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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9월 27일 주일
[(녹)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한국 천주교회는 사도좌와 뜻을 같이하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에게 더욱 깊은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자 2001년부터 ‘이민의 날’을 지내고 있다. 주교회의 202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는, 이 명칭을 보편 교회에 맞추어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World Day of Migrants and Refugees)로 변경하였다.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의 법을 따라 공정과 정의의 길을 걸으라고 촉구합니다. 죄인에게도 회개를 통하여 이러한 길이 열려 있으나,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는 오히려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가 주님의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공평하다고 여기시는 인생길을 전해 준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면 죽을 것이며, 악인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살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이든 이기심과 허영심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마음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드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참되게 실천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의로운 길에 대한 가르침을 믿은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악인이라도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면,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5-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5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2,1-11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2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4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
5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뜻대로 가서 일합니다. 다른 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은 하지만 정작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처음부터 아버지의 지시에 순종하는 모습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벽하지 못한 인간이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지를 오늘 복음의 두 아들을 통하여 알려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못합니다. 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고, 그것 때문에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하느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변화할 기회를 주십니다. 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독서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앞에 더 나은 모습인지 잘 알려 줍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7-28).(왕태언 요셉 신부)
오로지 직진하시는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보는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난하고 고통받는 당신 백성을 향한 시선은 더할나위없이 따뜻했습니다. 건네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목이 메이고 눈물겨울 정도로 은혜롭고 다정했습니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지도자들, 뒤가 구린 부자들, 잔뜩 폼만 잡고 다니지 머릿속은 텅빈 사제들을 향해서는 얄짤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악함을 손바닥 보듯 읽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빙빔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말씀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나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잔뜩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던 사람들이 수석 사제들이요 백성의 원로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놓고 도전장을 던지니 속으로 엄청 불쾌했을 것입니다. ‘뭐 저런게 다 있지? 대체 어디서 굴러온 게 겁대가리도 없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건가?’
그들은 벌써 예수님을 향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어떻게서든 꼬투리를 잡고 올가미를 씌워 그분을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작정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절대 굽히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으십니다. 오로지 직진입니다.
이윽고 “예! 일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절대 움직이지 않는 첫째 아들 즉 이스라엘 백성, 그 중에서도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장을 날리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이토록 강경한 예수님의 발언의 배경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하느님 구원 사업,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도래 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 앞에서도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는 그들의 완고함과 경직됨을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 하고 잘 대답해놓고서는 포도밭으로 가지 않는 둘째 아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공부했고, 율법의 규정을 목숨처럼 중요시여겼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척이나 경건했으며, 생활도 굉장히 올바르고 정직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도래 이후 과거의 율법이 폐기되고 예수님으로 인한 새로운 사랑의 율법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향수에만 묶여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외치고 부르짖어도 새로운 세상에 부합되는 새로운 사랑의 율법에 결코 마음을 열지 않았고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 그들은 첫째 아들과 같습니다. 비록 그들의 먼젓번 삶은 꽤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이었고 그들 하루하루의 삶이 곧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되는 회개에로의 요청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크게 가슴을 쳤고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삶을 180도 바꾸기로.
대표적인 인물이 마태오요, 자캐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활짝 마음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과거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요 친구로 거듭납니다. 그간 착취로 모았던 막대한 돈뭉치는 동족들에게 과감히 되돌려줍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깜짝 놀랄 선언을 공개적으로 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지성과 이성, 감성과 오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능력을 이용해서 공간과 시간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습니다. 사람의 손은 짧지만, 도구를 만들어 손이 닿는 공간을 넓혔습니다. 칼과 화살과 창을 만들었고, 호미와 쟁기와 낫을 만들었습니다.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어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도 공간을 확장했습니다. 예전에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까지만 소통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글을 통해서 시간도 확장했습니다. 우리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플라톤의 글을 읽고 공자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불경과 성경을 읽으면서 오래전 사람들의 지혜와 신앙을 만납니다. 그렇게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런 인간이 이제 인공지능을 만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자료를 학습해서 사람의 질문에 답합니다. 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인공지능에 물어보곤 합니다. 앞으로는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인공지능이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 사람과 비슷한 몸을 만들어 주면 ‘휴머노이드’가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휴머노이드를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집과 문, 계단과 의자, 자동차와 공장, 수많은 도구가 모두 인간의 몸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을 도우려면 결국 인간의 모습을 닮는 것이 유리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창세기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며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휴머노이드를 만들면서 사람을 닮게 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당신을 닮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얼굴이나 몸이 하느님과 비슷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철학과 문학의 눈으로 보아도 인간은 단순히 먹고 살아가는 존재를 넘어섭니다. 인간은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무엇이 옳은가?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감동하고, 한 편의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진리와 아름다움, 사랑과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도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선을 향한 네 가지 씨앗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사단(四端)’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양보하는 ‘사양지심’, 잘못과 악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입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네 마음을 온전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굶주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빵을 나누어 주셨던 모습에는 측은지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낮은 자리로 내려가신 모습에는 사양지심이 있습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사람들을 꾸짖고 위선을 질책하신 모습에는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라고 하시며 올바른 길을 식별하도록 하신 말씀에는 시비지심이 있습니다. 어쩌면 맹자가 말한 이 네 마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 놓으신 당신 모습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특별히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기억합니다. 이주민과 난민은 여러 이유로 정든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전쟁을 피해 떠난 사람이 있고, 박해를 피해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난 사람도 있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낯선 나라로 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든,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피부색이 어떠하든 모두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 본당도 생각해 보면 ‘이주민의 교회’입니다. 많은 교우가 고향을 떠나 이곳 달라스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언어가 낯설었을 것입니다. 문화도 달랐을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한국을 떠나 이곳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주민의 마음을 조금은 압니다. 낯선 곳에서 누군가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고마운지 압니다.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너희가 나를 따뜻이 맞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을 당신을 환대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주민과 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단순한 사회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입니다. 낯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어 실천했습니다.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보신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고,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이주민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난민의 아픔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신앙은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질 때 비로소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을 맞이하며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낯선 사람 안에도 하느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 안에도 하느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때 우리 안 하느님의 모습도 더욱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오직 삶으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당신을 따릅니다
머리로만 따름 아니요
말로만 따름 아니요
손으로 따름
발로 따름
몸으로 따름
오직
삶으로
따르렵니다
당신을 닮습니다
머리로만 닮음 아니요
말로만 닮음 아니요
손으로 닮음
발로 닮음
몸으로 닮음
오직
삶으로
닮으렵니다
당신과 함께합니다
머리로만 함께 아니요
말로만 함께 아니요
손으로 함께
발로 함께
몸으로 함께
오직
삶으로
함께하렵니다
당신을 믿습니다
머리로만 믿음 아니요
말로만 믿음 아니요
손으로 믿음
발로 믿음
몸으로 믿음
오직
삶으로
믿으렵니다
당신을 희망합니다
머리로만 희망 아니요
말로만 희망 아니요
손으로 희망
발로 희망
몸으로 희망
오직
삶으로
희망하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머리로만 사랑 아니요
말로만 사랑 아니요
손으로 사랑
발로 사랑
몸으로 사랑
오직
삶으로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하나입니다
머리로만 하나 아니요
말로만 하나 아니요
손으로 하나
발로 하나
몸으로 하나
오직
삶으로
하나이렵니다
오늘의 성인
성 빈첸시오 드 폴(Vincent de Paul)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581-1660년
같은이름 : 뱅상, 빈센트, 빈첸시오 아 바오로,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프랑스의 농부인 쟝 드 폴과 베르트랑드 드 모라스의 6남매 중 셋째 아들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는 프랑스의 프루이(Prouy)에서 태어나 닥스(Dax) 대학교와 툴루즈(Toulouse)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60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605년 그는 어떤 부인의 기부금을 받기 위해 마르세유(Marseilles)에 갔다 돌아오던 중에 해적들에게 잡혀 튀니지에서 노예로 팔려가는 불운을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1607년 아비뇽(Avignon)으로 탈출하였고, 그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로마(Roma)로 갔으나 1609년에 앙리 4세에 대한 비밀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때 그는 파리(Paris)에서 발로아의 마르그리트 왕비의 전담사제가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업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18년 그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을 파리에서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1625년 그는 선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회는 '빈첸시오회와 라자로회'로 알려졌고, 주로 농부들에게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하여 본당 단위의 회를 구성하였으며, 1633년에는 루이즈 드 마리약(Louise de Marillac, 3월 15일)과 더불어 '애덕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병원과 고아원을 세웠으며,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대속하였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움으로써 사제 양성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해외 선교사 파견을 물론 프롱드 전쟁의 희생자 구호소를 세웠고 또 영적인 저술을 남겼다.
귀족적이고도 충성스러운 성격을 지녔던 그는 인간의 고통과 비참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다 바친 것이며, 그러한 인간악을 유발하는 환경을 제거하는데 적극성을 내보인 탁월한 인본주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1737년 6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하여 시성되었으며, 1885년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하여 모든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엘제아리오 (Elzear)
활동년도 : 1285?-1323년
신분 : 3회원
지역 :
같은 이름 : 엘제아리우스, 엘지아르, 엘지알
사브랑(Sabran)의 성 엘제아리우스(Elzearius, 또는 엘제아리오)는 프로방스(Provence) 지방 앙주이(Ansouis)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로비앙(Robians)의 부친 성에서 태어났고, 모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마르세유(Marseilles)의 성 빅토르(Victor) 수도원의 원장인 사브랑의 빌리암(William)으로부터 교육받고 성장하였다. 수도원장은 그의 아저씨였는데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영적 지도자의 영향을 받아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고, 1299년에 소유권 및 정치적인 입지를 고려해서 같은 프로방스의 귀족 가문의 딸인 델피나(Delphina, 12월 9일)와 결혼하였다. 알프스맥 저지대에 위치한 퓌미셸(Puimichel) 성에서 태어난 델피나는 당시 15세였다. 이들 부부는 처음에는 앙주이에서 살다가, 곧 퓌미셸 성으로 옮겨 와 살았다. 그들은 서로에 대하여 지극한 신뢰와 사랑을 지녔으며, 델피나는 남편을 따라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이 되었다. 또한 신심이 두터웠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동정을 지키기로 서약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이 거룩한 부부는 관상과 기도를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선행과 애덕 실천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며 삶으로써 주위의 귀감이 되었다. 성 엘제아리우스는 매일같이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의 나이 23세 때에 부친의 명예와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이에 따르는 온갖 위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열렬한 신심과 지혜로써 세속적인 재물을 다스렸다. 또한 그는 국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는데, 왕의 부탁으로 파리(Paris)에 대사로 갔다가 중병을 얻어 1323년 9월 27일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에 그는 즉시 총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사를 매일 묵상함으로써 온갖 고통을 이겨냈다. 노자성체를 영하면서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것이 나의 희망 전부였다.” 그는 자신의 고해신부인 어느 작은 형제회 회원의 팔에 안겨 영광된 삶을 마쳤다.
1309년경에 그는 자신의 조카인 그리모아드의 빌리암의 대부를 섰는데, 빌리암은 나중에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 교황이 되었고, 1369년 4월 15일 자신의 대부인 엘제아리우스를 시성하였다. 한편 델피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37년을 더 살았는데, 그녀는 그 동안에 나폴리(Napoli)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수녀가 된 나폴리 여왕 산치아(Sanchia)와 함께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서 살았다. 그녀와 여왕은 절친한 사이였다. 델피나는 대부분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많은 자선을 베푸는 등 은수자처럼 생활하다가 1360년에 사망하였다. 델피나는 1363년부터 시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1791년 델피나의 유해는 앱트(Apt)에 있는 작은 형제회 성당에 남편의 유해와 나란히 안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