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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신분제의 변화에 관한 고찰
目次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신분제의 특징
1. 조선 초·중기 신분제
2. 조선 중·후반의 사회·제도적 변화
Ⅲ. 조선시대 신분제의 변화
1. 양반계층의 분화
2. 서얼의 신분상 변화
3. 중간신분층의 신분상승
4. 서민층의 신분상 변화
5. 노비층의 신분상 변화
Ⅳ. 맺는말
Ⅰ. 머리말
조선시대는 신분제를 기반으로 운영되었던 사회이다. 조선 초기에는 '양천제'를 기반으로 하여 천인(노비)을 제외한 양반과 중인, 서민으로 구분된 양인들에게 役과 稅를 부담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양반의 지위가 상승하고 중인이나 서민, 노비는 '常'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루어낸 조선 신분제의 이완ㆍ폐지는, 그들의 특권을 계속 향유하고자 하는 양반과 무겁고 천한 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상민들의 갈등 속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상민층이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경제력이다.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화폐경제 발달이나 잉여생산에 의한 상품경제의 발달은 상민층이 부를 축적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꾀한 상민층, 역에서 벗어나고자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상민층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먼저 조선 초ㆍ중기에 양반과 중인, 서민, 노비들이 어떤 생활을 하였는지 신분을 기준으로 살펴보고, 이들의 의식 및 사회환경이 급변하여 신분상승욕구가 강렬했던 조선후기를 집중적으로 각각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조선시대 신분제의 특징
1. 조선 초ㆍ중기의 신분제
조선왕조의 신분제는 신분직역제로 함축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남자는 원칙적으로 신분적 지위에 맞는 직역이 각 개인에게 주어지고, 이에 따른 권리ㆍ의무상의 차등이 법제 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개인의 신분적 지위는 직역의 여하에 따라 파악할 수 있었다. 직역은 신분을 판정하는 유력한 수단의 하나이기 때문에 장적에 기재된 직역을 통해서 조선의 신분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양인과 천인으로 신분이 구분되어서 양인은 역과 세를 부담하고 천인은 이것들을 부담하지 않았다. 양인이 역과 세를 부담하는 대신 그들은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천인은 관직진출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1) 양반(재지사족)
양반, 효율적인 토지경영을 위해 거주지 중심으로 모여 재지지주(재지사족)라 불리게 된 이들은, 해당 지역의 향안에 등재하여 재지사족으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음으로써 그들의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향소나 향안 등의 조직과 규약을 통해 그들의 신분적 상하관계와 경제적 지주,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특권을 누리며 사족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신분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신분내혼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즉, 양반끼리 혼인을 함으로써 지배계층에 안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서얼과 중인층
서얼이나 중인층은 양반도 상민에도 속하지 못한 채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중인층은 향안입록에서 배제되거나 회시의 좌차에서 차별을 받거나 향약적 지배기구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서얼 역시 향안입록에서 배제되고 회시의 좌차에서 순수 사족과 변별되었으며, 향교에 입학하더라도 '서재교생'이라 하여 사족과 구별되었다.
3) 상민층
상민층은 장적상에서 양인, 거사, 병인, 군병, 보인, 장인 등 다양한 명칭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능력에 따라 토지를 경작하고 있던 농민들이다. 상민층은 국가의 각종 수취대상이 되었는데, 그들은 토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전세, 양인장정의 인신을 대상으로 하는 군역, 토지소유를 기준으로 하는 요역, 토지ㆍ호구의 복합 기준에다 분정하는 호역으로서의 공물, 환곡 등을 부담하고 있었다.1) 상민들은 과중한 부담을 견디지 못하여 전호ㆍ협호가 되거나 노비의 길을 걷기도 하고, 피역ㆍ유망ㆍ대입 등의 저항형태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4) 노비
노비는 일반적으로 그 소유주가 국가기관이면 공노비, 개인이면 사노비로 구별된다. 공노비는 소속된 관청에 따라 시노비ㆍ관노비ㆍ내노비ㆍ교노비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사노비는 존재형태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공사노비는 국가기관과 상전에 대해 직접 노역에 종사하거나 신공을 바치게 되어 있었다.
공노비 중 내시노비는 정기적인 선상입역과 납공을 교대로 강요당하였으며, 납공노비였기 때문에 거주지에는 제한이 없었다. 이와는 달리 관노비는 지방관아에 역노비는 역참에 교노비는 향교에 각각 입역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들의 거주지는 각각 읍사, 역촌, 향교 등 소속기관 주변이었다.
노비는 양반의 재산으로 인식되어서 양반들은 의도적으로 노비를 양녀와 결혼을 시켜서 노비의 노동력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노비는 사족들의 시중과 수행을 들고, 납공, 집안의 가사노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사족이 소유한 땅에서 농업노동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노비소유자들은 노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노비에게 은혜를 베풀되 상전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는 것(은위병행)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노비가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가법(家法)에 의거하여 사형(私刑)을 가함으로써 직접 통제하였다.2) 물론 극단적인 사형에 대해서는 국가의 제약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살해를 포함한 강력한 통제가 사형(私刑)의 형식으로 행해질 수 있었다.
2. 조선 중ㆍ후반의 사회ㆍ제도적 변화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신분제를 변화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양반이 군역 면역층으로 전환되고, 공동납체제ㆍ班常制 등이 인정되어 신분제는 양반에게만 유용한 제도가 되어버렸다.
조선 초기 이래로 군역은 양인층의 권리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원래는 역의 의무가 없었던 천인층을 포함시켜 군역을 편성하고, 훈련도감을 설치하는 등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군역과 군제의 이러한 변화는 군역의 대상층으로 간주되던 양반층의 면역 가능성을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즉,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양반층은 면역층으로서의 지위를 국가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살아서는 유학(幼學)을, 죽어서는 학생(學生)이란 직역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3) 이런 국역 편성과 관련하여 '有役者 = 良人', '免役者 = 賤人'으로 전체 인민을 구분하던 조선 초기의 良賤制的 신분구조는 '兩班 = 免役者', '常民 = 有役者'로 구분하는 班常制的 신분구조로 전환하게 되었다.4)
특히 임진왜란 때에 국가에 노력을 다했던 양반과 국가에 적대의식을 드러낸 상민은, 임진왜란 이후 각각 그에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양반층은 사회를 주도하는 특권층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고 상민층은 사족지배구조가 정착되면서 常漢(상놈)이란 호칭으로 고정되기에 이르렀다. 전후복구사업이 완료되어간 17세기 전반 이후엔 이들이 양반층과 상민층으로 구분되었다.
양반층은 면역층으로서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양역변통을 반대하였다. 국가에서는 당시의 양역폐단이 극에 달해 사회가 혼란하여 여러번 시정하려 하였으나 매번 양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즉, 양반층은 양역세5)라는 신분세와 면역이라는 그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양역변통의 문제가 계속되자 영조 26년에는 균역법을 실시함으로서 양인층의 과세부담을 줄이고 양역세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양반층은 면역과 양역세를 고집한 대가로 이정법이나 노비종모법, 공사역 균일화를 양보해야했다. '이정법'은 국가가 직접 개입하여 징수하는 방식이 아닌 면과 리를 단위로 한 공동징수방식으로써 공동납체제가 확립시켰다. 공동납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국가의 직접 개입이 미치지 않게 되어, 국가의 적극적인 지배가 어려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비종모법'의 실시로는 '一賤則賤'의 원칙에 의해 생산되던 노비는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노비의 신공과 양인의 양역을 布 1필로 규정한 '공사역의 균일화'를 통해서 노비와 양인 사이의 신분적 경계가 사라지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양반과 중인층, 서민(상민층)의 사회ㆍ제도적 변화와 노비에 대한 제도적 변화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양반인구의 증가
(1) 양반이란?
"양반"이란 원래 문ㆍ무관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선 초에는 그 계급에 있어서 문ㆍ무관으로 복무하거나 복무했던 사람과 그 가족들, 과거합격자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로 형성된 계층이었다.6)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반이란 개념은 그 가족의 수대에 걸치는 후손들까지로 확대되었다. 또한 16세기 말에는 관직이나 과거를 불문하고 독서하는 모든 사람들을 양반이라 일컫게 되었다.
(2) 양반인구의 증가
양반인구는 조선후대로 올수록 점차 증가하고 있다. 양반인구가 증가한 요인에는 "양반"이란 개념자체가 확대된 까닭도 있으나, 유학(幼學)이 급증한 이유가 크다. 숙종 4년(1678년)부터 정조 10년(1786년)까지 단성지역에서 "유학"의 직역을 퍼센트로 살펴보면 숙종 4년에 41.5%, 숙종 43년에는 78.4%, 영조 35년에 87.7%, 정조 10년에 94.5%이다.7) 즉, 유학이 조선 후대로 갈수록 점차 증가하고 있어서 유학이 양반층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양반층의 급증이 유학의 급증에 따른 것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유학"의 직역 숫자가 갑자기 증가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① 양반의 유학 재생산
18ㆍ19세기에는 사족(士族)의 자손이 출생할 경우 "유학"이외에는 달리 사용할 직역이 없었다. 또한 유학은 양반들의 중요한 직역으로써 조선 말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에 따라 사족층들은 유학을 재생산하고 있었다. 물론 유학의 증가현상이 전적으로 양반의 유학 재생산에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유학 급증현상의 한 요인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② '충의위(忠義衛)'에서 '유학'으로 직역이동
정훈공신 후손의 충의위는 9대까지 면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훈공신 후손들이 충의위에서 유학으로 직역을 이동시켜 유학을 재생산함으로써 유학의 수적 증가를 초래했다. 한 예로 흥안군의 5세손 李賀生의 가계에서 흥안군의 7세손 3명은 모두 충의위였다. 그러나 8세손은 8명 가운데 通德郞이 3명, 충의위가 1명, 유학이 4명이었으며, 9세손은 11명 모두 유학이었다.8)
③ 중인층(中人層)의 '유학' 호칭
- 서얼 후손의 '유학'호칭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서얼의 통청운동으로 17세기 말에는 서얼의 문ㆍ무를 업유ㆍ업무라 칭하게 되었다. 18세기로 접어들면서는 서얼의 후손이 왕명에 의하여 '유학'호칭이 합법화되었다. 숙종 34년 傳敎에는 "자신이 서얼인 자만 업유ㆍ업무라 칭하고 업유ㆍ업무의 아들이나 손자는 유학으로 기록하여도 무방하겠다"고 하였다.9) 이것으로 18세기 전반부터는 친서얼이 아닌 서얼의 후손은 유학의 호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들이 유학을 재생산함으로써 유학의 수적 증가를 초래했다.
- 吏族의 儒業者들의 유학 호칭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얼뿐 아니라 유업자들도 유학호칭이 가능하게 되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향리자손들의 유학의 칭호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영조 5년과 영조 26년에 각각 유학의 칭호를 허용하였다. 이로써 안동의 鄕孫儒業者는 유학을 호칭하였다.10)
- 액내교생과 기술직 중인의 유학 호칭
향교의 서재유생인 교생은 신분적으로는 중인으로 처신하였지만 장적에서는 '유학'으로 기재하였다.11) 또한 기술직 중인은 철종 2년에 일어난 기술직 중인의 통청운동자료에서 그들 스스로 '유학'을 칭하고 있다.12) 적지 않은 이들의 수는 유학의 수적 증가에 기여하였다.
④ 하층민의 모칭유학
18세기 중반부터 균역법이 시행되어 군포부담이 상민층에만 한정되어, 양반층과 중인층은 합법적인 면역층이 되었고 상민층은 '천한역'으로 인식되어버린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상민층에게 부과된 군포는 천한역으로 인신된데 그치지 않고, 균역법의 폐단으로 그 의도에서 벗어나 민에게 오히려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에 따라 하층민들은 이 천한 군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역을 피하기 시작했고 피역의 최선의 방법은 신분을 변동시키는 것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유역 하층민은 籍吏와 결탁하여 장적상에서 직역을 유학으로 이동시키고 군역에서 탈피하였다. 이런 "모칭유학"은 군사대장이 빌 정도로 수적으로 확대되어갔다.
(3) 면역인구의 증가
조선 전기에는 양반층도 군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양반층은 군역편제에서 빠지고 상민층에만 편중되었다. 이에 따라 역의 의무는 반상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서 군역은 상민만이 담당하는 良役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을 지지 않는 것은 양반뿐 아니라 중인층도 일시적인 면역 또는 헐역으로 역을 거의 지지 않고 있었다. 중인층의 한유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과분'하거나 '상당'하다는 기사까지 있었으나, 18세기 중엽 균역법 시행 이후부터는 중인층의 직역자까지도 사실상 군역에서 면제되는 존재로 합법화되었다. 즉, 면역층은 양반과 중인층을 포괄하고 있으며, 양반층과 중인층 인구의 증가는 곧 면역 인구의 증가로 볼 수 있다.
유역 하층민 역시 피역을 통해서 역을 면했는데, 유학이나 업유ㆍ충의위ㆍ교생 등으로 모칭을 하거나, 군관이 되거나, 호적에서 빠져나가기도 하였고, 납속정책에 따라 납속품직을 취득하여 역을 면하기도 했다. 이는 경제적인 밑바탕이 되는 부농층의 경우이고 빈농의 경우에는 사천이 됨으로써 피역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면역인구의 증가는 국가재정을 위태롭게 하였고, 국가로 하여금 새로운 군역 조달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였다. 때문에 대원군때는 양반층에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이 시행되었다.
2) 서얼인구의 증가
(1) 서얼이란?
조선시대의 서얼은 보통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들을 의미하였지만 그 이외에도 사족인 아버지와 사족이 아닌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자와 그 자손 모두를 통칭하는 넓은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13) 때문에 서얼은 부계와 모계의 신분등급이나 직역에 따라 양반에 해당하기도 하고 중인ㆍ서리와 평민, 혹은 천인신분인 자도 있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전기에 걸친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가족의 이산으로 많은 사족가문에서는 본처가 있는데도 처를 얻어 중혼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때 본처와 후처가 모두 사족인 경우는 어느 한쪽이 서얼이 되었는데 후처의 자손이 적통을 계승하고 선처(先妻)의 자손은 서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2) 서얼인구의 증가
서얼의 개념 속에는 양반의 첩자녀와 그 자손은 물론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 쪽에서 한 가닥이라도 양반이 아닌 혈통에 연결되어 있다면 이도 서얼에 포함시켰다.14) 그러므로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수가 점점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18세기 말에는 전 인구수의 반을 서얼이 차지할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첩을 두는 것을 당연시하였는데, 정실은 남편 사후에 대개 수절하였으나 첩은 거듭 개가하여 많은 자손을 남기게 되었다. 이는 서얼인구 증가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모계 쪽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양반신분이 아니라면 서얼자손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3) 중인의 성장
중인은 17세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조선말기까지 잡과를 일부 명문씨족에 편중시켜 문벌을 형성시켜갔고 세습하여갔다. 또한 중인 안에서 신분내의 결혼을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분을 더욱 공고히 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신유사옥이 일어나기 전까지 천주교의 지도층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진산사건 이후 10년간 지도층의 38명을 차지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중인에 속하는 경아전은 권세가의 겸인(겸人)으로 들어가 그 세력으로 중앙관서의 서리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16세기 후반에 와서 중앙관서의 실무를 장악하고, 관청에 근무하면서 서리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부정한 수단으로 부를 축적해 나갔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상공업의 발달이 생산력의 증대로 이어지면서 발생하는 잉여생산을 경아전들이 통치구조가 이완된 틈을 타서 중간에서 흡수하여 부를 증대시킨 것이다.
게다가 지배계급과의 분배 공생구조가 이루어지면서 그들의 부증식에는 걸림돌이 없었다. 지배관료들은 조세를 통해 할당받는 것보다 중인들을 통해 확보할 수 있는 부의 양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부정행위를 눈감아 준 것이다. 이처럼 쉽게 이루어진 경아전들의 부는 재생산을 위한 재투자적성격보다는 소비적이고 유흥적인 성격을 띠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문학과 음악, 그림 등 그들만의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중인들 중 의관은 경기도 지역의 수령으로 많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자연재해와 병자호란 등으로 의관의 필요성이 증대한 17세기에 더욱 많이 이루어졌다. <방목>이나 <선생안>, 경기도 <수령안> 등을 보면 의관수령이 경기도에 62명이 134자리를 차지하여 약 70% 이상이 경기도에 배치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의료기관의 직제가 축소되고 의관임용의 길이 어려워지면서 그들은 지위향상보다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인삼이나 녹용 등의 약제 가격을 많이 받아 폭리를 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이들의 이러한 축적된 부는 후에 중인통청운동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4) 서민의 경제적 성장
조선초기에는 양천제로 사회신분을 구분하였으나 이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하여 반상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상(裳)'에 속하는 서민층은 국가에 대해 세(稅)와 역(役)의 부담(조ㆍ용ㆍ조)을 졌다. 그러나 양역을 부담하는 중심계층인 서민층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서민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을 계기로 농ㆍ공ㆍ상업과 같은 경제분야에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또한 조정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납속정책과 군공정책을 폈다. 부를 축적한 서민층은 그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할 수 있게되었다. 서민층의 성장은 후기에 편찬된 법전에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법제가 <경국대전>때보다 늘어났다는 것을 근거로 들 수 있겠다.
(1) 농민의 경제적 성장
조선시대 국가와 서민의 주요 경제적 기반은 농업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농토가 황폐해지자 국가는 경작지 확보를 위해 농지개간과 농업기술의 개량을 추진하였다. 농지개간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에서는 이에 신분적 제한을 두지 않았고 일정기간동안은 개간자의 소유지로 인정하는 법적 조치를 취했다. 이에 서민층에서는 경제력이 있는 상인ㆍ부호 등이 서민지주로 성장하여갔다. 그러나 농민층이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된 원인에는 토지확보에 못지 않게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하 생산력 증대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생산력 증대에 영향을 미친 농업기술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① 이앙법 : 이앙법은 제초작업 등의 노동에 있어서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고 불량한 묘를 선별할 수 있으며, 이모작을 시행할 수도 있게 하였다. 수리사업이 이루어진 다음부터는 이앙법이 18세기 말에 전국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노동력 절감은 물론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아졌으며 稻麥二毛作이 가능하게 되어 전반적으로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② 견종법 : 기존에는 밭이랑에 파종하는 壟種法이었으나 후기에는 밭고랑에 파종하는 견종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견종법은 노동력이 절약되고 시비가 잘되고 통풍이 잘되며 소출이 많아지는 장점이 있다.15)
③ 윤작농법 : 윤작농법이 보급되어서 '一年再種'과 '二年三作'의 방식이 토착화 되어감으로써 토지생산력이 증대되었다.
④ 추비법 : 시비법의 변화도 농업생산력을 증대 시켰다. 기존의 파종전이나 파종 때에 거름을 주는 '基肥法'에서, 18세기에는 파종 후에 거름을 주는 '追肥法'이 사용되면서 비료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작물에 맞는 시비법이 고안되었다.
⑤ 채소 중심의 상업적 농업 :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집중으로 주변 농촌에서는 채소를 주로 재배하게 되었다. 이때의 새로운 경제작물로는 면화, 삼베, 모시, 담배, 마늘, 채소, 인삼 등이 보급되었고, 감자나 고구마, 고추, 호박, 토마토 등의 외래작물이 확산되어 농산물의 상품생산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상업적 농업을 가능하게 하였다.
⑥ 농기구의 다양화 : 농기구가 용도에 따라 분화되고 종류가 다양해져서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발달된 농업기술은 노동력을 절감시켜서 17~18세기에는 광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광작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농민들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부농층으로 성장하게 되는 이들은 농업생산물을 상품화하고 시장과 상품유통을 활성화시켜 계속 부를 축적해나가게 된다.
(2) 공장의 경제적 성장
조선시대의 공업은 관장제 수공업 체제로 운영되었다. 때문에 관이나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은 양역으로 동원된 장인이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장인은 중앙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경공장과 지방관청에 속해 있는 외공장으로 구분되었다. 공장은 장적에 등록되어 일정기간 동안 부역해야 했는데 부역일 이외의 시간에는 사적 생산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고 화폐의 유통, 상품경제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공인(貢人)등의 상공업자를 통해 정부가 물품을 조달하였다. 따라서 관공장에서 물품제조를 위한 시설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고 관영수공업은 점차 해체되어갔다. 시장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장인들은 관청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고 국가가 재정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이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지 못했다. 그러자 점차 관장들이 관영수공업에서 이탈하여 사장화(私匠化)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관영수공업의 쇠퇴로 관에 예속되어 있던 공장들이 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수공업자로 전환하면서 사장(私匠)이 크게 증대되어 이들에 의해 전문적으로 생산이 이루어졌다.
또한 현물로 공납하던 많은 관수품을 공인이 구입하여 납품하도록 함으로써 공인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생산비를 먼저 대주는 방식으로 그들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16) 이와같은 선대제 수공업조직은 사업자본을 생산에 투입시킴으로써 수공업 생산의 규모를 확장시켰다. 장인도 이에 부흥하여 사적 제조가 확대되었고 판매도 증가하여 민간수공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서 전업적 생산에 의해 생산장의 규모가 커지게 된자 18세기 후반에는 미약하나마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17)
조선 후기 수공업은 관장제의 붕괴에 이은 사장의 출현으로 관청수공업이 민영화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장들은 전업적 생산을 하고, 사적 생산장을 운영하였으며 원료를 독점 판매하는 등 경제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 상인의 경제적 성장
조선시대에는 상업을 말업 또는 천업이라 하여 천하게 여겼다.18) 그러나 상업계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인 17세기 후반부터 농작물과 수공업품의 생산량 증가와 상품경제, 화페경제가 발달하자 유통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전하여 대도시에 한정되었던 상설시장이 지방 중소도시로 확대되었고, 농촌에서도 정기적인 장시의 수가 증가하여 규모도 커지고 점차 상설화 되어갔다.19)
이와 같이 장시가 발달하자 상업활동을 하는 상인의 수도 증가하였고 활동범위 또한 확대되었다. 특히 공인, 사상, 객주, 여각 등의 새로운 상인층이 대두하면서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 공인 : 대동법 시행으로 각종 공물을 쌀로 대납하게 되었다. 공인은 국가로부터 貢價를 지급 받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조달하면서 성장했다. 이들의 물품구매 활동은 서울을 비롯한 지방 장시까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상품유통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인들은 금난전권을 행사하거나 선대제적 수공업장을 경영하기도 하여 점차 특권적 상인으로 성장하였다.
- 사상(私商) :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어 상업인구가 증가하면서 사상들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7세기 이후 서울의 서대문과 남대문 밖에 시장이 서게되자 시전상인들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한때 시전상인들이 그들의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금난전권을 얻어 전매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점차 상업의 자유가 신장되어 종국에는 육의전 이외의 품목은 자유판매가 허용되었다. 이들 사상들 중에는 인삼을 상품화하여 이익을 취한 개성상인(송상), 조선업과 도고상업으로 그들의 자본규모를 확대시켜간 경강상인(강상), 송도나 평양과 같은 대도시 지역의 미곡상인, 목재매매를 통해 부상으로 성장한 목재 사상 등이 있다.
- 객주와 여각주인 : 이들은 상품매매의 중개와 관련된 숙박, 운송, 보관, 금융업 등을 수행한 사람들로서 상품유통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다.
5) 노비정책의 전환
노비는 국가기관이나 개인에 예속되어 노동력을 강제로 징발 당하고 있었는데, 조서 후기에 이르면서 점차 노동력 제공의무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솔거ㆍ앙역(사노비)나 선상ㆍ입역(공노비)의 경우에는 노동력을 직접 수탈 당하는 노비이며, 외거노비나 국가기관의 토지를 경작하여 신분ㆍ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노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대에 이르면서 노비가운데에서도 상속이나 매득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취득하는 노비가 적지 않게 되었다. 이는 노비제 변동에 중요한 변수이다. 신분적 예속관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예속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일부의 노비들은 이런 것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노비들은 대체로 가족단위로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구성이나 경제기반을 해치지 않고 노비소유를 재편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조선 후대에는 외거하면서 상전이나 소속관사의 경제기반과 관계없이 생활해 가면서 신공만을 납부하는 노비가 늘어났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만 예속되어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발전된 경우엔 국가에서 납속책을 시행하여 이들이 신분적 예속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1) 선상ㆍ입역의 폐지와 고립제의 실시
고립제로 공노비 노동력 동원이 바뀌게 된 데는 노비들이 고역이 선상ㆍ입역을 기피하게 된 데 있다. 선상ㆍ입역은 임진왜란 후에 많은 노비들의 도망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17세기엔 사실상 폐지되었고, 노비의 주인이 노비의 역을 대신할 사람(노비)을 고용하여 대역시켰다. 결국 공노비의 노동력 동원이 고용노동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비신분이긴 하지만 선상ㆍ입역하는 노비와는 달리 달마다 급료를 받고 입역하는 자들이어서 선상ㆍ입역노비와는 성격이 다르다.20)
두번째로 고립제로 바뀌게 된 이유로는 노비도 가족이 있는데 가족의 중심이 되는 자를 6개월이나 선상ㆍ입역시키는 것은 노비가족의 생계유지를 어렵게 하여 국가가 노비 노동력을 제대로 동원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비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노동력을 징발당하여 가족의 생활이 파괴되는 것보다는 자신의 경리를 계속 유지하면서 많은 잉여물을 축적하고 그 중의 일부를 선상ㆍ입역이나 앙역ㆍ솔거의 대가로 지불하는 것(신공)이 유리했다. 그리고 국가 입장에서는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상공업의 발전으로 토지에서 유리되어 도시로 이동한 많은 농민들에게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는 것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필요하였다. 즉, 노비노동이 고용노동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2) 신공의 감액
공노비의 선상ㆍ입역이 폐지됨에 따라 이들은 신공납부의 의무만을 지는 '납공노비'로 바뀌었다. 납공노비의 부담은 원래 1년에 노(奴)는 면포 2필, 비(婢)는 1필 반을 바치도록 되어있었으나 헌종과 영조를 거쳐 노만이 1필의 신공을 바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이와 같은 신공 감액조처는 공노비뿐 아니라 사노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노비의 신공을 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비의 부담이 과중하여 노비들이 도망하거나 모피하는 현상이 만연하자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어 이를 막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노비신공의 감액으로 노비를 소유하고 있던 관청에서는 수입이 줄어들었다. 국가에서는 국가의 다른 재원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는데 이것은 노비신공의 일부가 일반조세로 전가된 셈이다.21) 그러나 감공에 다른 급대량의 증가로 국가의 부담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다.
(3) 추쇄정책의 전환
조선 후기에 들어 노비의 도망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에서 여러번 언급하였다. 물론 노비들은 그들의 과중한 역으로 인해 도망을 하는 것이겠으나 그들이 도망을 하여서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다면 도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노비들이 도망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노비인구가 격감하자 국가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노력 및 시간을 들여 도망노비의 추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추쇄가 실패한 요인으로서는 추쇄관의 폐지22)와 비총법23)의 실시를 들 수 있다. 두 가지 사항은 노비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이들을 보다 용이하게 노비신분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였다.
(4)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의 실시
서민층의 신분상승으로 양역을 담당할 인구가 부족해지자 국가에서는 노비의 신분적 규제를 완화하여 이들의 일부를 제도적으로 양인화하려는 움직이 나타나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奴良妻所生從母從良法)'을 만들었다. 본래 노비는 종모법으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으나, 노비와 양인이 혼인한 경우에는 '일천즉천(一賤則賤)'의 규정에 따라 노비의 신분이 되었었다. 그러나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으로 인해 노와 양녀가 혼인하여 낳은 자손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양인신분으로 바뀌어 이들에게 양역을 부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노비들은 이 법에 따르면 그의 소생을 간단히 면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영조 이후 노와 양녀사이의 결혼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 법은 본래 양역인구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양역이 아니더라도 특수지역에 입속할 인구가 부족한 경우에는 입속인구의 확보를 위해 이 법의 규정이 변형되어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들의 신분은 양인으로 간주되었다.
Ⅲ. 조선시대 신분제의 변화
1. 양반계층의 분화
조선후기에 신분이 상향조정되면서 양반층은 수적으로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그들 내에서 계층분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관직에의 접근과 가계의 위신이 모두 갖추어 지거나 이 중 하나만을 갖추면 양반신분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24), 조선 후기에는 생산력의 발전이나 상품화폐경제 발달로 경제력의 요소가 양반신분에 추가되었다.
즉, 경제력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양반층으로 신분상승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의 양반들은 이들과의 구분을 위해 점차 분화하기 시작했다. 사족과 향족ㆍ향품의 분화를 가리키는 "유향분기(儒鄕分岐)"는 그 대표현상이다. 17세기 후반부터 유ㆍ향의 분화가 확실해지고, 18세기엔 유향분기가 크게 진행되어 사족과 향족간의 갈등이 드러나 결국 유와 향이 나뉘어지게 되었다.25) 이는 兩界지역과 영남 등 몇몇의 직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국적으로 있었다.
향촌지배층 내부의 이와 같은 분화현상은 그들이 소속했던 향촌지배기구의 차이라든가 그들간의 족적 기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6) '유'는 서원이나 향교를 근거로 결집했던 유림ㆍ유생을 가리키며, '향'은 향소를 근거로 삼는 향품ㆍ향족을 지칭하였던 것이다.27) 그러나 향품에는 부를 축적하여 새로 향품에 소속되는 부민층이 늘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관권과의 결탁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갔다. 또한 수령권을 매개로 사족의 향권지배체제에 도전하고 있었다
향권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구향'과 '신향'이라는 재지양반층의 계층분화가 이루어졌다. 구향은 조선초기 이후 계속 지배계층에 속했던 이들이고, 신향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향임ㆍ이서ㆍ서얼 등으로 구성된 부류이다. 그리고 재지양반층 분화의 또하나의 표현으로 '원유'와 '별유'가 있다. 원유는 토착적 정통사족층, 별유는 신분상승 등으로 지배신분층 하부에 추가된 부류로 각각 파악된다.28) 별유층에는 향임ㆍ서얼유생ㆍ교생(서재유생)ㆍ이족유업자 등과 부민층에서 성장한 향임층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9)
재지양반층의 계층분화를 반영하고 있는 이와같은 분류는 '유', '구향', '원유'는 전통적 사족층을 표현하고, '향', '신향', '별유'는 구성계층이 나뉜다. '향'은 일부는 기존의 사족과 신분상 큰 차이는 없었지만 향임을 계속 맡음으로써 사족과 구분되었던 향임층이고, 다른하나는 수령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 향품에 참여하는 부민층이다. '신향'은 이향, 서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별유'는 향임층과 이서ㆍ서얼ㆍ부민층에서 성장한 부류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 서얼의 신분상 변화
1) 서얼 통청운동
조선 중기 이후 서얼들은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었으며, 서얼금고의 지속으로 많은 인재가 사장되고 있었으므로 집권층에서는 서얼소통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납속허통법을 만들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서얼을 관료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납속허통법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일부 부유한 서얼들뿐이었고 벼슬로 진출하는 자도 극소수였다. 서얼들의 불만과 사회불안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아 이를 다시 개정하였다. 친서얼인 경우에는 업유ㆍ업무를 호칭하도록 하여 일반 상민과 구별을 하고, 업유의 아들이나 손자 때부터는 양반과 같은 호칭인 유학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납속허통법을 개정하여 서얼들이 문무과와 생진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30)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인식은 바뀌지 않아서 서얼차대는 여전하였다. 18세기에는 후궁의 아들이었던 영조가 즉위하면서 그들의 소통운동은 활기를 띠어, 보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소통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 예로 영조 즉위년 12월에 서얼 260여인이 국왕에게 상소한 내용이 <영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19세기에는 그들이 집단적인 승반화를 도모하고 사회경제적인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순조 23년 7월에는 경기ㆍ호서ㆍ호남ㆍ영남ㆍ해서ㆍ관동 등지로부터 서얼유생 金熙鏞 등 약 1만 명이 집단적으로 상소를 올렸다. 또한 이 무렵 전국의 서얼들은 대구 達酉精舍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소통운동을 전개하였다. 집권자들은 서얼들의 벼슬길 확대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일부 사족들도 서얼의 상속상의 지위상승을 인정하였다. 상당수의 가문에서는 적자가 없을경우 전처럼 양자에게 대를 잇도록 하지 않고 친생자인 서얼로 적통을 이어 후계를 삼아 재산상속을 시켰다.
후대로 가면서는 이들의 운동방법도 격렬해져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준법과 왕명준수를 내세워 위법행위자와 격렬하게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철종 10년에 서얼유생들이 발송한 격렬한 내용의 통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친생자가 있음에도 적출이 아니면 양자를 들이는 부모들에 대해서는 각자가 정성을 다하여 간하되 거듭 간하여도 듣지 않거든 울면서 간하고 울면서 간하여도 듣지 않거든 머리를 땅에 부딪쳐서 피 흘리며 간하라고 하였다.
이시기의 서얼금고는 법제상으로 상당히 완화되어 서얼도 淸宦으로 임용될 수 있었고 후사에 있어서도 서얼을 배제하지 않았다. 단지 법과 왕명을 준수하지 않는 사회적 현실에 문제가 있었다. 서얼의 운동방법은 격렬한데 그치지 않고 대범함도 보였다. 고종 14년에 몇몇 서얼이 <大典會通>의 原ㆍ增ㆍ續 중에서 서얼금고에 관한 조항을 일일이 삭제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대간자리에 있던 서얼양반들이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여 법전상의 서얼차대조항을 삭제하여 달라고 한 것이다.31) 결국 이를 받아들어 고종 19년에 법전상의 서얼금고 내지 서얼차대에 과한 조항은 사문화 되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얼들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서얼통청운동'의 결과로 서얼차대에 관한 법제상의 장애가 완전히 제거되었다.
2) 서얼의 신분계층상의 지위변동
고려시대의 서얼차대는 신분질서의 문란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민의 혈통이 섞인 자들의 사족집단 편입을 거부하기 위해서 一賤則賤의 원칙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서얼차대는 여기에 禮無二嫡의 유교적인 원칙이 추가되었다.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 계통이 모두 사족일지라도 한 사람의 처 이외의 자손은 서얼로서 차대를 받았다. 특히 이들은 관직이나 재산상속, 제사, 혼인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다.
- 관직 : 조선시대의 서얼은 양첩 자손이건 천첩 자손이건 간에 문과와 생원ㆍ진사시의 응시자격이 박탈되어 淸顯要의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만약 무과에 급제하거나 음직으로 관료가 되더라도 품계에 한계가 있었다. 또는 기술관이 되거나 중앙과 지방의 잡직을 얻어 사족양반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그 외의 서얼들은 무직상태로서 빈곤과 질병으로 외롭고 괴로운 삶을 살아갔다.
- 재산 및 제사 : 서얼은 가문 내에서 '호부호형'을 할 수 없고 부모의 재산은 주로 적자녀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에 서자는 적자의 1/7~1/10을 상속받는데 불과하였다.32) 또한 법제상으로 적출의 후사가 없을 때는 첩의 아들이 제사를 모시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입양제도가 보편화되어 서자대신 양자를 들여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며 재산역시 서자가 아닌 양자에게 상속되어, 19세기 중엽까지 법규정을 따르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33)
- 혼인 : 서얼들의 혼인은 처음에는 천첩자녀에 한하여 양반과 혼인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그 후 많은 천첩이 신분상승을 이루어 양첩자손과 천첩자손의 구분이 애매하여졌다.34) 결국 대부분의 서얼은 양반과 혼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서얼들은 지속적인 서얼통청운동을 벌였고,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얼들의 벼슬 진출이 활발해졌다. 서얼들이 공경대부의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자 여러 가문에서 서얼들을 '승적'시켜서 후사로 삼았다. 또한 서얼들의 재산상속분도 전보다 늘어서 적사간의 차이가 2:1정도로 좁혀졌다. 물론 적서차대가 여전히 사회의식 속에 남아있어서 서얼들이 벼슬을 하여도 일부 지방에서는 그들의 향안입록이 거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법제상의 지위나 경제상의 실력으로 보아서 적서간의 차별은 거의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중간신분층의 신분상승
1) 중인층의 지위상승
(1) 중인의 통청운동
조선 후기에는 서얼을 비롯한 이서층(경아전), 전문직 중인들의 신분상승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반응은 달라서 서얼의 통청운동과 기술직 중인의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고, 경아전 중심의 위항문학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이는 경아전의 문학운동은 그들의 정책방향과 부합하고 운동의 초점이 지배계층을 가리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얼이나 기술직 중인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이권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기술직 중인들은 서얼의 통청운동이 철종대에 이르러 그 결과물-서얼을 허통하여 벼슬에 채용하도록 하는 것-을 보이자 이에 자극을 받아 통문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연대기에 이들의 상소문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은 제동이 걸렸거나 실패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서얼의 통청운동이 성공한데 반해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35)
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서얼 중에서도 권귀서얼들의 상승운동은 자금ㆍ정치적 배경 등에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통청을 허용한 것이다. 그러나 기술직 중인은 그들만의 특수 신분층을 구성하여 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② 중앙 전문직 중인층 자체내의 무사안일주의 때문에 그들은 체제를 탈피하려는 과격성이 부족했다.
그들은 실무에 대한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으며, 그들의 경제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에서는 양반을 능가하기도 하였다. 결국 중인층은 운동이 실패할 것을 우려해서 자제할 만큼 현실적으로 특권이나 이익을 적지 않게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2) 중인의 신분변동
영ㆍ정조대에는 각종 산성보수 등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 공명첩을 발매하고 富民勸分 논상제도를 실시하였다. 즉,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내게 해서 부족한 재정에 보충하고 대신 그들의 신분을 조정해주는 것이다. 납속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민층으로 여러신분층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핵심계층은 반상의 중간인 중인층이다. 이들은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을 노리고 사회ㆍ경제적으로 지위향상을 갈구해왔다.
납속부민층은 한량ㆍ향품ㆍ한산ㆍ향인ㆍ업무ㆍ업유 등의 중인으로 이들은 처음에 군관직을 얻고 다음에는 유학과 대등한 신분을 얻어 종국에는 직접 유학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자헌ㆍ가선ㆍ통정 등의 품계를 가진 사람들도 납속부민층에 속한다. 이중 한량ㆍ향품과 절충ㆍ가선의 품계를 가진 사람은 전체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은 일차적으로는 자신과 자손의 면역을 받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참여동기이고, 이차적으로는 향반으로 상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납속공명첩이 보장하는 사회적 지위는 발급받은 당사자 1대에 한하고 자손에게는 아무런 보장이 없었다.
2) 향리층의 지위상승과 분화
(1) 향리층의 분화
향리는 본래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양반지배층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분화하였고 다시 양반사회로 복귀하기를 희망하는 계층이었다. 이런 향리층은 양반과 상ㆍ천민의 중간적 존재로서 지방행정의 말단지배층으로 존재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향리는 신분이 고정되어 가면서 아전ㆍ인리ㆍ이서 등으로 불렀다. 또한 행정단위에 따라 지방의 이서들은 영리(감영리ㆍ병영리ㆍ수영리 및 진영리의 이서)ㆍ읍리(부ㆍ목ㆍ군ㆍ현ㆍ도호부)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많은 지방에서는 주도적인 향리집안이 있었는데 이들은 장기적으로 세습성을 유지하면서 고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혈연에 의한 신분귀속을 버리면서 향리의 후손들은 향리직에서 벗어나 유학층내지 새로운 중간층, 평민층으로 분화되어갔다. 그리고 상ㆍ천민의 경우에는 향리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2) 향리층의 신분 상승운동
향리들은 행정적인 실무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가운데 신분지위를 보장받으려 했다. 또한 향촌의 주도권이 구향에서 신향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사회적 지위향상을 꾀하였다. 그들은 남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토지집적, 상업적 농업, 혹은 수령과 결탁하여 부세수취기구에 참여하여 부를 축적시켜 갔다.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ㆍ경제적 성장을 토대로 소극적인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즉, 사적을 편찬하는 사업을 벌이거나 향손들을 배향한 사우를 건립하거나 중건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4. 서민층의 신분상 변화
1) 서민의 신분상승운동
서민은 조선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국가에 대해 세와 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과중한 역의 부담은 서민들로 하여금 군역을 피하고 신분상승을 하도록 유발하였다. 후대에 오면서 부를 축적하게 된 서민들은 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 가능한 방법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꿈꾸었다. 이들이 신분상승의 방법으로는 정부의 제도에 의한 것도 있으며 그들의 부력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아래에서는 이들의 신분상승운동이 이루어진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다.
- 향교에의 冒屬 : 조선 전기에는 서민의 자제가 향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나, 16세기 이후로는 피역의 수단이나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서민이 향교에 입학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심지어 향교의 생도를 '동재생'과 '서재생'으로 구별하여 서재생은 피역하기 위해 향교에 모속한 평민들로 구성하기도 하였다. 서민들은 교생신분을 시작으로 향족이 되었을 경우에는 다시 교임 진출을 꾀할 수도 있었고, 군임이나 향임으로 진출하여 신분상승을 이루기도 하였다.
- 납속제도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재정궁핍과 잦은 재해를 겪게되어 국가에서는 산성의 축조와 보수, 관청의 부족한 재정 등을 보충할 목적으로 납속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의 주 대상은 부민36)과 요호층37)이었다. 그러나 납속에 의해 취득한 관직은 실제의 직과는 차별이 있었고, 이를 통해 바로 양반신분을 획득하는 것도 아니었다. 납속을 통한 면역은 납속자 1대만이 가능했고, 3년이나 10년 정도만 그 효과가 있었다. 때문에 양인 납속자들이 사족이 되기는 불가능하였고 교생이 되거나 군관, 향임ㆍ면임을 통해 중인으로의 신분상승을 기도하였다.
- 호적의 개변 : 납속첩을 소지한 자는 대부분 지방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호적을 담당한 관리와 결탁하여 신분직역의 모록을 통하여 호적상의 신분상승을 꾀하였다.38) 이는 일시적이지도 않았고 몇 대가 지나면 영구히 면역할 수 있으므로 군관직 내지 관작을 모록하던지 유학ㆍ업유를 모칭하여 호적상 신분상승을 꾀하였다.
2) 서민문화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이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되면서 문예활동에 많이 참여하였고 문예의 주제나 소재 역시 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았다. 이는 서민들의 신분상승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문학에서 서민의 활동
조선시대 문학은 사대부 문학을 중심으로 주로 발달하였으나 17세기 이후엔 경아전이 중심이 된 위항문학과 서민이 중심이된 서민문학이 성장하였다. 문학분야에서는 서민들의 생활과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판소리나 국문소설, 가면극 민요 등을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 판소리 : 판소리는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이때는 서민들이 성장하고 있던 시기로서 시기적으로도 서민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판소리에는 서민들의 신분상승 의식이 표출되어 있다. 이는 판소리의 작품속에서 살펴 볼 수 있는데 주인공들은 모두 작품속에서 신분상승의 욕구를 실현하고 있다. 춘향이가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나 심청이가 황후가 되는 것, 토끼가 벼슬을 바라고 자라를 따라가는 것 등 판소리에서는 주인공들이 신분상승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는 서민들의 사회비판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토끼전>에서는 지배층의 무능과 모순된 정치현실을 풍자하고 있으며, <흥부전>에서는 빈부격차의 심화현상이나 신분제의 동요, 상품화경제의 발달, 지배층의 부패 등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 국문소설 : 17~18세기에는 많은 국문소설이 읽혀졌는데 소설의 작자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국문소설은 이를 판각해서 찍어내는 것이 가능해짐으로써 시장망을 통해 전국적으로 널리 팔려 서민들에게 읽혔다.
- 가면극(탈춤) : 탈춤은 상업이 발달된 도시를 중심으로 상인층의 지원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주로 장시에서 공연되었다. 탈춤은 특히 교통상 요지인 곳의 상업도시에서 주로 번성하였다. 탈춤은 양반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하였으며 서민들의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 민요 : 민요는 노래이므로 가락은 음악에 속하지만 노래의 가사는 문학에 속한다. 민요는 만인의 노래라 불릴 정도로 서민층에서 널리 불러졌는데, 가장 많은 것은 노동요이며 다음으로는 부요(婦謠)이다. 이들은 각각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서민들의 생활과 가사노동에 힘겨워하는 서민 아낙들의 생활을 반영한 것이다.
(2) 미술에서 서민의 활동
숙종대 후반에 해당하는 1700년 무렵을 전후해서 미술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서민들과 관련된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했다는 점은 사대부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회화를 이제 서민들도 향유할 수 있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풍속화 : 풍속화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기간동안 가장 융성했다. 풍속화는 김홍도와 김득신의 활약으로 화풍이 정립되었으며 신윤복에 와서는 주제나 화풍에서 더욱 발전을 이루었다. 김홍도는 대부분 농민이나 수공업자와 같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소재로 삼았으며, 신윤복은 서민사회의 모습을 소재로 하면서 그들의 감정표현을 좀더 자유롭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19세기 중반이후에는 전처럼 필요에 의해 그림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나와 있는 그림을 구입하는 상품생산적 성격을 띠었다.
- 민화 : 민화는 정통회화를 구하기 어려운 서민대중들의 회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민화는 주제와 표현기법 등은 정통회화를 많이 참조하면서 인물화ㆍ풍속화ㆍ산수화ㆍ영모화ㆍ화조화ㆍ문자화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민화는 서민출신의 화가들이 서민을 위해 그린 것이었기 때문에 정통회화보다는 표현방법이 보다 자유롭고 소재에 있어서도 자연에서 쉽게 볼 수 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림의 내용이 수백을 넘고 종류도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다양하다.39)
5. 노비층의 신분상 변화
1) 노비의 신분상승운동
노비신분층 역시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은 합법적인 방법과 비합법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신분을 상승시켜갔다.
(1) 합법적인 신분상승 운동
① 납속책
국가에서는 재정난의 타개를 위해서 납속책을 실시했다. 때문에 노비신분층을 납속책의 대상에서 제외할 필요는 없었다. 재력이 있는 노비는 누구나 납속면천에 의해 신분상승을 도모할 수 있었다. 영조때에는 납속면천과 아울러 납전면천(納錢免賤)까지 실시하였다. 납속속량가가 현실화되면서는 많은 노비들이 면천ㆍ속량되어 양인으로 상승하는 것이 쉬워졌다. 이로써 부유한 노비는 거의 다 면천되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노비만이 남게 되었다.
② 군공면천(軍功免賤)
원래 양역이었던 군역에 공사천을 입속시키면서 군역의 의무가 없는 이들의 입속을 권장하기 위해 군공면천이 실시되었다.40) 군공면천은 적의 목을 베거나 역적을 포획ㆍ참수하거나 반란을 진압하는 등의 군공을 세우는 경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면천ㆍ면역 등의 포상이 내려졌다. 또한 국가가 위급할 때 대비하기 위해 공사천들에게 무술연마를 권장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면천을 하였다.
③ 공로면천(功勞免賤)
조선왕조는 유교정치를 표방하였으므로 인륜을 중요시하여 충효 등의 덕행을 실천한 자에게는 그가 노비라 하더라도 특별한 은전을 베풀고 포상을 하였다. 그 예로서 도적을 잡거나 대화재가 났을 때 인명을 구한 노비들이 면천되었다.
④ 대구속신(代口贖身)
부유한 노비들은 자기 대신 다른 노비를 매입하여 충당하고 자신은 면천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대구속신'이라 한다. 대구속신의 제도는 신분제도가 동요하는 가운데 국가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41)
(2) 비합법적인 신분상승 운동
① 도망
노비는 도망하여 유민들이 새로 거주하는 곳에서 호적에 새로 등재할 때 신분을 숨김으로써 쉽게 소속관사나 상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도망하여서 신분을 모칭한 것이다. 도망노비는 특히 상전의 지배력이 약한 외거노비와 교통이 편리한 강변읍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노비들은 섬이나 서북지방의 변방, 국가에서 국방상의 요충지에 인구의 유입을 늘리기 위해 추노를 금지한 곳 등으로 많이 도망갔다.
섬은 어장이 설치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추노를 금지했으며, 서북지방은 추노가 금지된 지역인데다 교통의 요지여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없어서 가능했을 것이다.42) 그 외에는 추쇄가 곤란한 깊은 산 속이나 중이 되는 자도 있었다. 노비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고용노동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거나, 장시에서 상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② 신분모칭
노비들은 도망하거나 유리하여 신분을 감추고 양인신분을 모칭하였다. 도망노비들은 남의 족보에 모록하여 신분을 속이기도 했으며, 감영에 姓을 갖추어 양인을 칭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는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이 실시된 이후에 출생한 것처럼 속이는 방법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들 도망노비의 후손들은 양인을 모칭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학이나 종반, 훈족 등 양반의 후예임을 모칭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43)
(3) 노비 신분층의 반항
노비 신분층은 그들의 상전이나 지배층에 항거하여 신분상승을 도모하였는데, 단순히 신공납부의 기피나 도망에 그치지 않고 상전이나 상전의 가족을 살해하는 일까지도 흔히 일어나고 있었다.44) 또는 도망하여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거나 반란에 가담하여 지배체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자들도 있었다.
2) 내시노비의 혁파
노비신분층의 동요는 정조대 이후에 더욱 심화되어 갔고 노비의 감축이 극심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는 신역의 과중보다는 노비들의 자각이 촉진되어 '역중명천'한 노비라는 신분 자체를 싫어하여 노비신분에서 벗어나려 한데 그 이유가 있었다. 노비가 급격히 감소할수록 비총법에 의해 남아있는 노비들의 고통(族徵, 隣徵, 白骨徵布, 黃口侵徵)은 계속 증가되어 갔다.
가난한 노비들이 자신의 신포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른 노비의 몫까지 부담이 지워지자 결국 이들도 유리하여 노비는 날로 감축되어 갔다. 이런 현상이 점차 확대되자 노비신공으로 재정을 이끌어가던 관서에서는 재정부족이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노비의 도망이나 사망은 날로 늘어가나 출생은 전혀 보고되지 않아 신공의 수납량이 해마다 줄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 후반에 이르러서는 노비제페지론까지 대두하게 되었다. 양역과 노비신공이 모두 1필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구태여 노비라는 명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없었으며, 차라리 노비를 양인으로 풀어줌으로써 명천에서 오는 도망을 방지하고 은루노비의 출현을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국가의 재정부족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노론의 '내시노비혁파론'과 남인의 '내시노비혁파 반대론'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정조가 죽고 노론 벽파 일색으로 정부가 구성되자 순조 원년에 곧바로 내시노비를 혁파하여 이들의 신분을 양인으로 상승시켰다.
한편 내시노비를 제외한 역노비와 지방의 기관에 소속되어 있던 노비는 공노비혁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신공만을 납부하던 내시노비와 달리 입역으로 그들의 임무를 이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종 23에 이들도 사노비와 함께 신분세습제가 폐지되어 자기 한 몸에 한하여 사역되다가, 고종 31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신분제도가 폐지되어 제도상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45)
공노비에 대한 정책은 사노비에게까지 적용되었던 까닭으로 내시노비혁파는 언젠가는 노비제 자체의 폐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Ⅳ. 맺는말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양반과 상민들의 차별대우는 조선 후대에 올수록 극심해졌다. 이에 역이 천하여 신분상승을 꿈꾸든, 역이 과중하여 신분상승을 꿈꾸든 간에 많은 중인, 서민, 노비들이 통청운동을 벌여 현재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소위 부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보다 높은 신분으로 이동했으며, 양반도 너무 가난하면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전호 등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의 상민들은 위에서 언급한 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더 높은 신분을 획득했다. 그러나 조정이나 지방관아의 가혹한 수탈로 부를 축적하지 못한 적지 않은 수의 상민층은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여 후에 민란의 중심세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