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舍廊房) 야화(夜話) 기둥 서방(書房) 여럿
첩(妾)만 보는 남편(男便)떠나 포목점(布木店) 연 이월댁, 비단(緋緞) 도매상(都賣商) 박대인과 거래 텄는데, 접대(接待)를 못해 ‘을’의 설움 톡톡히...
어느날 이월댁이 잔뜩 치장(治粧)하고는 박 대인(大人)을 안방으로 모셔와…
이월댁은 오늘 밤도 방구들이 깨져라 한숨을 쉰다. 창(窓)을 열자 달빛이 하얗게 들어와 금침(衾枕)에 내려앉고 짝을 찾는 풀벌레 소리는 애간장(肝腸)을 녹인다. 서른둘, 농(濃)익은 여인(女人)은 허벅지를 꼬집어보지만 허사(虛事)다. 남편(男便)이란 게 첩(妾)을 둘씩이나 얻어 집엔 아예 발길조차 들여놓지 않는 것이다. 이월댁은 독(毒)하게 맘 묵구 짐 보따리를 쌌다.
사랑방 시아버지께 작별(作別) 인사(人事)를 올렸더니 후덕(厚德)한 시아버지가 꽤나 묵직한 전대(錢帶)를 꺼내 이월댁에게 건넨다. 이월댁은 눈물을 흩뿌리며 시집을 나와 삼십리 밖 친정(親庭)으로 갔다. 친정(親庭)살이가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니 올케 눈치가 보이기 시작(始作)했다. 이월댁은 친정(親庭)어미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왔다. 그녀는 성큼성큼 한양(漢陽)으로 발길을 옮겼다.
‘남정(男丁)네만 장사하란 법 있나?’ 시아버지가 준 삼백냥과 친정(親庭)어미가 준 이백냥, 거기다 시집갈 때 받은 패물(貝物)을 팔아 이월댁은 종로(鐘路)에 조그만 포목점 (布木店)을 열었다. 상주(尙州)의 비단(緋緞) 도매상(都賣商)인 박 대인과 거래를 트며 이월댁은 ‘을’의 설움을 톡톡히 당(當)했다. 이유인즉슨, 종로(鐘路)의 큰 포목점 (布木店) 주인들은 상주(尙州)에서 박 대인이 올라오면 비단(緋緞) 오백필 육백필 (六百疋)을 주문(注文)하고는 그날 밤으로 박 대인을 모시고 명월관(明月館)으로 가 질펀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퐁당 빠뜨리는 것이다. 이월댁은 기껏해야 오십필 (五十疋) 남짓 주문(注文)하고 순라(巡邏)길 골목에서 설렁탕 한그릇 대접(待接)하는 게 전부(全部)였다.
박 대인이 명월관(明月館) 기생(妓生)의 머리를 얹어줬다느니 낙원동에 첩(妾) 살림을 차렸다느니 하는 잡다(雜多)한 소문(所聞)을 듣고 이월댁은 곰곰이 생각(生覺)했다. 그렇다고 박 대인에게 기생(妓生)을 붙여 잠자리까지 마련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월댁은 가게 뒤에 딸린 살림집 안방을 우아하게 꾸몄다. 자신도 비단(緋緞)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흑단(黑檀) 같은 머리엔 동백(冬柏)기름을 발랐다. 시집살이할 때는 논밭으로 돌아다니느라 새까맣던 손과 얼굴이 이제는 백옥(白玉)처럼 고와졌다. 그 위에 화려(華麗)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이월댁은 자기 눈을 의심(疑心)했다.
이월댁은 어느 날 박 대인(大人)을 자기 살림집 안방으로 모셨다. 그럴듯한 상(床)을 차려놓고 좋은 술을 한잔 올렸다. 비단(緋緞) 거상(巨商) 박 대인은 눈이 휘둥그레 졌다. 박 대인이 물었다. “저기 걸린 족자(簇子)의 게발 글씨는 누가 쓴거요?”
“당나라 현종(玄宗) 때 이백(李伯)과 어깨를 견준 장계의 시를 소첩(小妾)의 조부 (祖父)께서 초서(草書)로 쓰신 겁니다.”
어릴 적 조부(祖父)로부터 체계적(體系的)으로 글을 배우고 사군자(四君子)도 친 그녀(女)가 풍기는 학식(學識)은 서당(書堂) 근처(近處)에도 못 가본 박 대인을 움츠러들게 했다. 사십대 중반(中盤)의 어깨가 떡 벌어진 박 대인은 얼근하게 취(醉)해 이월댁 손목을 잡고는 촛불을 끄고 상(床)을 쓱 밀었다. 이튿날 박 대인이 금침(衾枕)에서 눈을 뜨자 동창(東窓)이 밝아 오는데 화사(華奢)한 미소(微笑)를 머금은 이월댁이 꿀물을 타왔다.
박 대인은 기생(妓生) 속치마를 수없이 벗겨봤지만 이월댁은 달랐다. 이월댁에게 푹 빠졌으나 마음대로 이월댁의 안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월댁이 어떤 때는 얼음처럼 냉정(冷情)해 박 대인의 애를 태웠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박 대인이 말했다. “이월댁, 상주(尙州)에 있는 내 마누라를 쫓아낼 테니 정실(正室)로 들어와줄 수 없겠소?”뭐든지 해달라는 것 모두 들어주리라.. 진짜로? 그럼!
이월댁은 박 대인의 어처구니 없는 제의(提議)를 받고 “조강지처(糟糠之妻)를 버리면 안 됩니다”라고 단칼에 짤랐다. 갑(甲)과 을(乙)이 뒤바뀠다. 이월댁 창고(倉庫)엔 상주(尙州) 비단(緋緞)이 산더미처럼 쌓여 다른 포목점(布木店)이 박 대인에게 비단을 주문(注文)하면 이월댁 창고(倉庫)에서 출하(出荷)된다. 이월댁이 거느린 기둥 서방(書房)은 박 대인뿐만이 아니다. 안동포(安東布) 시장(市場)을 움켜쥔 권 대인(大人), 한산(韓山) 세모시 상권(商權)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노 대인(大人)….
※ 기둥이 여러개라 태풍와도 끄떡 없을기여, 기둥 하나뿐인 우리는 바람만 불어도 풍전등화 (風前燈火)인데.. 조강지처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이란 말 못들어 봤나. 이월댁 똑똑혀...아주.
조강지처불하당 : 함께 고생한 마눌을 뜰 아래로 내몰면 늘그막에 피눈물 난다라는 뜻 같은데 말만 듣고 안 겪어 봐서 잘모르....
※ 문사(文士) 우호기(禹浩基) 배(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