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금기사항(禁忌事項)의 공론화(公論化) 배경(背景)
금기사항인 보의문제가 공론화됐다고 해서 일이 술술 잘 풀릴지는 미지수다. 사회가 그렇듯 문중에도 보수와 진보세력이 공존한다. 더욱이 문중사의 경우 진보보다는 보수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다. 진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문중사에서 진보는 일단 이론으로 무장된 부류들이다. 이에 반해 보수들은 선조들이 해놓은 것은 어떤 것도 부정하거나 개변(改變)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대상으로 어떤 현안을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보의문제가 공론화되기까지는 지속적인 노력의 결실이랄 수 있다. 본인은 2005년 4월「장흥 위씨 요람」을 출판한 이후「천년세고선집」과「보의논총」을 저술할 결심을 가졌다. 이유는 1999년에 발행된 대동보를 보고 참으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른들께서 너무도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개인별 면주(面註)도 부실하거니와 지장록(誌狀錄)에 수록된 내용도 기준이 없이 게재됐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선조들의 유고를 다시 정리하고, 보의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려고 작정했다.
『 성씨(姓氏)마다 여러 기록(記錄)이 있다. 기록 가운데 대표(代表)는 역시 족보랄 수 있다. 족보에는 시조의 신상은 물론 후손의 생졸년과 개인의 벼슬 등이 망라돼 있다. 한마디로 한 씨족의 역사(歷史)이다. 한 국가의 역사기록에도 명예와 오욕이 공존하듯 씨족의 역사기록인 족보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영욕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씨들은 자신의 성씨를 과장하기 위해 전설(傳說)과 신화(神話)로 포장한 경우도 있다.
우리는 어떤가. 장흥 위씨의 족보역사는 약 251년에 불과하다. 다른 성씨에 비해 일천한 편이다. 조선초기인 1423년(세종 5)에 발행된 문화 유씨의 영락보(永樂譜)보다는 336년, 1476년(성종 7)에 발행된 안동 권씨 성화보(成化譜) 보다는 283년, 1562년(명종 17)에 발행된 문화 유씨 가정보(嘉靖譜)보다는 197년 뒤진 1759년에야 기묘초보를 발행했다. 이후 우리의 족보도 크게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으로 발전했는가? 편견일지 모르나 발전됐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초보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된 부분을 아직까지 바로잡지 못한 것이다. 왜 족보의 부실과 오류를 개선하지 못하는가. 첫째는 선조들의 작품을 존중하는 것이고, 둘째는 바로잡으려면 말썽이 나기 때문이다. 무난한 방법을 택하다 보니 본질은 손대지 않고 손록(孫錄)만 보충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족보가 답보상태로 있는 것은 후손들의 책임이다. 선조들의 결정을 존중한다지만 명백하게 그른 것을 방치하는 것이 과연 옳은 도리인가. 선조들도 족보 서문과 보의록을 통해 잘못과 의문을 지적했으면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그것을 모른 체 넘어가는 것은 족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데 보다 큰 원인이 있다. 더구나 선조의 벼슬을 높이거나 없는 벼슬을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숭조(崇祖)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봐도 합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족보로 거듭나야 한다. 선조들도 그 것을 당부했다. 일종의 유언이라 할 당부말씀을 따르고 후손에게 떳떳한 족보를 물려주는 것은 선조의 의무이기도 하다. 족보는 후손으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는 지침서가 되게 하고, 한편으로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 어느 한 문중의 자랑거리를 나열하는 그런 책이 돼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무결이란 없다. 족보도 무결하기는 어렵다. 그래선지 최초로 족보를 닦으신 영이재공(詠而齋公)께서도 서문에서 무결(無缺)를 부정했다.「世系」부분에서 옛 사람의 뜻을 따랐지만 타일 고증(考證)이 되면 고치라고 분명하게 당부했다. 초보발행에 실질적으로 간여했을 존재공(存齋公)도 수관(受貫)․구보(舊譜)․충렬공과 원감국사 3세간(世間)에 의문을 풀지 못해 크게 아쉬워한 대목이 여러 부분에서 확인되고 있다.
기묘초보의 의문(疑問)을 연구한 선조는 관북파(關北派)의 만암공(萬庵公)이다. 그는 시대를 풍미하는 석학(碩學)답게 사서(史書)의 기록과 대조(對照)해 잘못된 부분과 의문난 부분을 체크했는데 그것이 바로 보의설(譜疑說)이다. 이후 공의 업적을 필적할 만 후진이 나오지 않았으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보의문제(譜疑問題)가 문중의 큰 화두(話頭)로 등장하고 있다. 차제에 보의(譜疑)를 완결(完決)지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상 제기된 보의(譜疑)문제를 개괄(槪括)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나름대로 보의에 대한 족보의 기록을 공부했다. 먼저 "장흥 위씨 요람"을 엮기 위해 대동보(1999년 기묘)를 살펴봤다. 특히 지장록을 여러 번 정독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는 보의관련 기록을 한 곳에서 일별(一瞥)할 수 있게 했다. 흩여져 있으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식별할 수 없다. 상치(相馳)된 사실관계를 알 수 없지만 모여 있으면 분별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중의 수용여부(受容與否)에 상관없이 필자가 여러 기록의 확인을 거쳐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비록 선조들이 만든 족보라 하더라도 사료와 상식에 비추어 크게 잘못이 있으면 과감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상을 미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있는 것처럼 방관하는 것을 숭조(崇祖)로 볼 수 없다. 후손은 물론 건전한 상식을 가진 모든 이가 인정하고 공감하는 족보여야 한다.』
이상의 글은 2010년 5월 30일자로 발행한「장흥 위씨 보의론총」머리말이다. 본인은 이 한권의 책을 쓰기 위해 거의 6년의 시간을 보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찮게 보일지 모르나 251년간의 족보사를 더듬고 행여라도 일어날 시비를 줄이려 노심초사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의 보의문제를 말끔히 개선하는 것이 책을 쓴 목표이다. 차제에 일반 독자의 이해를 보다 쉽게 하기 위해 보의의 중요한 쟁점을 다음 항에서 도표(圖表)로 정리해서 내놓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4. 중요(重要) 보의(譜疑) 항목(項目) 비교(比較)
1) 시조공(始祖公) 관련 부분(部分)
세상에 완전무결이란 없다...^^
"이 한권의 책을 쓰기 위해 거의 6년의 시간을 보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찮게 보일지 모르나 251년간의 족보사를 더듬고 행여라도 일어날 시비를 줄이려 노심초사했다."
저자(원산 위정철)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느껴집니다.
도문회 몇몇 분들의 노고로 문중 역사가 크게 진보한 것은 시실입니다. 이를 본받아 우리 후손들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연구에 힘을 보태 족보 미완성의 부분도 정리해야 되리라 봅니다.
하직 준비
은퇴할 나이에 이르면
목숨은 하늘에 맡기고,
몸은 의사에게 맡기고,
마음은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
자식들이나 손자들에 관한
일들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만하고,
입은 다물고,
뒤에서 조용히 기도하자
이런 원칙을 세워보는 것이다.
원칙을 세웠어도 지키긴 어렵다
그게 인간의 나약함이다
그러니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다짐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진정시켜 보는 것이다
자식과 손자들이 스스로
독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 행운을 누리며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다
圓山 위정철(32세, 존재학연구소)
원산 시(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