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8. 오전 9시 주일예배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3장)
신앙고백
찬송 14 주 예수를 아는 이들
기도 조용림 권사
성경 말씀 베드로전서 2:6~10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이제 내가 살아도
찬송 1268 이제 내가 살아도
헌금 기도 3010178504011(농협, 연세소망교회)
가족 방문 황막례 권사 교회 심방, 최연희 권사 아들. 남동생
박연순 집사 셋째 아들(외식), 김복순 권사 아들 부부
찬송 197 이 세상 험하고
축도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주님도 아프잖아요.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바다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 신영복
6절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절,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절,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니라
지난주에
빛깔이 달콤한 복숭아 한 상자를 가져왔습니다.
우리 이정숙 사모를 꼭 닮았습니다.
감사합니다.
6절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의 고뇌는 깊어만 갔습니다.
햄릿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결혼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햄릿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머니의 시동생, 햄릿의 삼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그러진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수석 제자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얼마나 떵떵거리고 거드름 피우고 얼마나 혈기 왕성했습니까?
마가복음 14장 29절입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3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절,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같이 말하니라.
목사님도 60을 넘겨 살아오기까지
베드로처럼 호언장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허세였고 허풍이었겠습니까?
닭이 두 번 울기 전,
이 밤이 세고 나면 모든 거짓말이 들통날 일들을 가지고
눈 가리고 아옹하며 살지 않습니까?
지금 고, 채 상병 청문회를 보면
대한민국 위정자들이
치졸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임성근 사단장(장군)도 거짓말에 비겁하기 이를 데 없어,
이순신 장군이 웃겠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장군이 되었을까?
이진숙 방통위원장 인사청문회를 보면 가관입니다.
청문회에 임하는 국회의원들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목사님이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이런 슬프고 씁쓸함에
고, 신영복 선생님의 유고집을 꺼내 부릅니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강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바다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 신영복
목사님도 지난 한 주간 몸살 났습니다.
장마로 1주에 두 번씩 잔디를 깎느라
거기에 소나무 전지까지 했더니 눈 알맹이까지 아팠습니다.
그리고 야곱만큼이나 많은 생각들.
그러면서 생각이 든 것은
냇물 되어 강물 따라 흘러가고 싶구나.
6절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비겁했던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 아니겠습니까?
한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퉁이 돌 취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베드로 역시 모퉁이 돌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순교했습니다. (AD 64)
이렇게 베드로는 뼈저린 고통을 통해서 다시 살았습니다.
그리고 던지는 말씀이니 의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6절입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믿는 자와
믿지 못하는 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이것을
천양지차天壤之差라 합니다.
햄릿의 말에 따르자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목사님은
믿음을 실천함으로 가르치는 자입니다.
믿음의 문제는
바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 속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사랑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허덕허덕 고단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우리 이정숙 사모를 꼭 닮은
빛 고운 복숭아를 목사님 드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렇듯 작은 것이라도 드리고라면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처럼 위대한 것만은 아닙니다.
늘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사랑을 절대 미루어 두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자주 듣는 When I dream (Carol Kidd) 노래가 있습니다.
멜로디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노래 가사 속의 여주인공은 재벌인가 싶습니다.
맘만 먹으면 높은 빌딩도 가질 수 있고
언제든 파리로 날아갈 수 있고
달나라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멋진 남정네들도 맘먹은 대로 다 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외롭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혼자 외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찾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나누고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는 성도님을 보면
참 순수합니다.
이것저것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마치 채송화 같습니다.
햇살을 보면 그냥 방긋 웃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운명입니다.
9절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유대인들에게 신약성경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모퉁이 돌인 줄 알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어긋난 자부심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경험만을 절대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생각만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목사님들이 절대 주권자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암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보다 못한 목사님들도 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성도 간, 격도 사라졌습니다.
누가 목사이고 누가 성도이겠습니까?
공공장소에 가면 똑같습니다.
교회에서만 목사이고 성도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잘 못 된 지식 때문에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창세기 28장 10절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우리도 야곱처럼 사닥다리의 꿈을 부여잡고 살아갑니다.
노인과 바다, 산티아고처럼
거대한 청새치를 낚으려 평생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상어에게 모든 살점을 뜯겨 앙상한 뼈만 남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낚은 것이 다 내 것이겠습니까?
하루아침에 풍비박산風飛雹散 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인생도 축복만 있었겠습니까?
팥죽 한 그릇으로 배고파하는 형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대가가
이렇게 험난한 인생일 줄 야곱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알량한 지식 따위가
야곱의 축복인량
우쭐거리며 선민의식에 살지 않았습니까?
목사 성도란 축복권이
야곱의 팥죽 한그루의 속임수에 불과하였다면 어쩌겠습니까?
축복이 아니라 고난 아니겠습니까?
물론, 고난이 축복의 통로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모두가 제사장입니다.
목사 탓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남의 탓만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모두 내 탓입니다.
그러니 함께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임 권사 아들은
코로나 걸려 끙끙 앓던 엄마를
홀로 병상에 남겨두고 도망간 자리를
목사님이 달려가 1주일 동안 지키지 않았습니까?
10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특히, 우리 가족은 50명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겠습니까?
목사님이 존경하는 이동휘 목사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불편하게 삽시다.
어제 6시 즈음에 설교 초벌을 마치고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우리 김복순, 백춘자, 임성례 권사, 김응칠 성도께서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성례 권사께서 더워 죽겠다고
어찌, 에어컨이 없느냐고 야단이었습니다.
임 권사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지 않았습니까?
띵띵 부은 심장에 물이 차고 당뇨에 코로나에 신장에 돌이 스물세 개나 박혀 있고
얼마나 교만한지 익산병원 과장이 진료 거부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임 권사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배불뚝이 식탐에 불만이란 불만은 가득합니다.
어찌, 에어컨이 없겠습니까?
익산에서도 2억이 넘는 예산으로 에어컨 시설을 완벽하게 했지만
방에는 에어컨 가동을 전혀 못했습니다.
에어컨 바람에 감기 들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최연희 권사 김응칠 장선자 성도는 추워서 담요 뒤집어쓰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좀 양보하고 불편하면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쟁통에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린 아기들까지 죽었습니다.
4,50도 넘나드는 땡볕에 사람이 수도 없이 죽어갑니다.
홍수에 집들이 송두리째 휩쓸려 갔습니다.
그런데 에어컨 바람 좀 약하다고,
덥다고 불편해서야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