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굿판에서 접신(接神)하려고 춤추는 무당”을 묘사한 조선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3)의 1805~1813년작 〈무녀신무도(巫女神舞圖)〉이다.
☞ 한국 현대 노예론 초안(제1꿰미) 자본주의 샤머니즘 중력마귀 인문학 체면 최면 순응 교육 언어 주어 생략 글쓰기; 노예근성과 고정관념
한국에서 여태껏 자본주의를 내동(內動)시켰거나 음동(陰動)시킨 샤머니즘(Shamanism; 무속신앙), 중력마귀(重力魔鬼; Der Geist der Schwere ☞ 참조), 안이하고 부실한 인문학, 후안무치하고 야비한 갑질(☞ 참조)로 자행되도록 시늉되는 졸렬한 체면의 최면(體面의 催眠)에 순응하는 비겁하고 졸속한 교육계(☞ 이상한 나라의 교육과 학부모들), 걸핏하면 “다 너(자녀)를 위해! 너 잘 돼라고! 먹여살리려고! 먹고사느라!”고 착각하여 확신하고 맹신하듯이 씨불여버릇하는 무분별한 학부모들의 (☞ 명문대를 노리고 3년 피폭마저 감수하는) 노예성, 주어를 뻔질나게 생략해버릇하는 글쓰기를 조장하고 조장당하는 개체나 집단의 노예근성, 편견, 고정관념 …….
이따윗것들을 더듬거리는 자질구레한 모깃글들에 앞달린 임시제목들을 거듬거듬 얼기설기 나열한 〈한국 현대 노예론 초안(제1꿰미)〉라는 윗모깃글은 초벌색인이나 애벌색인의 일종이다.
2016년 12월 14일에는 이렇게 엉성한 색인의 초두에 “적어도 현대 한반도에서 여태껏 자행된 ‘모든’ 교육은 아닌 ‘거의 모든’ 교육은 노예사육들이다(Not ‘all’ but ‘almost all’ of educations, at least in the modern Korean Peninsula, have hitherto been enforced and volunteered simultaneously as the breedings of slaves)”는 제사(題詞)도 빌붙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명사 “꿰미”는 “물건을 꿰는 끈이나 꼬챙이 따위, 또는 거기에 무엇을 꿴 것, 또는 민(緡),”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끈 따위로 꿰어서 다루는 물건을 세는 단위”라고 풀린다(설명된다; 정의된다).
그리고 같은 사전에 등재된 동사 “꿰다(ㅅ궤다/ㅅ게다/ㅄ게다)”는 “(1) 실이나 끈 따위를 구멍이나 틈의 한쪽에 넣어 다른 쪽으로 내다, (2) 옷이나 신 따위를 입거나 신다, (3) 물체를 뚫고 지나다, (4) 좁은 길 따위를 지나다, (5) 어떤 일의 내용이나 사정을 자세하게 다 알다”라고 풀리지만(설명되지만; 정의되지만), 윗초벌색인의 제목에 낑긴(낀) 명사 “꿰미”는 결코 동사의 (3)과 (5)를 뜻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튼 윗초벌색인에는 에스파냐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호야; Francisco Goya, 1746~1828)의 1796~1798년작 동판화집 《변덕(Los Caprichos)》에 수록된 제43번 〈이성(리성; 理性)의 잠은 괴물들을 출산한다(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uos)〉와 1823년작 유화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us; 사투르노; Saturno; 크로노스; Cronos)〉, 미국 화가 찰스 앨런 길버트(Charles Allan Gilbert, 1873~1929)의 1892년작 〈모든 것이 헛되다(All Is Vanity)〉, 오스트리아 화가·작가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 1877~1959)의 1904년작 〈지옥행로(Der Weg zur Hölle)〉와 1922년작 〈폭식(Voellerei)〉, 프랑스 화가 아돌프 윌리암 부그로(Adolphe William Bouguereau, 1825~1905)의 1849년작 〈지옥을 방문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Dante et Virgile)〉 같은 그림들마저 인용되거나 인시(引示)되었다.
심지어 윗초벌색인에 낑긴(낀) 〈초안(3) 한국 교육 자본주의 샤머니즘 입시 학교 無主語 허무주의〉라는 항목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이른바, 수능, 순응. 절대적 순응. 줠뙈쩍 쑨으~~~응! 한반도휴전이남지역에서 여태껏 거창방창하게 대대적으로 절대적으로 줄기차게, 겉꼬라지만 깔짝깔짝 힐끔힐끔 찔끔찔끔 바뀔락말락하면서, 해마다 자행된 수능행사! 순응행사! 절대적 순응행사! 줠뙈쩍 순응행싸! 이토록 지독한 행사를 비밀리에 암암리에 공공연히 주동·조장·선동하고 횡행·창궐시키는 한국 특산 허무주의적 샤머니즘, 무속신앙, 무속심리, 극심한 모순심리는 여전히, 푸흡, 애오라지, 학부모·학부형들에게만 오리무중·아몰랑거리려니”라는 얄망궂고 괴괴한 감회도 찔끔 양념되었다.
그러나 윗초벌색인의 〈(4) 지적 한국 투표 정치 민주주의 노예 제도 학벌의식 꼰대 사대주의〉라는 항목에 빌붙은 다음과 같이 미적거리는 불완전문장처럼 “신(들)이 신(들)을 반성하지 않듯이, 노예(떼)도 노예(떼)를 반성하지 않듯이, 군중도 군중을 반성하지 않듯이 ……” 한국 학부모(대다수)도 학부모(대다수)를 반성하지 않거늘, 그러니까, 자성(自省)하지 않거늘, 얄궂고 절묘하게도 오직, 애오라지, 자본주의만이 여태껏 자본주의를 부지런히 집요하게 성찰했고 반성했으며 자성했을뿐더러 여차하면 이른바 “창의적인!” 자혁(自革)이나 내부혁명(內部革命)마저 기꺼이 감행할 수 있었더라(☞ 참조 〈성찰 반성하는 자혁적 자본주의 한국 인문학 퇴화 문학 문예 위기론 노예 배양 제배 사육 조건 무반성 무분별 학부모 교육 세뇌 주입〉).
그렇다면 ‘오직, 애오라지, 자본주의만이 적어도, 최소한, 자혁하거나 내부혁명할 수 있을 것이다’고 추정될 확률은, 그러니까 한반도 학부모 대다수가 스스로를 계몽할 수 있을 확률은(☞ 참조),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미미하거나 극미하든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할 수도 없잖을 것이다.
독일 사회학자·역사학자·정치경제학자 막스(막시밀리안) 베버(Max; Maximilian Weber, 1864~1920)의 1905년작 논저 《프로테스탄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에서 얼추 가늠된 초기 자본주의는 종교의, 정확하게는 기독교의, 더 정확하게는 프로테스탄교의 윤리를 뒷배로 삼거나 앞잡이로 삼아 발달했지만, 어찌어찌하다가 여차하여 앗차 싶자마자 내팽개쳐버리고 다른 뒷배로, 예컨대, 일찍이 겉부숴 묵혀뒀던 신분제의 표식과 샤머니즘의 상징을 다시 번드르르하게 재포장한 표식과 상징(☞ 참조)으로, 냅다 갈아타거나 다른 앞잡이로 재빨리 교체하면서 후다닥 자혁하거나 후루룩 뚝딱 내부혁명하여 다시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 뒷배 갈아타기나 앞잡이 교체하기는 어쩌면, 아랫그림에서 상징적으로 예시되었듯이, 일찍이 십자가에 육신을 바쳐 희생했던 예수의 영혼마저 십자가에 못질하고 매달아 제물로 삼는 희생의례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랫그림은 미국 정치만평가·출판인 유도 케플러(Udo Keppler; 조지프 케플러 주니어; Joseph Keppler Jr., 1872~1956)의 1913년작 〈저놈을 십자가에 못질해라! 저놈을 십자가에 매달아라!(Crucify Him! Crucify Him!)〉이다.
“열아홉 세기 전에 그의 육신에 자행한 짓을 오늘날에 그의 정신에도(영혼에도; 성령에도) 똑같이 자행하는 시위대”라는 설명문마저 밑단 아랫그림에는 고리대금업자(usurer; 私債業者; 貸付業者), 부패공직자(비리공무원; corrupt public servant), 악질(악덕) 고용주(inhuman employer), 탐욕(greed), 부당 이익금(검은 돈; tainted money), 위선자(hypocrite), 부패관료(vice grafter; 악질 사기꾼; 협잡꾼) 따위들도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