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한잔하게요.”
요즘도 이따금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가하면서도 바쁘고 단조로운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내 일과가 끝나고 저녁 무렵 조촐한 술상을 마주할 때 그의 목소리가 생각나곤 한다. 요즘은 주로 혼자 작업하고 혼자서 술을 마실 때가 많아서 더욱 그럴 게다. 그의 나이는 36세, 키는 192㎝, 2019년 3월 현재 몸무게 135㎏. 한국인치고는 대단한 거구가 아닐 수 없다. 최중량급 씨름 선수를 방불케 하는 그는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거의 비슷한 체구에다 체중만 한 25㎏ 더 나간다고 보면 된다. 나이로 치면 거의 자식뻘이고 몸무게는 얼추 내 두 배 가까이 되지만, 그는 이제 가끔 만나는 정다운 술벗이자, 2박 3일 일정으로 1년에 두세 번 정도 다녀오곤 하는 국내 여행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 3월이었다. 내가 퇴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전문계고등학교에 식품과학과 서양 조리 담당 기간제 교사로 들어온 그는 정해진 순서처럼 당연히 학교폭력 업무를 맡게 되었다.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라면 다들 꺼리는 학교폭력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은 그의 신체적 조건과 외모상 특징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나 할까. 그가 초과근무를 밥 먹듯 하며 진상 학부모와 학교생활 부적응 학생들에게 시달릴 때, 같은 학생생활안전부(예전의 학생과)에서 학생 학부모 상담 업무를 담당했던 나는 그와 함께 의논하며 일을 처리할 때가 많았다. 그리고, 학교폭력자치회의가 끝나고 난 뒤나 회식 때마다 기본으로 3차까지 동행하며 밤늦게까지 술잔을 주고받는 가운데 나이나 경력, 세대 차이 같은 환경적 제반 조건을 초월하여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모 육군 훈련소에서 근무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상처를 입고 대위로 전역했다(그의 아내 역시 현재 육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일하다가 뜻밖의 변수를 만나 직종을 갑자기 바꾸게 된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삼사십 대의 비교적 젊은 남교사들은 회식이 끝나고 2차에 합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졌다. 그들은 주로 자동차나 컴퓨터, 스마트 폰 같은 전자제품에는 관심이 많지만,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인간관계에 관심이 없거나, 특히 길게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데 아주 인색하다. 그런데 그는 어쩌자고 나 같은 선임 교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남다른 생활 태도와 취향을 가지게 된 것일까.
사람은 보통 자신의 체격에 비례하는 양만큼 술을 마실 수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주량은 실로 대단했다. 우리는 평소 술자리에서 만나면 1차에서 푸짐한 안주에다 소주를 마시고, 2차에 가서야 맥주를 마시곤 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대뜸 소주에다 맥주를 섞어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래야 3차에서 우리와 거의 비슷하게 취하기 때문이었다. 전교를 통틀어서도 3차까지 가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불과 사오 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제법 술깨나 한다는 관록의 주당이었는데도, 그는 우리보다 레벨이 한 단계 더 높았다고나 할까. 무릇 사람이나 사물이나 할 것 없이 아는 만큼 잘 보이는 법.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와 나는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런 만큼 더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안 부장님, 여기 내 머리 좀 보세요. 학교폭력 업무 1년 하다 보니까 머리가 온통 백발이 돼 버렸다니까요!”
그가 특유의 그 짧은 스포츠형 앞머리 가운데를 양쪽으로 젖히자 놀랍게도 머리카락 밑 부분이 노인네처럼 온통 하얗게 세 버린 것이 아닌가. 신라 시대에 조신(調信)이란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인생무상을 경험하고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변했다는 설화는 읽어 봤지만, 머리카락이 새까맣던 젊은 사람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백발로 된 사례를 그를 통해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책상 앞에 앉아서,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밤늦게까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학교폭력 사안 보고서나 학교폭력자치회의 진행 기록을 시시콜콜 작성하곤 하는 그 모습을 보면 안 그래도 딱한 생각이 들곤 했던지라, 나는 그가 하루빨리 수월한 보직을 맡고 맘 편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길 바랐다.
“그렇다고 내년에 다른 학교로 갈 생각은 하지 마. 어딜 가도 마찬가지야. 어떤 학교 교장이라도 자넬 보면 학교폭력 업무 맡기려고 할 거야. 그냥 눈 꼭 감고 여기서 한 해 더 하다가, 내년에 다른 업무로 바꿔 달라고 하는 게 좋을 거야.”
최근 들어 급변한 학교사회의 인권 존중 풍토에서는 어느 학교나 할 것 없이 대책 없이 막 나가는 불량 학생의 지도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가벼운 체벌이나 훈육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녀석들을 효과적으로 지도하려면, 아무래도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교사에게 학교폭력 업무를 맡기기에 십상이었다. 그나마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에 압도되어 고분고분해지는 아이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처럼 과중한 업무를 짊어지고 힘든 학교생활을 감수하는 교사들이 생기게 되었고(성적이 낮거나 학업에 관심 없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 학교는 학교폭력 발생 빈도가 더 높은 편이다), 보통 국공립학교에서는 한 해만 학교폭력 일을 해도 그 이듬해 바로 보직을 바꿔달라고 희망하는 교사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비춰 보건대, 피차 감정적 교류가 없는 사람과는 10년을 넘게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어도 헤어짐과 동시에 그 존재는 잊히고 말았으며, 술자리에서 맺어진 진한 우정 역시 직장이나 사는 곳이 바뀌면 곧 빛이 바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와는 불과 2년 6개월 같이 근무하고 헤어졌음에도 지금까지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으니 극히 이례적인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내가 학교에서 멀지 않는 곳에 살고 있고, 그가 함께 근무하는 경력교사들과 유대관계가 좋으며, 하는 일에 대한 협조체제가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두 개의 부서가 함께 쓰는 교무실에서 그는 총무를 맡고 있다), 나로서는 그를 각별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지지난해 8월 말 내가 명예퇴직을 하기 두 주 전, 전주-군산으로 퇴직 기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여름방학 전에 그가 제안해서 계획한 일이었지만, 연일 30도를 넘나드는 무더위 속에서 진행하기는 어려우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여교사 한 명을 포함해서 같은 교무실 교사들 대부분이 2박 3일의 여행에 기꺼이 참석한 것이었다. 특히 둘째 날 밤에 그가 마련해 준 깜짝 이벤트는 (두 군데의 사립고등학교에서 근무하다 그만두고, 만 50세가 다 된 나이에 임용고시를 거쳐 공립학교로 옮겨와야만 했던), 불우했던 내 교직 생활이 한순간에 보상받은 듯한 기쁨과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동기나 동문, 또래도 아니고, 동향 출신도 아닌 그 사람이 보여준 우정과 동료애는 실로 내가 처음으로 맛보는 따뜻한 감동을 선사해 주었다.
올해 들어와서도 우리의 만남과 여행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1월에 다녀왔던 부산여행도 더없이 즐거웠거니와, 오는 4월에 충청북도나 경기도 북부 어디쯤으로 가기로 한, 짧은 2박 3일 여행(금요일 퇴근 후에 출발하므로)도 벌써 기다려진다. 전에도 그랬듯이 그가 펼쳐줄 지역사회 곳곳의 숨은 명소와 맛집 탐방의 퍼레이드가 기대된다. 아니, 꼭 특별한 곳이나 맛난 음식이 아니어도 좋다. 자기 이해 관계 계산에 재빠른 똑똑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도시에서 잠시 벗어나, 그와 함께 즐기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간 그 자체가 좋은 것이다.
첫댓글 좋은 친구 두셨군요. 그냥 관계로 이어진 동료보다 불쑥 아니 잊을만하면 찾아주는 그런 순수한 마음 소유자가 있으니 좋겠습니다. 거기다 무장도 없는 편안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친구를 두셨으니.
사람사이의 관계는 나이나 외적 조건 같은 환경보단 취향이나 관심사, 서로에 대한 긍정적 관심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후배 하나 있으면 참 좋겠네요. 저도 딱 생각나는 그녀가 있네요.
전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강시인님이 직장 책상 앞에서 시집 발간을 기념해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아마 후배들에게 존경받고, 부하 직원을 존중해 주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부럽네요.
그동안 교직생활에서 베풀었던 덕이 인복으로 이어진 것 같군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제 이상에 맞지않는 사립학교에서 마음 고생 많이 했지만, 마지막 학교에서 좋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행운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 선생님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힘이 있는가 봅니다. 그 힘은 배려, 정, 인자한 기품, 미소, 부드러운 카리스마 등이 버무러져 나온 것이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누적된 실패 경험으로 인해 후배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한 학교의 소속 부서 모임이나 원로교사 모임에서 계속 불러줘서 나가고 있으니, 동문이나 후배 하나 없는 객지에서 그렇게 외롭지 않게 지내고 있습니다.
안 선생님 부럽습니다 . 제 곁에 그런 사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귀한 인연이군요. 갈 데 없는 동물에게도 귀한 은혜 베푸는 늑대님 주변에도 좋은 인연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흔한말로
덩치값 하는 그사람 인거 같구요.
값 또한 제법 고가(高價)인듯 합니다.
인연이라는게 어디, 억지로 만들어지는것은 아니기에, 언제라도,
누구라도
인연이 될수있음을 일깨우는
좋은 말씀글. 고맙습니다.
쉴 새 없이 시를 쓰는 박시인님을 여기서 만나네요. 전 요즘 시창작방에 도무지 들어가보지도 못 하고 있는데..... 아뭏든 방문해줘서 고맙습니다. 계속 정진하는 시인 되길 되시고.... 4월 회원의 날에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사람에겐 사람만이 희망이죠. 잘 읽었습니다.
요즘 신작가님은 활발하게 작품을 쓰고, 카페에서도 거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며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데... 다만 거주지가 좀 먼 곳이라 회원의 날에도 만날 수 없어서 아쉽군요.
@화원 안영신 네, 제가 토요일에도 일을 하는지라 금요일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6월에 행사 있을 때나 만나 뵙겠습니다.
@신상현(이비책방) 행사 끝나고 함께 하는 오붓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길 기대합니다.
여행을 떠날 때 함께 갈수 있는 벗이 있다는것은 진정 행운이죠
좋은시겠어요
문학의봄 행사 때마다 벗과 함께 동행하는 유작가님의 모습도 부럽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부럽습니다. 멋진 친구를 두시게 된것을 축하드립니다.
생활지도부가 힘들어서 다들 기피하지요....
지금은 아이들 지도가 정말 힘든것 같습니다.
말한마디만 잘 못해도 물고 늘어지는 학부모들 하며
학생인권 어쩌구 너무 힘들어서 요즘은 연금만 차면 명퇴를 하지요...
산마을풍경님도 교직에 계셨다고 하니까 학교 사정을 잘 아시겠네요. 예나 지금이나 착하고 성실한 학생과 그 학부모는 교사를 존중하고, 교사와 학생이 상호신뢰하는 가운데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그렇지 못한 학생과 학부모로 인해 학교가 어려움에 처해도 현재로선 뚜렷한 해결책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