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성경적 실천의 현장과 클레로스(281) – 사도들의 실천과 클레로스(260) – 고린도전서 강론(4)
고린도전서 강론(4) – 3장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고린도 형제들이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고린도 형제들의 수준 (3:1-15)
고린도 형제들은 종교인들의 수준은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평가이다.(1:4-7) 그러나 우리가 장성한 사람들끼리는 깊은 지혜를 논하지만 고린도 형제들은 아직 그런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2:6)
고린도 형제들이 사도 바울에게 했던 질문을 우리가 생각해보면, “당신은 사도이면서 아볼로보다 깊이가 없는 말을 하는데 왜 그런 것인가?” 라는 질문이거나, 또는 “아볼로의 양육과 당신의 양육 중 어느 쪽이 하나님의 뜻에 더 맞는가?” 라는 질문으로 추론할 수 있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3장부터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에게, 나는 영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듯 그대들에게 말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 즉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듯 그대들에게 말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형제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아직 영에 속하지 못한 어린 클레로노모스 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소망하고 있지만 아직 성령의 열매는 맺히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1:4-7) 형제들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없다.
갈라디아 형제들과 비교하면 갈라디아 형제들은 눈이라도 빼주고 싶은 새 마음이 온 형제들인데, 고린도 형제들은 아직 어린 형제들이기 때문에 깊은 진리를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지 않은 것은 그대들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아직도 육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 안에 시기와 다툼과 불화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고린도 형제들에게 아직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시기와 다툼과 불화는 정상적인 모든 인간의 특징인 것이다. 정상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바울 쪽이다 아볼로 쪽이다 하고 당이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육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와 아볼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이며, 주님께서는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양육하라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대었으나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심는 사람과 물을 대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생명체로 성장시키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한 일이나 아볼로가 한 일이나 역할이 좀 다를 뿐이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이며 각자 수고한 대로 자기의 삯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교하면서 궁금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들을 하나님의 농장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성장시키는데 우리는 동역자로 힘을 보태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양육을 잘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누구도 이미 만들어진 것 외에 다른 터를 닦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집이 지어지는 터가 그리스도 이신 예수라고 설명하고 있다.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집으로 집을 지으면 장차 각 사람이 행한 일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그것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날은 불로써 나타나고 그 불은 각 사람이 행한 일이 어떤 것인지를 검증해 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집을 지은 어떤 사람이 행한 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삯을 받게 될 것이고 (즉 품삯을 받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천국에서도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상급이 아니다. 천국에서 받게 되는 유일한 선물은 하나 된 형제 자매들이며 다른 상급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직 신학에는 상급론이 없는 것이다. 하나된 형제자매들로 인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행한 일이 불타버리면 손실이 손실을 보게 될 것인데 그 자신은 구원될 것이나 마치 불 속에서 헤치고 살아나오듯 구원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의미는 양육한 형제들이 진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삯을 받게 될 것이고, 양육한 형제자매들이 좋은 진주가 아니었다면 헛수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노력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순결한 마음은 인정받게 되고 자신은 간신히 구원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성소인 고린도 형제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들인가를 설명하는 사도 바울 (3:16-23)
사도 바울은 그대들이 하나님의 성소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대들 안에 거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느냐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성소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깨닫고 믿어지지만 아직 진리의 사람들이 되지는 못한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옛 언약은 진리를 보여주지만 새로운 창조는 없다. 그러나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심어 버리시는 것으로서 진리의 사람들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론으로만 알고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 된 존재로 아직 바뀌지는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대들이 이 세대 안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불합리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의 충돌이 아니라 이치와 이치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치가 서로 다른 것이다. 즉 세상 이치와는 결별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 이치를 기준으로 해서 지혜롭다고 스스로 평가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치에는 안 맞는 것이다. 각자도생하는 자들이 만든 세상 이치에서 윤리 도덕이나 정치, 경제, 예술이 나왔다면 하나님의 이치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앞에 불합리한 것인데 그것은 공멸을 피하기 위해 만든 잔꾀이며 그것이 결국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며 결과는 파멸이 되는 것이다.
또 주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이 헛된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윤리 도덕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종교 등은 경쟁이 전제된 생지옥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잔꾀이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대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누구든지 사람에 대해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대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같은 양육하는 자들인 바울이든 아볼로든 게바든 세상이든 삶이든 죽음이든 다가온 것이든 다가올 것이든 모두가 그대들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형제 자매들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이 알 것을 다 알고도 변화가 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간구를 촉구하는 것이다.
P.S : 프뉴마티코스는 1) 성령(프뉴마)의 인도를 받는 사람 또는 2) 새 영을 받은 사람 또는 3) 신의 성품을 따라 사는 사람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음. 싸르키코스는 싸르크스, 즉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킴
**우리에게 명확해져야 하는 것 : 프뉴마(영)와 프쉬케(목숨)와 싸르크스(육체)와 까르디아(마음)과 누스(사고, 생각) 의 상관 관계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정진호 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