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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고 사모하는 영혼
성경본문 : 시편 107: 1-9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찌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3.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찌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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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7편부터는 제5권이 시작된다. 5권의 시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자비와, 놀라운 일들을 노래하는 내용이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역경 중에서, 광야에서, 감옥에서, 병에서, 바다의 풍랑에서, 구원해 주신 일들을, 하나씩 열거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상기시키고, 하나님께 찬양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악을 행할 때는, 징계를 내려 연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롭기에, 회개하고 부르짖기만 하면, 즉시 구원해 주신다. 백성들이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주의를 기울이고, 감사하라고 했다.
1. 여호와께 감사하라(1-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 백성들에게, 제사장은 예배하면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외친다(호두 라아도나이).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외침으로 제5권은 시작하는데, 이 말씀이, 5권의 총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그의 말을 받아서, 화답하였다.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이로다.’(키 토브 키 레올람 하쓰도)했다. ‘인자하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긍휼히 여김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할 때만이 아니다. 거역하고, 이방의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항상 인자하게 대해 주었다. 감사가 없는 구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정한 구원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할 때 완성된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로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하게 해야 한다.
다시 제사장은, 회중을 향해 외친다. “여호와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속량을 받은 자’는, 죄로 인해 바벨론에 포로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죄의 속박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제사장의 말에 대해, 회중들도 또 화답한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하나님은 대적에 의해 흩어졌던 이스라엘을,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한 대로 속량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해주셨다.
또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과 성을 건축한 일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일들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모독하는 일이다.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은, 그 모든 구원이 여호와의 손에서 난 일임을 고백해야 한다.
무리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동서남북에서 불러 모으셨다.’ 고백했다. 동쪽은 바벨론과 앗수르를 의미하며, 서쪽(바다쪽)은 유럽, 남쪽은 애굽, 북쪽은 아람쪽을 의미한다. 죄로 인해,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동서남북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 모았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이러한 일들이 여호와에서 났음을 고백하고,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을 이야기한다.
(4-7) “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흩어진 무리들 중에는, 광야와 사막을 건너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행해 오는 길에 큰 어려움을 만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성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굶주리며 목이 말라, 영혼이 실신하여 기절할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며,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의 모습이다.
광야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근심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방황하는 인생들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다. 하나님은 방황하며 부르짖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고통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여, 고통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주할 성으로 인도했다.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 거주할 영원한 성으로 인도했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여기서 기적(팔라)은, 기이한 일, 경이로운 일을 말한다.
광야 사막 길에서, 백성들을 구원한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다. 극한 곤경에서 빠져서 기도하며,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을 감사하며 찬송함이 마땅하다.
2. 사모하는 영혼이 되자(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사모하는’(솨카크)는 ‘뛰어 다니다. 찾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다.
사슴이 물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다.
사슴이 물 냄새를 맡으며, 뛰어다닌다가 결국 물을 찾게 되고, 그 결과 만족함으로 채워지는 모습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때,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께 나올 때 만족하게 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은혜’는 준비된 그릇대로, 채움을 받는다. 이것이 영적원리다. 준비된 그릇이 없으면, 은혜도 없다. 주어져도 그것을, 은혜로 받지 못한다. (왕하4장)에는, 어느 날 엘리사 선지자에게, 제자들 중의 한 부인이 찾아왔다. 이 부인은 선지자인 남편이 죽자,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지 못해, 빚 준 사람이, 두 아들을 노예로 데려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이 여인이,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다. 그때 엘리사가 묻는다. (왕하4:2中)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고 한다. 그 여인은,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그녀에게, (4:3) “너는 밖에 나가서,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라.” 했다. 명령에 순종한 여인은, 두 아들과 함께 빌릴 수 있는 만큼, 빈 그릇들을 빌려 왔다. 놀랍게도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붓는데, 빌려온 그릇이 다 채워지자, 기름이 그쳤다.
이 여인이 빌려온 ‘그릇의 숫자’는, 그 여인의 신용이고, 그 여인의 ‘믿음의 분량’이다. 그녀가 주변사람들에게 신용이 없었다면, 그릇을 빌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신용과 믿음의 크기다. 그녀가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믿었다면, 그 믿음만큼 빌렸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가 준비한 만큼, 채워주는 분이다. 우리는 은혜를 담을, 빈 그릇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 그릇만큼 하나님이, 은혜를 채워 주신다. 그렇다면 그 빈 그릇은 무엇인가? 사모하는 마음이다. 사모함이 크면 클수록, 은혜를 많이 받게 된다.
반대로 사모함이 없으면, 아무리 큰 은혜를 주려고 해도,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임하기를 소원하는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기를 바란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주님은 만족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그러면 왜 민족 함이 없는가?
사모하는 것이, 신령한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사모하고, 부귀영화, 명예와 권세를 사모하기에,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채워지지 않는다. 만족하기 원하면 (골3:1-2) 말씀처럼, 위의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의 것, 즉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한다. 거기는 주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다. 무슨 말인가?
거기만이 영원한 곳이고, 거기만이 우리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거기 그곳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주린 영혼’도 마찬가지다. 사모하는 영혼이나, 주린 영혼은 같은 것이다. 그래야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주려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만족함을 주시고, 그런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 보셨나요?
옛날에는 그런 분들이 많았다.
일제 때 그랬다.
6.25 전쟁 때 그랬다.
배고픔의 고통과 어려움은, 세상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 육신의 목마름, 육신의 굶주림은 정말 비참하다.
그렇지만 영적인 목마름,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복이 된다.
목마름이 있고, 배고픔이 있다는 말은, 은혜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목이 마른데, 목마름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굶주려 있는데, 배고픔을 느끼고 못함이 문제다. 느끼지 못하니까, 대책이 없다. 느끼지 못하니까, 결국에는 영혼이 죽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목마름이 없었다. 배고픔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사단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영적 갈급함을 느끼며 부르짖으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셨다.
우리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며(마5:3), ‘의에 굶주린 영혼’을, 의로 배부르게(6)한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3. 받은 은혜를 잊지 말자(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에게 주시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과, 주린 영혼에게, 반드시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데, 속히 그 은혜를 잊어버림이 문제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히 잊어 버렸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더 편하다고, 돌아가자고 여러 차례 원망하고 불평했다. 참 안타까운 백성들이었다.
눈으로 홍해가 갈라진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고,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잊어버리면, 교만해진다. 내 손으로, 내 능으로 얻었다고, 교만해진다.
그래서 (신8:17-18)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경고했다.
우리는 무엇을 잊고 사는가?
내 과거에 모습을 잊고 산다.
옛말 올챙이 시절의 모습을 잊지 말자.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던 시절, 정말 대책 없던 우리였는데, 하나님이 세워주고, 복을 주셔서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
또 과거에 주신, 놀라운 은혜를 너무 쉽게 잊고 산다.
병들어 죽음이 찾아 왔을 때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런데 그때 그 마음, 그 약속들은 다 잊어버렸다. 자식이 병들어 사경을 헤맬 때, 한번만 살려달라며 울 때,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듣고 살려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은혜를 다 잊었다.
사업이 부도직전에 몰려, 다 날아가려 할 때, 하나님의 기적 같은 은혜로 회복되었는데, 그때 주신 은혜도 다 잊고, 마치 내 능력으로 해결했던 것처럼, 건방을 떨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이 은혜를 잊으면, 배은망덕 소리를 듣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겠는가?
미국 신문에 실린, 기사다. 미국의 광고회사 중역인 해리스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식당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행색이 초라한 한 남자가 ‘한 푼만 달라.’며, 구걸을 했다. 그는 노숙자였고 거지였다.
그런데 해리스는, 마침 지갑에 현금이 없었다. 주고 싶어도,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그냥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자기 지갑에 있는 신용카드를 꺼내주었다. ‘나 당신 믿어도 돼요?’ 그러자 그 거지가 고개를 끄덕여서, 카드를 빌려주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말렸다.
‘야 너,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난리였다. 그 노숙자는, 그 카드를 가지고 갔다. 잠시 후, 그는 카드를 가지고 돌아왔다. “죄송하다. 좀 많이 썼다. 미안하고, 감사해요.” 그러면서 카드와 영수증을 주었다.
구입한 품목을 보니까 ‘냄새 제거제, 목욕 세제, 담배 한 갑, 생수 한 병’ 총 25달러를 썼다.
그가 카드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거지도 믿어주었더니, 배신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노숙자 거지는, 그 카드 사건으로, 거지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음이,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이 사람을 살린 것이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신뢰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한다.
“내가 너를 믿어도 되냐?”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답하겠는가?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한다.
그래서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고, 독생자 예수님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 주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믿어주신 그 하나님께, 어떻게 하고 사는가?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정말, 끔찍한 비극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속고, 또 속으면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사랑이 우리 눈에, 안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우리는 영적 세계를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보아야 하고, 알아야 하는 영적인 것들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밀하게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에 필요한 것까지, 지금 다 준비하고 계신다.
그러니 지금이 다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이 다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눈앞에 전개되는 일 만이, 다라고 보지 말라.
하나님은 만사를 주관하되, 당신의 백성들을 특별히 보호하며, 운행하는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와, 헤맬 때 하나님이 어떻게 했는가?
이와 동일하게 우리도, 고통에서 건지고, 바른길로 인도하고,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행한다.
2016년도는 더욱 감사하는 자가 되자.
사모하는 영혼과, 주린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아, 성도들이 되어,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하나님의 인자하심
시편 107:1~16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여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노래하며 간구 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드릴 소재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적인 선하심, 그 인자하심을 찬송하게 될 때 감사드릴 수 있는 조건을 넘치도록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십니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세상 모든 사람 중에서 하나님이 선하시며 그의 자비가 영원하다는 것을 말해야 할 가장 큰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동서남북 사방으로부터 모아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은 현세적인 구원을 의미한다고 보겠습니다.
본문 6절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하였습니다.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시편 50편 15절에도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환난의 때, 곤고한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입니다.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젠들 가까이 계시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4-5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습니까?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했습니다. 그들은 여행의 피로 때문에 기진맥진하게 되었으며 원기가 모자라 쓰러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은 주리고 목마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잘 모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사막에서 당한 어려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불쌍한 여행자들의 경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보세요.
6-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같이 읽으십시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행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멸망 직전에 있던 사람들을 놀랍게도 구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약한 자를 고려하시는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잘것없는 사람에게도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생각할 때 정말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비단 하나님의 자녀에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밭에만 비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밭에도 비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총은 누가 입었습니까?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우리들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였습니다.
본문 10-11절을 보십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했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대수롭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아니 하나님의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들이 거역한 죄 때문에 투옥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리라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반역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힘입어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생활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였습니다. 아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지성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에 자기들의 명철을 복종시키기는 커녕 자기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의 고귀하신 뜻이 인간의 보잘것없는 천박한 이론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멸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교리보다는 다른 교리가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회의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 혹은 신비주의자들의 말은 잘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바는 잘 들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훈과 명령, 그리고 약속 같은 것을 내팽개쳐 버리고 자기 자신의 비위에 맞는 것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비판적이고, 회의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그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감사도, 감격도, 사랑도, 기쁨도, 평화도, 찬송도, 확신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갈등에 빠져서 괴롭고, 불안하고, 모두가 미워 보이고, 고민과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행한 사람에게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악인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불안해서 도망칩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쌓아 올리는 요동하는 바다와도 같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어리석음의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지휘함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값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들으세요. 죄를 심은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열매인 사망을 거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을 배반했었고 거역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원수인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하러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감옥에 남아 있던 저주받은 생애였습니다. 도피할 수는 물론 없고 한 가닥의 희망조차도 보이지 않던 우리들이었습니다. 불원간 불려나가 사형 당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고 순간순간 그 심령이 갉아 먹히는 것 같은 뼈아픔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이보다 더 무섭고 저주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는 자기 변명도 거짓말도 소용이 없고 그저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선고하는 법의 공정성에 동의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에게 소망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내리셔서 사망의 자리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붙들려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해방과 더불어 석방을 받게 될 때 저희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했습니다. 정죄받은 사람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은총이 필요합니다. 자신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한량 없으신 은혜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속박되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민과 고통에 싸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마치 쇠와 같이 딱딱하고 차가웠으며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쇠덩이가 우리 영혼에 들어박혔었습니다. 살에 녹이 퍼지면서 피를 오염시켰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이중으로 속박되어 있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음의 고통이 우리를 속박했고, 외부에는 쇳덩이와 같은 환경의 속박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절망적이었습니다.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죄의 종에서 헤어날 길이 전혀 없습니다. “나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탄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우리를 채우고 있는 수갑은 점점 더 죄어들어만 갔습니다. 악에서 벗어나려는 그 몸부림은 우리가 얼마나 죄의 종이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이와 같은 생을 영위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평강을 찾으려 했으나 평강이 없었습니다. 악한 습관에서 벗어나려 애썼으나 벗어날 수가 없고 여전히 그 습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소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세요! “저희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인생이 애통하는 모든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자유를 원하는 우리에게 문을 활짝 열어 주십니다. 저 깊은 구덩이에서 우리를 끌어올려 주십니다. 그래서 생명의 빛을 보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되면, 그의 은혜는 말하자면 망치와 같아서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 버립니다. 주님께서 “그를 풀어 가게 하라” 말씀하시면 마귀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롬 8:1-2)
더구나 우리는 곤비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본문 12절에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함으로 자칫 잘못하면 자고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때때로 어렵게 하십니다. 풍요하면 모든 것이 그렇게 보이므로 결핍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건강을 잃게도 하십니다. 슬픔을 안겨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에는 안식을 찾으려 하나 피곤만 더할 뿐입니다. 애쓰고 수고하나 헛된 수고입니다. 여기저기 집회도 따라다니고 눈물도 흘려 보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보아도 아무런 성과가 없습니다. 수렁에 빠진 사람이 제 힘으로 헤어나려고 애를 쓰며 바둥거릴수록 더욱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수고를 통해서 우리 마음이 낮아지게 하십니다.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십니까? 아직도 이 사랑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고민의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분은 안 계십니까?
1.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후렴 :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2.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들은 체 하려나
3.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돌리며 가리우네
4.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집이 있어
죄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영접해 주시겠네
지체하지 말고 지금 오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 그리고 자유를 주셨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쇠사슬에 묶여 살려고 합니까?
사실 우리는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고 몸부림쳐도 소용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끝장이며, 절망 중에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엎드러졌습니다. 이것은 기진맥진한 상태를 말합니다. 사막 길을 걸어가다가 더 갈 수 없어 쓰러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쓰러진 우리에게 이 놀라운 구원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쓰러진 사람의 발 앞에서 주님이 그를 붙들어 일으키십니다. 주님은 위대한 회복자이십니다. “그는 권세있는 자로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도다” 주께서는 약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더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기만 하면 주 예수께서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는” 무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비참한 사람을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을 때 도와주십니다. 인간의 한계가 있는 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를 도울 자가 없을 때 그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돕는 자가 없었더라” 우리를 돕는 자가 없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자가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길르앗에는 향유도 없고 의사도 없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향유와 약을 구하려고 길르앗보다 더 좋은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절망적 환자에게는 필요한 향유가 하늘로부터 와야 하며 이 땅 위에는 도울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와 같은 처지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13-14절을 보세요.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근심 중에 있을 때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에서 부르짖는 호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르짖음을 기억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그 기도를, 그 부르짖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부르짖으매” 그들이 부르짖을 만한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저 부르짖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낮아져 엎드러졌을 때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멸망하지 아니합니다. 기도는 선한 사람의 표적이 되며, 축복의 표적이 되고, 흑암에 처한 사람에게 소망의 문이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리에 빠지셨습니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맙시다. 좌절하지 마십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가 다 죄에서 자유함을 받았다면 어떻게 우리가 해방되었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죄악의 쇠사슬에 매여서 죽음의 감옥에 갇혀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는데 우리가 그를 의지하기만 하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셨고 우리의 죄를 그의 피로 말갛게 씻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세상에 이 소식처럼 놀랍고 감격스러운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이 진리를 지키다가 순교까지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이 진리는 놓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포로 된 자들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셨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가 흑암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했습니다. 16절에는 “그가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모든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손길이 없는 구원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 생각한 그대로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참여하셔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포로가 된 우리의 영혼을 죄와 사망의 지옥 사슬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홀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죄수들을 해방시키는 그 곳에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포도즙 틀 위를 걸어가실 때 혼자 행하셨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는 사역을 분담할 수 없으며, 그 영광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자비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나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에서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얽은 줄을 끊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과 생명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얽맨 줄을 끊으시고 완전한 자유를 주십니다. 이처럼 구속의 역사를 완성하십니다.
“하나님이시여, 이 시간 이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우리에게 행하시옵소서. 지금 행하시옵소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 주시옵소서.”
더구나 주님은 이 구속의 역사를 영원히 행하십니다.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고 했습니다. 쇠사슬을 끊으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우리가 한때는 놋문과 쇠 빗장으로 감금 당했었으므로 마귀는 언젠가 다시 우리를 그 속으로 몰아넣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놋문을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흑암의 권세도 부서진 문으로는 우리를 가둘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다시 가두려 합니다. 그러나 쇠 빗장이 꺾여져 버렸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씻어 주셨는데 어떻게 다시 정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자유는 영원한 자유입니다. 여러분, 이 자유를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오늘은 구원하고 내일은 속박 당하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자유인이 되게 하시는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0장 28절을 더 읽어 보실까요.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믿습니까?
셋째로,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할 일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요, 자연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가 영광스럽게 승리하셨음이로다 포로된 자를 인도하여 내시고 자기 백성을 자유롭게 하셨도다” 이처럼 해방된 사람들은 자연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 시편 기자가 말하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찬송할지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마음과 힘을 다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완전한 합창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합창을 혼자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자기 혼자서 하나님을 충분히 찬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할렐루야 합창을 솔로로 부르려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이것만 가지고도 부족합니다. 세상 만물이 다 주를 찬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받은 여러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아낌없이 부어 주신 모든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모든 재능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고력과 언변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합시다. 건강과 힘으로 찬양합시다. 우리의 재산으로 찬양합시다. 우리 평생에 주를 찬양할 수 있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