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兵抗爭史 ■ 32. 舊韓末 軍事力 [1] 대한제국군 구성 *친위대[수도 방위군] : 2개 연대 5~6개 대대 *시위대[근위대] : 2개 보병연대 4개 대대 +근위 기병대대. 군악대 + 왕궁 호위대 *진위대[지방 주둔군] :6개 연대 18개 대대 *총 병력수 : 25,000~30,000명 [각 연대 정원:약 1,000명. *야포, 기관총의 양과 질은 일군에 앞서 영국, 독일군 등 유럽 열강과 동등 수준. [2] 일본의 방해 *러. 일전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한반도 침탈을 가속화. -친위대 - 폐지 -시위대 -2개 보병연대를 1개 보병연대로 개편. -포병대대/기병대대를 중대규모로 축소하고 [시위 여단]으로 축소. *결과적으로 병력을 1/3 수준으로 대폭 감소시켜 전술 단위가 축소. [3] 군대 해산 *대한제국군을 축소했지만 존속시킨 이유는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할 수준으로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각 지역 치안 유지와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최소한의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 *앞서 언급된 [崔益鉉]義兵將과 같은 사례에서 보듯 74세의 고령인 의병장 [崔益鉉]은 진위대와 대치하자 [저들은 황제 폐하의 군대다. 같은 민족끼리 싸울 수 없다]며 전투를 회피, 포로가 되어 대마도로 유배당한 것임. *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대한제국 장병의 상당 수가 일본이 나라를 삼키려 하는데 의병 토벌에나 끌려다니는 현실에 불만을 가졌고 마침내 高宗이 조칙을 내려 시위대로 하여금 왕궁에 진입해 정권을 되찾아오려는 계획을 세움. * 이런 사실을 군부대신[이병무]이 누설, 일본군은 경운궁을 봉쇄, 시위대 본영을 포위함. * 당시 대한제국군과 일본군과의 비율은 2:1로 우세했으나 군 수뇌부의 대다수가 친일파. *두 세력 간의 알력이 상충하자 대한제국군이 부담스러운 위험요소가 되자 *일본은 외교권, 경찰권 등 대한제국 정부의 주권을 빼앗으며 군 해산 계획을 세움. *군의 해산 구실은 재정 궁핍을 이유로 [傭兵主義]를 폐지하고 [徵兵法]을 시행한다며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를 해산. -작전에 필요한 조직 및 사관학교를 전면 폐지, -육군 1개 대대만 존치, 황궁 경호에 임하고 기타는 해산. -군부를 비롯하여 육군과 관계되는 기관은 해산.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로서 대한제국에 필요한 자를 제외하고 일본군에 복속시킨다. -해산한 하사 및 병사 중 경찰관 유자격자는 경찰관 채용하고 기타는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사케 하거나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한다. 參考文軒: 壬辰倭亂史.義兵運動史. 2作戰司精神敎育敎材 等
東 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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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한말 정규군의 참담한 감쇄 과정을 잘 알게되었읍니다.역시 상층부의 정신무장이 비굴하게 병들었으니 ~~
아 통재라 !
구한말 군사력이 무척 미약할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였다는 데에 놀랐습니다.
대원군 쇄국정책을 펴던 시기만 해도 조선군은 강군이었다.
병인양요 때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격퇴하였고,
신미양요 때는 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긴 했는데 조선군이 너무 악착같이 싸워 결국 미군은 한양 진격 포기했다 카데.
그라고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비 외척이 득세하여 군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개판 5분 전 됨.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개혁을 시작, 군사력 비약적 향상되었다.
군사학교 설립, 장교 양성,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증액시켜 야포, 기관총 등 현대무기를
도입하여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였으나 동학농민군 학살에 사용되었다,
乙未事變 [閔妃弑害] 때 일본에 포섭된 훈련대와 왕궁을 지키던 시위대가 同族相殘하였는데.......
참고적으로 말하면 명성황후 영화에 일본 무사들이 포졸을 학살하고 왕궁 진입 장면 나오는데
실은 대한제국 정예군끼리 충돌하는 가슴 아픈 역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