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정애경
부산 출생
부산대학교 간호학과, 동대학원 석사
2017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2018년 《시조시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2020년 강원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2025년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시조집 『오늘을 배우한다』, 『달팽이의 주문』
E-mail : maygreen0502@hanmail.net
시인의 말
달팽이 한 마리
느릿느릿 길을 나선다
나선형
푸른 집을 빠져나와
마침내
떠나는 여행
자갈길, 가시밭길
맨몸으로 밀고 가는
바싹 마른 마음
시조비 반짝 내려
흠뻑 젖게 하리라 믿으며
2025년 여름 몰운대에서
정애경
만월
한나절 쭈그려서 아들이 업어온 달
줌 렌즈 들이대니 울퉁불퉁 검은 얼룩
말갛게 빛나는 얼굴 속없이도 살았다
저 많은 얼룩무늬 저를 키운 흔적인 줄
그 피로 지은 아들 언제 벌써 읽었는지
역만년 먼 먼 거리도 순식간에 당겨지고
세상의 어둠조차 온몸으로 받아내던
여물고 그득하여 이제 이울 일만 남은
새달이 차오르도록 제 몸 짜는 보름달
수평선
아린 속이 더 푸르다
숨 머금은 하늘 바다
제 가끔 멀리 뛰다
발끝 한 뼘 잘린 채로
긴 호흡 맞닿은 그곳
저 모르게 물든 음색
내 안에 돋는 물결
보듬으며 스민 구름
손톱은 닳아지고
날개는 찢기어도
경계를 아우르는 읍
푸른 현을 긁는다
달팽이의 주문
비 온 뒤 맨몸으로 나선 길이 움츠린다
잃었던 소리 찾아 뒤척이는 젖은 풀숲
-동글게 말아 가두던 속울음도 다 녹고
꽃 피는 부신 햇살에 점액질 말라가는
야윈 몸 흙 밖은 채 온몸으로 숨을 쉰다
고통이 커져갈수록 피어나는 나의 시
펄랑못*
들끓어 나아올 적 차마 잊지 못했었다
시리던 바닷물도 갈라놓지 못한 사이
한 치 앞 못을 이루어 한라산을 담아낼 때
밀물 따라 몸에 배던 짠 내 가득 소금기
썰물로 빼내면서 키 높이 맞출 동안
부풀어 둥글던 몸은 초승달로 여위었다
어룽진 물무늬는 바람인지 파랑인지
울컥대는 눈언저리 번져가는 꺼먹 구름
앞섶도 내내 들썩인다 펄렁펄랑 펄랑못
*비양도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염습지
단란한 식사
전어구이 올려두고 마주 앉은 식탁 위
앞 접시에 덜어낼 살 먼저 먹는 여자 건너 가시 먼저 발라내고 살을 나중 먹는 남자 뼈 먼저 살 먼저가 무어 그리 옳고 그르 고소한 전어 맛 두고 찌르는 꼬롬한 말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지 주고받는 말 속에 숨어있는 많은 뼈 몸 전체에 박혀서 수시로 따끔따끔 찔러대는 가시 박은 조명 따스한 식탁 아래 단란한 식사
그 몸에 가시투성이 전어가 살고 있다
고통의 성소聖所를 시라 하자
신 상 조 | 문학평론가
앤드루 포터의 소설에서 '구멍'('The Hole')은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화자의 마음속 가장 깊고 어두운 상처이자 잊히지 않는 기억을 상징한다. 소설의 화자는 12년 전, 친구인 '탈 워커'가 화자의 집 차고 진입로 끝에 있던 '구멍'에 빠져 죽은 사건을 잊지 못한다. 이 구멍은 당시 키 180cm가 넘는 도마뱀 가족이 산다고 믿었던 곳이고, '탈'을 죽기 한 시간 전 아르바이트로 구멍 주변의 잔디를 깎고 있었다. 소설은 '탈'의 죽음이 고의는 아니나 화자의 탓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하고 하루 이틀 지난 일보다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다."라는 화자 화자의 고백은, 죄책감과 후회라는 보편적인 인간 감정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화자의 기억 속에서 '구멍'은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감, 그리고 그 사건이 남긴 관계의 공백과 그림자를 보여주는 끝 모를 깊이의 캄캄한 어둠이다.
정애경의 시를 읽으며 포터의 소설을 떠올린다. 포터 소설의 '구멍'처럼, 시인의 시 역시 어두운 기억과 그로 인한 상처를 환기하는 '우물'이라는 상징적 공간을 품고 있어서다. 포터 소설의 화자가 친구를 구멍으로부터 꺼냄으로써 악몽과 같은 기억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정애경의 시는 상처의 근원인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야 하는 역설에 문학적 근거가 있다. 시인에게 기억에 대한 글쓰기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우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깊이의 우물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애경의 시는 상처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역설에 문학적 근거를 둔다. 시인에게 시는 어떤 상처의 흔적이자 그것의 다른 얼굴을 절실하게 표현해내려는 의지의 반복이다. 따라서 그의 시는 아픔과 설움으로 가득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초월하는 승화의 방식이 또한 시이기도 하다. 내면의 풍경에서 비롯한 감정의 정화로부터 고통의 체현으로, 체현된 감각을 의식화하여 그 초월적 효과를 모두가 노래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는 시를 쓴다. 요약하자면 정애경의 시는 고통을 편애한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몫으로, "저 홀로 제보폭 찾아 길을 나선 푸른 몸짓"('미운 오리새끼')을 긍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