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장
-청도장
이기철
나는 청도군 각북면 덕촌리에 사는 데요
내게는 남들에겐 金이라는 시간이 모레처럼 많이 남습니다
나는 그 금을 쓸 데가 없어 가끔 자전거를 타고 청도장에 갑니다
당신, 혹 청도장에 와보셨나요?
못 와 보셨으면 꼭 한 번 다녀가세요
가지 수박 상추 아욱 들깨 냉이 부추 비름
북어 멸치 가자미 조기 낫 호미 우산 삿갓
수도 없이 많지만 이것만 쓸께요
단돈 만원이면 다섯 가지 여섯 가지를 살 수 있어요
다 팔아도 오천 원도 안 될 푸성귀를 짚방석에 놓고
온종일 해바라기를 하는 할머니도 있어요
어찌 거길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천 원이면 주먹 보다 큰 감자와 고구마를
다섯 개는 살 수 있고 거기다 덤으로 한 개 더 얹어주기도 하는
데요
5일장은 살 게 많아 가는 장이 아닙니다
할머니의 솔뿌리 같은 손과 주름 많은 얼굴을 보러 가는 거지요
당신이 오는 날은 청도장에 햇빛이 더 많이 쏟아질 것입니다
당신이 올 때까지 집에도 가지 않고
할머니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꼭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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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아랫장
허 형 만
장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온 집안이 잔치 집처럼 들썩거렸다
어머니는 열무를 보기 좋게 가지런히 다듬고
나는 밭에서 이슬 젖은 깻잎을 뜯느라
손톱 밑이 새까만 손으로 깻잎을 간추려 다발로 묶었다
할머니는 채소들이 수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리거나
젖은 무명베를 광주리에 담긴 채소들 위에 덮었다
아랫장 까지는 십리 길,
당숙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수지 방죽을 지나
장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나는 리어카에 고추며 열무를 싣고
희희낙락, 아직은 이슬 어린 햇살을 밟으며 장으로 갔다
장날이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말끔하게 차려입은 밤재골 이모랑 이모부를 만나고
해룡면사무소 주사인 외삼촌과 외숙모도 만났다
깻잎이며 열무며 고추까지 다 팔고 난 파장 무렵이면
우리는 손가락이 예쁜 아주머니의 국밥집 긴 의자에 앉아
눈먼 외할머니 안부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셨다
낮부터 한 잔 하셨는지 따가운 햇살에 더 불콰한
낯모르는 어르신에게 외삼촌은 나를 자랑하며 인사시키기도 했다
제대하고 농사짓던 두 해 동안
그렇게 아랫장은 나를 먹여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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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그늘
-광장시장
이 희 선
입동의 늑골 쯤, 진눈개비 내리는데…
노점상들이 긴 골목을 이룬 종로, 광장시장
옆구릴 비집고 자리 잡은 칼갈이, 가위갈이 할아버지
패인 숫돌과 연삭기를 내려놓고
칼과 가위를 갈아 낸다
저 닳은 칼로는 순대나 생선을 잘라 팔아
고픈 허기를 연명 했을 게고
저 가위로는 수만 필의 천을 잘라
찌던 가난을 마름질해 꿰맸을 게다
떠도는 바람처럼
연장통 하나 달랑 짊어지고
가위 갈아요, 칼 갈아요 골목을 외쳐대던
그의 발길이 잠시 머문 시장 옆구리
날렵한 솜씨하나로
무딘 가난은 연삭기로 잡는다고 으쓱대는 노익장
달라붙은 주머니가 두둑해진 해질녘
푹 꺼진 볼기짝에 미소가 노을처럼 번진다
그늘진 눈빛이 번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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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이 지나듯이
-후암동 야시장
안 영 희
버스가 떨궈 준 후암동 종점
산비탈을 감는 동네의 층계는 뒤트는 지점 쯤
간신히 흐릿한 외등 빛 번질 뿐
어둠의 긴 통치영역 이었는데요
불현듯 환하게
남산 중턱에 불 밝힌 야시장이
피어 있었어요 잔치마당인양 난만히
털이! 터어리이요! 외치는 노점에서
무더기의 생선을, 과일봉지를 받아 안으며
카바이드 불빛아래 때깔 자랑하는 늦가을의 홍옥처럼
배고픔도 잊은 채 문득 홍조가 드는
스무 살 즈음이 있었어요
옷깃 여미며 여미며 견디던 삶의 한기가
어느결엔지 훈훈히 풀리던,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의 무심한 위로
기다리는 건 처마 밑에 쌓아둔 서너 줄 연탄,
중고품 앉은뱅이책상 하나뿐인 불 꺼진 방 한 칸
…오늘저녁은 옷이 얇은 어느 외국인 노동자가
종점에서 버스를 내려
한사코 어둠이 뭉개는 생의 비탈,
기나 긴 층계를 올라가고 있을까
남산의 중턱 갑자기 환히 불 켜진 아라비안나이트,
후암동 야시장에서 얇은 지갑을 열며
시린 마음자리에 문득 난방이 들고 있을까
이마를 마주 댄 낮은 지붕아래 해방촌의 긴 골목
저녁 숟가락들 부딪는 소리 들으며 내 청춘 지나듯이,
이 저녁은 가난한 누가
지나가고 있을까. 가슴에 시장봉투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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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장날
이승용
풀 죽은 어깨가 들썩들썩
닫혔던 두 귀가 쫑긋쫑긋
눈이 돌고 잃었던 미각이 돌고
무디어진 내가 다시 살아나것다
새끼 내어 담아온 강아지, 병아리, 토끼
온갖 것들 다 모여 툭툭 행인 어깨 부딪혀도
마음 상하지 않는 시골 고향 냄새
엄마 따라 장에 오던 어린 놀라움이 사방에 있다.
밤 까는 기계 앞에서 주저 없이 한 됫박 사들고
찰옥수수 입에 물고 다녀도 흉 되지 않는 편안함
맥없던 내가 다시 살아나는 생의 현주소
파닭집에 앉아 맥주 한잔에 목을 축인다.
근질근질 솟아나는 힘
용인 장날에야 나오는 날개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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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출석부
-강화장
반칠환
버스터미널 옆 좌판
손금 같은 노선마다
웅기중기 모여든 보따리들
할머니들 풀어 놓는다
씨감자 한 소쿠리,
봄동 한 채반,
할머니 하나,
봄볕에 수런거린다
팔려도 그만
안 팔려도 그만
함께 겨울을 났다고
살아 있었다고
봄이라도
늘 같은 봄은 아니지만
쑥은 해마다 푸르고
냉이는 해마다 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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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장날
윤고영
닷새마다 열리는 장터에
이른 아침 봇물 터지듯
몰려드는 우리들의 엄마 아부지
다라꼴 성낭골 가맛골재수 영길이 옥짜
초롱한 자식들 학자금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목 좋은 자리엔 멀리
대구에서 인근의 영덕
울진에서 온 사람들이
새벽 시골 읍내에 회를 치고 있다
해병대 사단 포항제철 공장의
식솔들 넘쳐나는 사투리가
시끌벅적 야단법석
따발총 소리 자욱한 전쟁터
고려말 충신 포은의 고향
삼봉산 문충골의 천혜와
운제산 정기가 손뼉치듯 맞닿은 장터
영일만 일출은 오늘도 햇살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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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리 5일장
편부경
사방 잘박이는 물살의 걸음도
너울대는 해조류들 그만하면 키가 자랄 터
이십세기 덜 떨어진 제국주의 유산이나
강치들 아우성과 피비린내 같은 것 말고
깊고 너른 바당에서 푸른 숨 몰아쉬던
구름 언저리 구부정한 햇살은
풍경으로 잠시 매어 놓자
실효적 지배권이나 안용복 어록 또는
경계를 넘어 온 철없는 것들
지천의 푸새 틈새를 지나와
물의 살 한 점이면 흥겨운 잔이 넘실거릴 그 땅
잊고 잃었던 길과 붓이 키운 시간의 면벽
활짝 펼친 벼랑아래 쪽배 한 척 매어두고
오일에 한번 동해 그 섬 독도리 난전으로
휘적휘적 장 구경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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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마경덕
하동 고하리 장날, 줄줄이 이고 지고 버스에 오릅니다. 때는 봄,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올라 노인의 마른 몸에도 물이 고일 것 같은
날, 장 보고 가는 고무다라 보따리 포대자루 초만원입니다. 매부리
코 노총각 윗말 어린 처녀 등에 찰싹 붙어 코를 씰룩, 눈을 내리 뜬
처녀 귓불이 붉네요. 훌쩍 마흔 넘긴 무지렁이 총각 절구통에 치마
만 둘러놔도 거시길 디밀겁니다. 환장할 봄이거든요. 재첩장사 과
부 아지매, 떨이를 못했는지 어깨가 기울었습니다.
최씨네 구멍가게 돌아 커브 길에 닿자 걸쭉한 아낙의 목소리, “
에구구! 젓통 터진다.” 소갈머리 없는 밴댕이 남편에게 먹여보라는
젓갈장사에게 홀려 콤콤한 젓갈 한 봉지 산 게 그만 터지고 말았습
니다. “젖통이요, 젓통이요?” 능글맞은 남정네의 물음에 왈칵 웃
음이 쏟아집니다. 산수유가 노랗게 실눈 뜨는 봄, 발을 밟혀도, 허
허허, 호호호. 봄은 넉살좋게 굴러갑니다.
삼거리 욕쟁이 할매 보따리 챙겨들고 일어서는데. 버스 문 까지
는 첩첩산중, 입심은 여전해 오살헐 놈, 육실헐 놈, 출구에 닿기
전 이미 몇 놈은 죽어 넘어졌지요. 성미 급한 어르신 얼른 비키라
고 호통이신데. 쉽게 길이 나지 않습니다. 밀고 당기며 간신히 내
렸는데 아뿔사! 아랫도리 허전합니다. 노상에서 고쟁이 하나 달랑
걸친 할매, “이놈들아, 치마 내놔라” 시퍼런 일갈에 끈달이 홑치마
를 찾느라 또 한번 버스가 우당탕, 옆구리를 비틉니다. 누군가 비
린내 묻은 치마를 휙 창밖으로 던지고 웃음 한 사발 엎질러집니다.
봄은 또 그렇게 스리슬쩍 가파른 고개를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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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
-법성포 5일장
이 신
아홉이었던가 열이었던가 허기가 철들기 전, 법성포항 뒷골목엔
비구름 잘라 만든 가게들이 모여 있었지.
조각조각 모아 보면 소나기 올 것 같은 구름집이 골목마다 있었
는데 거기 뭍으로 나온 조기떼로 넘쳐났지.
육지의 텃새를 견디느라 입을 벌리고 소리 없이 항거 하고 있었
지. 가슴께에 짚을 묶고 굴종에 말라 굴비가 되고 있었지.
들켜버리고 말았네. 듣도 보도 못한 딴 세상 내 동생 볼같이 빨
간 복숭아에 홀려 있는 내 눈을.
뿌리내리고 있었지. 뭍에 나온 아버지 구름집 주인께 허리를 구
부리며 신비로운 선물을 하려 는 듯싶었네. 다만, 외상 빚이 있었
을 뿐 한 번도 잘못한 적 없는 선량함만 가득한 눈으로 세 번까지는
아니고 복숭아 하나에 그만 굴비가 되시는데, 자꾸 입을 벌리셨는
데, 주인도 나도 소리를 듣지 못했네.
눈도 감고 입을 막을 것을 '"안 먹어도 된당께라" 하고 때늦은 허
기가 심술을 부려 아버지 가슴께에 대꼬챙이 질러버렸네.
그때 그 복숭아 한 광주리 사드리고 싶네. 아버지 한 입, 나 한
입, 콧잔등과 손아귀에 과즙을 줄줄 흘리며 나눠 먹고 싶네.
구름집 사라진 억울한 거리에 굴비는 더 많이 걸리고 굴종의 복
숭아는 철마다 열리는데 이제는 복숭아나무들 키우실까 궁금한 소
식, 복숭아 향내 나는 굴비의 눈물 냄새만 비릿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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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
김 관 옥
석양 바람이 불면
풀어놓은 보따리 꾸리기에 부산하다
먹다 남은 술잔도
입술과 입술을 오가느라 바쁜 옥과5일장
땅거미 앞에서
고향 마을을 비껴 앉은 영철이형님
논산 훈련소 수송부 근무 할적에
지, 엠, 씨 트럭 한 대 슬쩍하다
육군교도소 수형생활 했다는
전설 같은 젊은 날을 또 주무르고 있다
주모, 귀가 아프게 들은 이야기
행주에 닦으며
어둡기 전 텃밭에 상추씨 아욱 씨
심겠다는 등에 대고
염병할, 한 잔 만 더 퍼주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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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리고 그런 날
- 부전 역전 시장
김세영
어느 날, 방 두 칸 우리 집에서
다세대 주택 방 한 칸 월세 집으로 이사했다
건너 채에 고라니와 사는 털북숭이 백곰이
아침 휘파람을 부는 날, 던져 주는 초콜릿을 받아먹은
동네 원숭이들이 달콤한 입술로 길쭉한 풍선을 불고 놀았다
아버지는 양복대신 카키색 잠바를 입고 역전시장의 가설 점포에
나갔다
어느 추석대목 장날, 마른 오징어와 명태를 손에 들고 호객하다가
백일장에서 나와 함께 상탄 계집애가 다가오길래 문짝 뒤에 숨
고 말았다
그래도 파장에 떨이로 파는 고래 고기는 눈물 나도록 고소했다
수년 후 어느 날 새벽, 아버지는 전대를 배에 차고 전사처럼 나
갔다
영주 제천 단양 등지에 가서 곡물을 수집해서 사나흘 뒤
역에 싣고 와서 시장의 곡물상들에게 경매로 넘겨주었다
점차 전대가 두터워지면서 어머니는 상가점포에 곡물가게를 내
었다
점차 출타 기일이 길어지면서 가끔 부부싸움도 하였다
석탄가루가 날리어 란닝구에 얼룩이 몹시 지던 날,
아버지가 화로처럼 뜨거운 몸으로 돌아왔다, 열병이었다
장출혈과 수술로 아버지의 몸은
山자 적힌 빈 화물차량처럼 시커멓게 말라갔다
통곡처럼 폭설이 내리던 날, 내 손을 잡은
아버지의 손이 마른 솔방울처럼 툭 떨어졌다
역내의 석탄 더미가 눈부신 백미 더미가 된 것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아버지는 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언제 돌아올 것이란 한마디 말도 없이 다시 출타하였다
두 손을 들고 경매하는 木자 아저씨의 모습이
한동안 자꾸만 아버지가 쓴 山자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