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1867)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퇴폐적이고 우울한 정서와 날카로운 필치가 특징이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시인으로,
그로부터 프랑스 현대시가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악덕과 죄악감, 육체적 욕망을
외설적이면서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우울과 실존적 권태 등을 표현한 그는 당대 프랑스 문화계에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오늘날까지도 '퇴폐의 시인'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 19세기 파리 및 모더니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낭만주의 미술과 현대성을 새롭게 정립한 미술 비평가이기도 하며,
당대 시와 소설 비평도 활발하게 전개하면서
문학의 현대성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1821년 4월 9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제프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환속한 사제로,
그가 태어났을 때 62세의 고령이었다.
어머니 카롤린느 뒤파이스는 조제프의 두 번째 부인으로 당시 28세였다.
아버지 조제프 프랑스는 신부 출신이었음에도 자유주의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조제프는 보들레르가 6세 때 죽었으나
그의 이런 기질과 취향은 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는 후일 몇몇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 할아버지처럼 온화했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사제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이 미술 평론을 하게 된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다른 방향에서 보들레르의 성격에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1828년에
어머니는 직업군인인 오픽 소령과 재혼하는데,
그는 엄격하고 권위적인 인물로 반항기 많고 예민했던 사춘기의 보들레르와는 잘 맞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고통 없이 떠올릴 수 없는 지독한 중학 시절'을 보내게 했다고 표현하면서
의붓아버지를 증오했으며, 패배감과 상실, 우울함에 젖어 자라났다.
1832년에는
오픽이 리옹으로 부임함에 따라 가족이 모두 이주했다.
보들레르는 리옹 왕립 중등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로 올라가 루이 르 그랑 중등학교에 진학했으나
18세 때 품행 문제로 퇴학당했다.
중등학교 시절부터
보들레르는 시인이 되고자 마음먹고 계속 시를 썼다. 그
럼에도 성적은 좋았지만, 우등생은 아니었다.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보들레르는
규율에 복종하기를 싫어하는 반항심 많은 학생이던 것이다.
퇴학당한 해 8월, 보들레르는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합격했으며,
의붓아버지 오픽의 의견에 따라 파리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는 거의 다니지 않고
문학가들과 어울리면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매춘부에게 다니면서 성병에 걸리고, 빚까지 지게 된다.
결국 이복형 알퐁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가족들은 그를 파리의 퇴폐적인 생활에서 떨어뜨려 놓고자 인도행 배에 태워 여행을 보냈다.
그는 모리스 섬을 거쳐 레위니옹 섬에 몇 달간 머무르면서
이국적 정취를 느끼고 시를 지으면서 보냈으나
나머지 여정을 거부하고 7개월 만에 파리로 돌아왔다.
1842년, 21세가 된 보들레르는
성년에 이르자마자 후견인인 의붓아버지가 관리하던 친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돌려받았다.
그는 다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2년도 지나지 않아
유산의 약 절반을 써 버렸는데,
결국 놀란 가족들이 금치산 선고를 신청하여
이후부터 법정 후견인의 관리 아래 매월 돈을 타 쓰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큰 굴욕감과 패배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매달 받는 돈을 항상 며칠 만에 다 써 버리고
돈 문제로 후견인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가족, 특히 의붓아버지 오픽에 대한 원망이 더욱 깊어졌다.
1846년에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애인인 잔느 뒤발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 소동을 벌였고,
1848년 2월 혁명 당시에는 소
총을 손에 들고 "오픽 장군을 총살하러 가자!"라고 외치며 돌아다니기까지 했다고 한다.
1845년,
보들레르는 친하게 지내던 문인들의 격려 속에 미술 비평을 시작했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음을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던 듯하다.
그해 미술전에 출품된 작품들에 대한 비평을 실은 《1845년 미전평》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이듬해 《1846년 미전평》에서
낭만주의, 색채 등에 대한 그만의 시학과 미론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 비평과 영어 소설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작업도 했다.
무기력과 권태를 다룬 중편소설 〈라 팡파를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유일한 소설이다.
한편 사람의 감각을 고양시키는 방편을 여럿 연구했는데,
그러면서 술에 빠져들고 마리화나를 접하기도 했던 듯하다.
후일 신경흥분제로서의 포도주와 마리화나의 효능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한다.
1847년,
보들레르는 미국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접한다.
그는 〈검은 고양이〉를 읽고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고,
포를 '자신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라 칭할 정도로 완전히 매료되었다.
보들레르는 이듬해부터 약 13년간에 걸쳐
포의 단편 대부분을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한다.
미국에서 다소 낮은 평가를 받던 포는
보들레르의 번역과 비평으로 프랑스에서 높게 평가되었고,
이후 낭만주의 및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1857년,
근대시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게 될 문제작 《악의 꽃》을 출간했다.
이 책은 보들레르가 남긴 유일한 시집으로,
그는 이 시집으로 후일 현대시의 시조로 불리게 된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1851년경부터 다양한 제명으로 몇 편씩 발표했던 것으로,
대부분 그 무렵에 쓴 것이다.
서시 〈독자〉 및 〈우울과 이상〉, 〈악의 꽃〉, 〈반항〉, 〈술〉, 〈죽음〉의
5부 100여 편으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19세기 현대 도시화된 파리의 우울, 인간 소외, 권태와 환멸, 혼란 등을
분열적인 시각으로 그려 내고 있다.
보들레르는 그 어떤 유파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며,
당대 유행하던 낭만주의의 지나친 감상성과 무절제,
비이성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한편, 미(美)를 극도로 찬양했다.
그의 시들은 낭만주의의 정신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
가 비판했던 낭만주의의 결함을 뛰어넘으면서,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독일의 문예학자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라는 말은 보들레르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라고 표현했으며,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보들레르는 '새로운 전율'을 만들어 냈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몇몇 문학가의 극찬을 받았음에도
그는 당대인 대부분에게 외설적인 필화 사건을 일으킨 시인 정도로 여겨졌다.
《악의 꽃》은
출간 즉시 풍기문란하고 비도덕적이라며 비난받았고,
결국 보들레르는 경범재판소에 기소되어
벌금형 및 6편의 시를 삭제 출간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1861년에
32편의 신작 시를 증보하여 《악의 꽃》 재판을 간행하고,
1866년에는 삭제된 6편을 비롯해 새로운 시들을 추가한 재판을 간행했다.
보들레르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위축되고 파리 생활에 환멸을 느꼈으며,
경제적 궁핍과 매독 재발로 고통을 겪었다.
1864년,
그는 파리를 떠나 벨기에로 갔는데,
그곳에서도 원하던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해 괴로워하고 아편에 빠져들었다.
벨기에로 간 지 2년 만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생 루 성당에 갔다가 뇌연화증으로 쓰러졌다.
이후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채로
파리의 요양원에서 지내다 이듬해인 1867년 8월 31일 사망했다.
보들레르의 또 다른 대표 시집 《파리의 우울》은
보들레르가 여러 잡지에 발표한 산문시를 사후에 묶어 출간한 것이다.
작가 본인이 일관된 구성에 맞추어
고르고 재구성한 시집이 아닌 탓에
각 시들은 독립적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이 발표한 산문시를 '리듬과 각운이 없어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서정적인 영혼의 움직임, 물결치는 상념,
의식의 경련이 유연하면서도 거칠게 표현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런 그의 생각은
후일 베를렌, 말라르메 등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 그 문학적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