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원은 ⑤번을 정답으로 발표했는데, 엄밀히 말하면 오류다. ⑤번을 다시 써보자.
⑤ 인간이 성(聖)을 알 수 있는 것은 자연물에 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류인 이유를 설명하겠다.
1. 성현(聖顯)의 대상은 ‘자연물’에 국한하지 않는다
불상 성모 마리아상
불상은 불교 신도들에게는 ‘성현’이지만 기독교도나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성모 마리아상 역시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성현’이다. 비록 성현이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고 할지라도(물론, 어떤 사물의 성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물의 성현이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현이 아니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조각상은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두 조각상이 비록 인공물이기는 하지만 원재료는 ‘돌’이라는 자연물 아닌가(그러므로 ⑤번 선지를 오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지난주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오지GO’라는 프로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오지(奧地)는 태평양의 어느 섬인 듯했고, 거기에 김병만, 이윤택 등 3명의 연예인이 오지 체험을 하는 내용이었다. 세 명의 남자가 밤에 마을을 구경하겠다고 거닐다가 어느 장소에 발을 디디려고 하는 찰나(그 장소는 울타리가 쳐져 있고, 울타리 가운데에 초가가 한 채 있었다), 마을 족장이 나타나 불같이 화를 내면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족장은 왜 화를 냈을까? 그곳이 그 마을 부족에게는 성현(聖顯)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울타리로 둘러싸인 그 장소는 그 마을 부족에게는 ‘세계의 중심’으로서 성현된 곳이다. 오늘날 우리(비종교적 인간)는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고대인들은 ‘세계의 중심’이 있다고 ‘생각’했고, 보통 그것을 자신들이 정착한 장소로 설정했다. 고대 그리스도 그랬다.
델포이 신전의 옴파로스
‘옴파로스(Omphalos)’는 고대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배꼽’은 우리 신체의 ‘중심’에 있다. 옴파로스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 상징물로 돌을 깎아 델포이 신전에 모셔 놓고 숭배했다(고대 중국인들 역시 자기들이 사는 지역이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중화사상’의 ‘지리적’ 배경이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성현’이다. 그럼 이 돌도 ‘자연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반드시 ‘자연물’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대의 어느 부족이 자기 마을 한가운데 원을 그려 놓고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다면, 그것 역시 성현이다(위 오른쪽 그림). 여기에 무슨 ‘자연물’이 있는가? 그냥 원을 그려 놓고 그곳이 ‘성현’이라고 ‘믿을 뿐’이다. 우리 역사에서 삼한 시대의 ‘소도(蘇塗)’ 역시 성현된 장소다. 그 안에 어떤 상징물 같은 것이 있었을 수는 있지만, 그냥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장소 전체가 ‘성현’이라고 ‘믿은 것’이다.
‘오지GO’에서 세 명의 남자는 울타리 안에 한 발을 디뎠을 뿐, 어떤 사물이나 자연물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 부족에게는 울타리로 둘러싸인 그 장소 전체가 ‘성현’인 것이다(물론 세 명의 연예인에게는 그 장소가 성현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 ⑤번 선지가 마치 성현은 ‘자연물’에만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오류다.
심지어 인간 역시 성현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에게는 성령(聖靈)이 2천 년 전 ‘역사적인 예수(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실제로 나타난 예수)’의 신체에 나타난 것이라고 ‘믿어진다’(‘삼위일체론’). 이것 역시 ‘성현’이다. 우리는 ‘인간의 신체’를 ‘자연물’이라고 하지 않는다.
2. 모든 자연물이 ‘성현’인 것도 아니다
성현은 ‘자연물’에도 나타난다고 ‘믿어질 뿐’, 모든 자연물이 성현인 것도 아니다.
‘성현된 돌’, ‘성현되지 않은 돌’이라고 한 것은 내가 자의적으로 그렇게 붙인 것이다. 산에 있는 바위나 돌을 가져와서 그 돌이 성현되었다고 마을 사람들이 믿으면 성현된 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현되지 않은 돌이 되는 것이다.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는 그 자체로 예전에는 ‘성현된 돌’로 믿어졌지만, 오늘날 그것을 성현으로 믿는 사람은 ‘드물다’(여전히 성현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자연물’이 성현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더욱이 예전에는 성현되었다고 믿어졌던 것이 오늘날에는 그렇게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성(聖)이 속(俗)이 될 수 있고, 그 역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든 자연물은 성(聖)이 될 수 있다(그래서 인간의 배설물도 聖이 될 수 있다)’고 하면 맞지만, ‘모든 자연물이 성(聖)이다’ 혹은 ‘모든 자연물이 성현이다’라고 하면 틀린다. 그러므로 마치 ‘모든 자연물에 성(聖)이 드러나는 것처럼’ 서술한 ⑤번 선지는 오류다.
3. 그 외 문제
⑤번 선지를 다시 써보자.
⑤ 인간이 성(聖)을 알 수 있는 것은 자연물에 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서 ‘생각한다’, ‘믿는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성현’이라는 것은 실제 성(聖)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성현’이라는 현상이 정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하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성(聖)이 어떤 사물이나 그 밖의 사태를 통해 드러난다고 고대인들(종교적 인간들)이 ‘믿는 것(생각하는 것, 의식하는 것,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⑤번 선지는 ‘인간이 성(聖)을 알 수 있는 것은 자연물에 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라고 함으로써, 마치 성(聖)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을 인간이 귀납적으로(경험을 통해) 인식(발견)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 ‘인간이 성현을 체험한다’는 식의 표현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끌어다 쓴 듯하다. 과연 평가원 출제자들이 “성과 속”을 다 읽기는 했을까? 읽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정확하게 이해는 했을까?
더욱이 ‘체험한다’는 것은, 성현에서 무슨 기적 같은 것을 체험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현된) 대상을 통해, 성현을 ‘체험했다’고 ‘믿어진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러므로 ③번 선지(‘인간은 체험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서 성(聖)을 만나게 된다’) 역시 약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제시문에서 도출되지 않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 제시문에서는 ‘한 그루 나무’에 성현되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나무는 ‘자연물’이다). 그런데 문두는 ‘사상가의 입장’을 묻고 있다. ‘제시문에서 도출하라’는 뜻이 아니다. 실제 윤리 과목(생윤, 윤사) 수능 기출의 문두는 하나같이 ‘사상가의 입장 또는 주장’을 묻는 것이지, ‘제시문에서 도출하라’는 식의 문두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문두에서 ‘사상가의 입장’을 묻는 취지는, 제시문에서 도출되는 것은 그렇게 도출하고, 도출되지 않는 것은 ‘선(先)지식(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여 정답을 고르라는 뜻이다. 윤리 과목의 문제는 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시문에서 도출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은 근거가 없다. 즉, ‘제시문에서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선지가 ‘사상가의 입장 또는 주장’에 부합하지 않으면, 오류다.
4. 오류가 아니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했으면 아무 이상이 없었다.
⑤ 인간이 성(聖)을 알 수 있는 것은 자연물에 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 ⑤ 인간은 자연물을 통한 성현에 의해서도 성(聖)을 인식(의식)할 수 있다.
나는 작년 수능 당시 이의제기 기간 안에 이 선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른 여러 문제 있는 선지들과 함께 ‘약간의 코멘트’를 달아서 평가원 게시판에 올리기는 했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3학년에서 윤사 과목만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문제가 매우 쉽기도 했지만, 어쨌든 내가 가르친 학생들 모두 만점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더욱이 신기하게도 나와 함께 윤사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생윤을 응시한 학생들은 하나같이 생윤 점수도 좋았다. 즉, 48점 또는 만점이었다. 생윤을 응시하되 나와 함께 윤사를 준비하지 않은 학생들의 생윤 점수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니 더더욱 강력한 이의제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둘째, 출판을 계획하고 있어서 출판 교재에서 다 설명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 힘을 빼고 싶지도 않았다(어차피 출판할 거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리 베낄 기회를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 교재가 출판된다면, 엘리아데의 ‘성현’ 개념 하나만 놓고도, 위에서 설명한 것 이외의 내용도 당연히 추가될 것이다.
첫댓글 중요한 부분은 아니겠지만, "인간의 신체"는 자연물이지 않나요? 물론 자연물 여부를 규정하기 전에 '자연' 개념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지부터가 선결과제이긴 하겠지만, 보통은 우리의 신체 그 자체는 자연물이라고 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부분에 있어서 엘리아데가 특별히 규정한 대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엘리아데는 '성현의 사례'로 '자연물, 신체 등'을 들고 있죠. 신체를 자연물 개념에 포함했다면, 병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것을 떠나서라도, 어떤 우주관을 갖고 있든, 인간의 신체는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물'이라고 할 수 있죠. 만일 애니미즘이라면 정령이 깃들어 있는 자연물일 테고, 기계론이라면 단순한 물질로서의 자연물이겠죠.
그런데 우리가 '자연물'이라고 하면, 거기에 인간의 신체는 제외하고 거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로 얘기한 겁니다.
제시문에서 도출되든 말든 내용 자체가 사상가의 입장에 맞아야 한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류를 오류로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당연한 상식에 대해서도 입아프게 설명을 해야 하는 낭비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수능에서 '옳은 지식'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건, 예전 세계지리 사태 때 대법원 판결문에서도 관련 언급이 있었죠. 그럼 오류 여부를 판정할 때에 '옳은 지식'을 도외시하려는 사람들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는 셈이 되겠죠. 나중에 평가원 측이나 기타 이해관계 가진 사람들이 억지를 부리면 저는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출제 들어갔을 때 자주 경험한 건데, 일단 출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 각 교과에서 두어 문항을 전 영역(국어, 영어, 사과탐 등)의 출제 및 검토진이 모인 데서 토론에 부칩니다. 그럼 주로 언어(영어, 국어) 쪽에서, 지금 정답이라고 밝힌 그 선지가 '제시문에서 도출되느냐' 하고 묻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시문에 선지 관련 내용이 없으니까 그렇게 묻는 거거든요.
그럼 우리 윤리 쪽 답변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 윤리에서는 先지식도 묻는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윤리 수능 출제의 관행이다). 그럼 이분들이 바로 이해를 합니다.
평가원은 그것이 원칙이라는 걸 알지만, 그걸 모르는 대중(인강강사, 교사, 학생들)은
제시문에서 도출되기만 하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대중이 그렇게 생각해주면, 평가원은 '땡큐'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