로 평면이 사면돌출형(四面突出形)인 기단을 3단으로 쌓고 탑신은 3층까지는 사면돌출형을 유지하다가 4층부터는 사각형으로 바뀌었으며 상륜부는 사각형의 돌기둥형으로 마감하고 있다. 흰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기단으로부터 탑의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온통 불보살(佛寶薩), 신중(神衆), 운룡(雲龍), 초화(草花), 동물 등을 표면에 새겨 넣고, 탑신에는 층마다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목조건물의 온갖 부재를 세밀하고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어 탑 전체가 목조건물을 방불케 하여 석탑이면서도 대작의 석조 공예품을 대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려시대 석탑 장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경북 선산의 도리사석탑(桃李寺石塔)은 고려시대 특수형식의 귀중한 석탑으로 남아 있으며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동대탑(金銅大塔)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공예탑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작품으로 유명하다.
영양군 용화동 583번지 밭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경북 지방 유형문화재 제8호인 용화동 삼층석탑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2단의 기단위에 3층 석탑형식으로 기단부와 탑신부는 있으나 상륜부는 없다.
4) 조선시대의 석탑
① 탑의 개요
천 여 년간 민족신앙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해 온 고려시대 말기에 들어 국가의 무분별한 비호와 불교집단세력의 비대정상적인 성장으로 오히려 사회적인 부패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일어섰던 신흥사대부들은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건국하면서 유학(儒學)을 실천이념으로 표방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민족의 정서도 서서히 유교적 분위기로 탈바꿈하게 되고 불교는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과 거센 억압을 당하였으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불탑을 포함한 불교미술도 간혹 몇 명 왕들의 후원으로 약간의 조형활동이 지속된 적은 있었으나 전반적으로 위축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조선시대의 불탑 건립은 왕실의 비호가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나마도 조선 중기 이후로는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석탑은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전대석탑의 한 부류로서의 모방에 머무르다가 끝을 맺고 말았다
② 목탑
조선시대의 조성된 불탑 중에서 목탑으로는 태조의 후비(後妃)의 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릉(貞陵) 부근에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5층의 사리각(舍利閣)을 세운 것이 유일한 기록이며 속리산 법주사팔상전(法住寺捌相殿), 전남 화순의 쌍봉사대웅전(雙峰寺大雄塼) 등이 조선시대의 목탑으로 전하여져 왔는데, 쌍봉사대웅전은 1984년에 소실되고 지금은 법주사 팔상전만이 유일한 조선시대 목탑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단 하나뿐인 목탑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법주사팔상전도 여러 번의 개축과정을 통하여 조선시대에 이른 것이며, 그 시초는 지금도 남아 있는 초창기의 기단과 함께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더구나 이 팔상전은 탑신의 치마를 받치는 포의 구성이 윗층으로 오를수록 중첩이 심하여 익산 미륵사지석탑의 처마 조성기법과 상통하고 있어 그 계보가 주목되고 있다.
③ 석탑의 일반형
조선시대의 석탑은 새로운 양식이 성립됨이 없이 전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경상남도 함양의 지리산에 있는 벽송사삼층석탑은 신라의 일반형석탑과 형식상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 신륵사다층석탑(신륵사)은 기단부의 조형은 경천사지 십층석탑에서 착상의 실마리를 얻고 탑신부는 고려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칠층석탑(낙산사)은 각층 마다 탑신괴임대를 삽입하는 수법이 고려시대의 석탑인 강릉 신복사지삼층석탑을 모방하고 있다.
④ 이형 석탑
세조 13년(1467)에 세워진 서울 탑골공원(일명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고려말기의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본뜬 것이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은 경천사지 10층석탑과 재료, 형식 등이 똑같으나 10층탑신의 지붕 모양이 틀리고 조각의 솜씨는 평면화되어 표현 감각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다.
원각사지 10층석탑의 양식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조선시대 석탑조형에 약간의 영향을 주고 있어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