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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20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
시 5:4~12
〈 하나님의 기름부음 〉
한국은 목하 노벨문학상의 계절입니다.
그 누구도 거센 물결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작품이 엿새만에 100만부가 팔렸습니다.
반만년 역사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한강이 어떤 사람이길래 노벨문학상을 받았을까?”하고 궁금증을 풀어나갑니다.
아버지가 한국 문단 중진인 한승원 씨입니다.
작가 한강은 뿌리 깊은 문학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입을 모읍니다. “그러면 그렇지! 떡잎부터 남달랐구만!”
온고을교회가 마침 시편을 텍스트로 주일 설교를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의 시편은 모두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50편 중에서 73편이 다윗의 저작입니다.
그래서 흔히 “다윗의 시편”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은 어떤 인물이기에 시편의 절반을 쓸 수 있었을까?” 궁금해집니다.
다윗이 열 다섯 살 때쯤, 그의 인생행로를 결정짓는 큰 경험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있는 다윗의 집안을 찾아왔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와 인사를 나눈 다음, 아들들을 만나보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장남부터 차례로 불러 사무엘 앞에 세웁니다.
모두 일곱 명의 아들이 하나하나 사무엘 앞에서 인사를 올립니다.
하나같이 훤칠하고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아들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저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발간하면서 붙인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추대할 때 거치는 행사입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하는 거룩한 일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둥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 다윗이 열 다섯 살 무렵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 하나님의 영 〉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다윗은 이때부터 ‘여호와의 영’ 즉,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인생” 다윗의 인생입니다. 할렐루야~
다윗이 부럽습니다.
자의식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소년기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다윗의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 받은 이후 사울 왕의 부름을 받습니다.
사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사울을 떠나자 사울은 심한 편두통에 시달립니다.
이때 음악치료가 나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측근에 두고 수시로 불러서 수금을 타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다윗과 골리앗” 하면 세상이 다 압니다.
다윗은 이 사건 이후 온 국민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가 함께 닥칩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삼상 18:7)
현직 왕은 천천급, 소년 다윗은 만만급! 인기가 비교가 안 됩니다.
위기를 느낀 사울 왕은 이때부터 다윗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다윗의 인생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쫓겨다닐 때만해도 다윗은 실족하는 일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충실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왔어도 인내했습니다.
다윗이 숨어든 암굴 속으로 사울 왕이 용변을 보려고 기어들어왔습니다.
앉아서 끙끙 거리는 임금 사울, 맘만 먹으면 단칼에 제거하고도 남습니다.
이때 다윗은 왕의 옷자락을 베어냅니다. 죽일 수 있음에도 살려준다는 증표입니다.
왜 살려줍니까?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내가 처단할 수 없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위기가 지나고 평온한 시기에, 다윗은 실족합니다.
사울이 전쟁에서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실족합니다.
☞ 힘든 시기는 잘 넘겼는데, 왕위에 오른 후에 탈선을 합니다.
〈 위기와 호기 〉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나고, 이스라엘 백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으로서 잘 다스리면 됩니다.
다윗은 성령에 충실하다가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을 때, 성령을 거역합니다.
☞ 밧세바 겁탈 사건이 터집니다.
밧세바는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왕궁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밧세바는 우리아와 혼인하여 한참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남편 우리아는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합니다.
남편이 전장에 나가고 없는 사이 밧세바는 왕 다윗의 부름을 받고 정조를 잃게됩니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제가 쓴 책 [밧세바의 미투]가 있습니다.
왕으로서 선량한 국민인 밧세바를 취하고, 나아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까지 죽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행동한 것에 대하여 우리가 짚어볼 것은 다윗이 “성령에 충실했는가?”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동이 성령에 따른 것인가? ~ 그럴 리 없습니다.
성령께서 다윗을 충동하여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도록 할 리 없습니다.
소년시절 당대 최고 지도자 사무엘 선지자의 직접 기름부음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뜨리고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된 이후 다윗은 해서는 아니될 행동을 합니다.
☞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지만, 악령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신약시대인 지금도 똑같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예수 믿기로 결단했지만, 우리는 악한 영에게 휘둘릴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이후에 성령 아닌 악령에 휘둘립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인 이후 선지자 ‘나단’이 그를 찾아갔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왕인 다윗 앞에서 목숨을 내놓고 ‘성령의 말씀’을 전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충심어린 경고에 그 당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 의인 vs 악인 〉
다윗이 성령에 충만하여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다윗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 의인입니다.
그러나 왕이 된 이후에 밧세바를 강제로 취하고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이렇게 행동할 때의 다윗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 악인입니다.
시편에는 ‘의인’ ‘악인’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어나 죽을때까지 의인으로 사는 자가 없고, 악인으로만 사는 자도 없습니다.
단지, 의를 행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는 그래서 “행악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5절)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다윗도 선을 행하기도 했고, 악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의인도, 평생 악인도 없습니다. 의를 행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 의인 악인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나옵니다.
그러면, 의인은 누구이고 악인은 누군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성경에서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부인하는 자입니다.
시 10:3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의인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있다”라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도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 다윗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성도도 언제나 악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스스로 경계합니다.
자기를 성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 합니다.
(8절)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소서 〉
“~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
이 말씀을 그대로 오늘 설교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성령에서 떠나 악령에 휘둘렸던 뼈아픈 경험을 잊지 않았습니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성적충동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밧세바를 불러다가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이러한 죄의 경험을 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다시는 그러한 죄악에 빠지지 않으려고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시로 적었습니다. 다윗의 시는 성경의 시편이 되었습니다.
그 시를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 마땅합니다.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마땅합니다.
다윗의 시편이 우리의 시편이 되어 마땅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내 악을 행하는 자, 행악자로 전락합니다.
_ 교만이 잠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뛰쳐나옵니다.(5절)
_ 거짓말이 내 입에서 나옵니다.(6절)
_ 속이는 자가 됩니다.(6절)
_ 아첨하는 자가 됩니다.(9절)
다윗은 6절에서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라는 표현도 썼습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 살인을 의미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다윗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다보니 사람의 목숨을 앗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살인한 죄과가 있습니다. “피 흘리기”를 즐겼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 이 구절은 다윗이 처한 실존이고, 한편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 시편은 시로 읽자 〉
다윗의 시편은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나는 언제나 선하고, 언제나 의인이라고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연약하므로 때로 악한 영의 궤계에 빠져 악을 행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굳이 숨기지 않습니다.
다윗 자신도, 교만, 거짓말, 속임수, 아첨을 합니다. 피 흘리기를 즐겨 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시를 읽을 때는 다윗은 의인, 주변 사람들은 악인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다윗의 시에는 중의적 의미, 중첩적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8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했습니다.
‘내가 원수들 틈바구니에 있으므로 거기서 나를 꺼내어주십시오’가 아닙니다.
나도 한때 그들과 동류였습니다.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이렇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벗어나 의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오직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일 때는 “주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로 그리했습니다.
다윗은 “나의 의”로 행동할 때 교만, 거짓말, 속임수, 아첨,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나의 의로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음을 뼛속깊이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시로 적었습니다.
자기의 시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드러냈습니다.
세상 사람들아, 자기의 의로 살면 나처럼 죄인이 된다.
세상 사람들아, 자기의 의로 살지 말고 ‘주의 의’ 하나님의 의로 살자!
오늘도 눈을 뜨자마자 내가 찾은 것은 ‘나의 의’였습니다.
믿는 자의 아침기도는 무엇입니까?
“‘나의 의’ 내려놓고, ‘주의 의’를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아침기도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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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늘 악에 노출된 자신의 기도
주여 저를 의의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