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삶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삶이 풍요로울 때 사람들은 죽음이나 종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 혹은 피하고 싶은 일이 됩니다. 요즘 과학기술은 달에 기지를 만들어 인류를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화성도 개척하겠다고 할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우리 삶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풍요로움을 누립니다. 무한한 풍요를 누릴 때, 정신은 피폐해집니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식으로 삶에 있어서 진지함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준비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죽음은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조금 다를까요?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죽음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것, 이 세상에서 삶의 풍요를 오래 누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죽음, 종말을 준비하는 기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복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뿐입니다. 복을 기대하고,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소망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일회적인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끝을 우리는 준비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그 인생의 끝에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인생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끝이 아니라 심판이 있고, 영원한 삶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는 영원한 삶이 고통일 수 있고, 누구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의 영원한 삶이 있다고 말합니다. 심판에 있어서 절대적 기준은 ‘오늘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지고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다음에 최후의 심판,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이 복을 받는 수단, 방법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믿음은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얻고, 필요한 복을 받아 누리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에 끝이 있고, 그 끝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루하루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흔히 마태복음 25장을 가리켜 ‘종말장’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종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언제 종말이 오며, 그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장에서 종말의 때와 징조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상징이라는 말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종말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흐트러지고 사람이 사람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혼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에 대해서는 24장 4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고 하십니다. 언제 종말이 임할지 궁금해하기보다는 언제 종말이 오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경고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은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25장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가 깨어 있어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비유인 열 처녀 비유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비유는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이 오면 안내해서 신부에게 데려가는 결혼 풍습입니다. 요즘 결혼 풍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풍습이었다고 합니다. 결혼식은 보통 일주일 정도 진행되는데, 끝나갈 무렵 신랑은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갑니다. 그때 신부 친구들이 들러리가 되어 신랑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아마 열 처녀는 신부의 친한 친구였을 것입니다. 비유를 시작할 때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라고 해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큰 차이는 없습니다. 열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몰라서 등불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밤이 늦어 등불을 켰는데 늦도록 신랑이 오지 않습니다. 열 처녀는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큰 소리가 나며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열 처녀는 일어나 등불을 켰는데, 다섯 처녀의 등에는 기름이 떨어졌고, 다섯 처녀는 준비한 기름을 채워 신랑을 맞이합니다.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점은 기름을 준비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차이뿐입니다. 그러나 기름은 잔치에 들어가 즐거움을 누리는 것과 밖에서 슬퍼하는 것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삶에서 기름은 무엇을 말할까요? 미련한 다섯 처녀가 기름이 떨어진 것을 알고 슬기로운 처녀에게 기름을 조금 꾸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는 다 부족하다’고 대답합니다. 기름은 꾸어줄 수 없는 것, 나눠쓸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아내나 남편이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그 덕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신앙생활 한다고 자식이 그 덕으로 천국 갈 수 있는 것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의 복을 받아서 나눠쓰고 살 수 있지만 심판대 앞에서는 각자 자기 믿음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내 자식, 내 남편, 내 부모 같이 구원해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손잡고 같이 천국 가려는 생각이 좋기는 한데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다음에 슬기로운 처녀들이 말합니다.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그래서 기름을 사러 갔는데 그만 신랑이 오고 문이 닫혀 버렸습니다. 기름은 그때 가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세요, 열심히 신앙생활 하세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중에, 다음에, 시간 날 때’ 열심히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에 기름을 준비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회를 놓쳐버립니다. 왜냐하면 한 번 미루면 두 번, 세 번 미루고, 끝까지 변명과 핑계로 미루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겠다고 하지만,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름은 매일매일 준비해야 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있다면 그때 가서 늦지 않게 준비할 수도 있지만,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13절)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차이는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미련하다고 해서 안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부의 친한 친구고, 들러리를 설 정도로 열심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열 처녀 모두 졸려서 잠이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잘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문이 닫히고 다섯 처녀가 문을 두드리며 애원합니다. ‘주여, 주여 열어 주소서.’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매정한 대답뿐입니다. 심판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에 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지만 그들을 향한 심판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1-23)는 호통뿐입니다. 책망 받는 이들의 믿음이 좋아 보입니다. 열심도 있고, 능력도 있고, 성취한 것도 많아 보입니다. 그런데 왜 책망 받았습니까?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판단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기름은 ‘내 생각에 이것이 옳고 좋은 일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면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부담을 주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행복하십니까? 예수님 덕분에 기쁘고 감사하십니까? 기쁘게 선한 일에 힘쓰며 하루하루 믿음의 기름을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