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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미국의 자동차가 최고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미국 차 중 어떤 브랜드는 품질에 있어 높은 순위를 매기기도 하지만 대체로 미국차보다 독일차 혹은 여러 유럽 국가의 자동차, 혹은 일본 자동차가 좋은 차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자동차도 꽤 품질에 있어 좋은 차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미국에 사시는 어떤 분이 “왜 미국자동차는 발전이 없는가?”라는 주제로 미국차 산업이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적은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왜 미국차는 안 좋다는 걸까요? 그건 부유한 미국 때문입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던 시기, 기술이 한창 발전해야 하는 시기에 개발이라는 것을 해 놓고 발전을 못 시킨 거죠. ‘기술력은 있으나 발전은 시키지 않은’ 왜? ‘발전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고장나면 새로 사는 게 더 싸고, 자동차로 이동하는 거리가 멀다보니 편안한 승차감, 멋진 디자인보다는 픽업트럭을 이용해 많은 짐 나르기가 용이해야 하고, 기름값이 워낙 싸다보니 연비를 생각할 이유가 없으니 대부분이 머슬카이고 낭만의 상징이 되고 굳이 발전할 이유가 없으니 자연스레 천천히 도태되기 시작하고 천천히 망하고, 너무 풍족하면 오히려 퇴보한다는 걸 보여준 게 미국 자동차 산업의 현실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경제수준과 기술수준이 뛰어나지만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신앙 성장은 없고 오히려 더 걱정과 불안 염려만 마음에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며 위대한 일을 눈으로 봤으면서도 또 다시 염려와 걱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시는데 이것을 통해 저와 여러분은 정말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 현실의 어려움속에서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갈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속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지 깨닫고 참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면 첫째로, 현실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는 살아가면서 날씨, 기후의 영향을 참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기를 잘 분별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기후관측을 시작하고 별자리와 하늘을 살펴보며 우리의 생활을 예측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날씨변화를 잘 깨닫고 매 순간 기온과 습도 등 기후를 잘 알아야 제대로 생활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기후에 따른 옷차림과 날씨에 따른 상황대처를 잘 해야 합니다. 한 여름철에 겨울옷을 입고 점퍼까지 두툼하게 챙겨서 입고 다니면 사람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열사병에 걸리고 큰 위험을 당할 것입니다. 한 겨울철에 여름철에나 입을 법한 짧은 옷에 내복도 안 입은 티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면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살펴 때에 맞게 옷을 입습니다. 물론 체질에 따라 겨울철이지만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라 조금 얇은 옷을 입기는 해도 한 여름철같이 입지는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날씨, 기온등을 잘 따져서 옷을 입고 다니고 기후와 상황에 따라 옷을 다르게 입을 줄 아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며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에서 우리는 날씨를 분석해 왔고 날씨를 미리 예측하며 옷차림, 주거환경, 음식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기본 생활양식입니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날씨와 기후를 잘 분별해서 때에 맞는 의식주생활을 하는 것이 인간적 지혜, 인간적 지식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날씨를 분별하는 능력을 인정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4, 55절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사람들은 날씨뿐 아니라 천체를 연구하며 앞으로 되어질 일을 예측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지식탐구가 이어졌습니다. 점성술과 우주관측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미 주전 2000년경 이전부터 연구되었고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 탄생 때 동방으로부터 왔던 박사들도 점성술사 혹은 천문학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주전 750년 경 헤시오드라는 인물에 의해 천문학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언급되어 그 뒤로 자연스럽게 하늘과 우주 관측이 이뤄졌습니다. 현대에는 기상과 기후관측을 위해 대기권의 연구도 급격하게 이뤄졌는데 1804년 프랑스의 화학자 게이뤼삭이 수소 풍선을 타고 대류권 상부인 약 7km 높이까지 올라가서 기압, 기온, 습도를 조사하였습니다. 19세기 과학자는 대기권에서 높이가 높아질수록 온도가 계속 내려갈 것이라고 믿었으나 1902년 프랑스 기상학자인 드 보르는 200회 이상의 풍선 관측 결과를 통해 지상으로부터 약 8~12km높이에서는 기온이 더 감소하지 않고 일정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1931년 벨기에 물리학자 피카르는 수소 풍선이 달린 밀폐된 기구를 타고 약 16km 높이까지 도달하여 처음으로 성층권을 탐사하였습니다. 1960년 미국에서 최초의 기상 위성인 타이로스 1호를 발사하는데 지구 주위를 돌면서 기권의 구름을 관측하고, 기온과 기압을 측정하여 지구로 전송하였습니다. 1994년 미국항공우주국의 우주 왕복선 아틀란티스호는 약 300km높이까지 올라가 태양이 지구 대기에 미치는 영향을 관측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지식으로 우리 인간의 육체적, 물리적 때를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실제 생활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을 우리는 제대로 깨달아야 대비도 하고 대처도 하며 위기를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전도서 3장 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최소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물리적 상황, 사회적 환경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자연현상을 연구하며 날씨와 기후을 예측하고 육체적인 형편을 보며 우리 몸의 건강 상태와 물리적인 어려움을 예측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적 상황에 대해 잘 분별하지 못하고 예측하지 못하면 우리는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현실의 육체적, 물리적 상황에 대해 잘 분석하고 판단하며 슬기롭고 지혜롭게 대처하며 모든 현실을 잘 인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면 둘째로, 현실속에 담겨진 시대상황을 분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예수님께서는 당시 신앙인들을 보면서 ‘하늘의 기상현상은 분별하면서 시대상황은 분별하지 못하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간혹 잘못된 예측이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기상상식을 가지면 기술이 발달되지 않는 과거에도 며칠간의 일기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날씨를 예측하는 슈퍼컴퓨터가 있어 기상청사이트에 들어가보면 길게는 약 한 달 정도의 시기동안의 날씨를 예측하고 예보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날씨를 예측하지만 시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느냐?’ 책망하실까요? 최소한 우리는 나라와 사회 분위기를 보면서 수 년정도 후에 어떤 일이 있을 지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나라가 망할 것인지 새로운 나라가 일어나게 될 것인지... 전쟁이나 전염병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휴대전화나 자동차기술이 어떤 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인지.. 우리는 지금 이 시대상황을 잘 살펴보면 앞으로 10년이나 20년 뒤 세상 분위기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는 있는 지식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6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예전에 1997년 우리나라가 IMF구제금융체제에 들어가기 직전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경제가 급격하게 파탄날 것을 예측했습니다. 외환위기가 찾아와 국가부도사태가 생길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여전히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고 아직 외환보유고도 충분하다’라고 평가하며 ‘문제없다’ 말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기업들은 눈코뜰새없이 야근하고 철야하며 공장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경제가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하지만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세계 경제상황속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살펴보는 몇 몇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날씨를 예측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주위만 살피지 않습니다. 기상청에 있는 사람들과 일반인중에서도 기상현상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여름에는 미국 하와이, 혹은 괌근처의 태평양의 해양온도와 기후를 살핍니다. 겨울에는 러시아 시베리아와 몽골지역의 기상도 관심을 두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기후를 살피며 한반도의 몇 일 뒤 기상에 대해 예상하곤 합니다. 동서남북 여러 곳의 구름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이동하는 지 살피면서 다양하게 한반도의 기상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일상생활에 일어나는 일들과 그 사람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눈치를 살피며 사람들의 행위 내면에 있는 의식구조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더 4장 14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있을 때 에스더라는 여인이 페르시아황제 크세르크세스, 성경의 명칭으로 ‘아하수에로’ 왕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참 우연치 않은 기회에 왕비가 되어 각종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비라는 자리는 페르시아의 관습과 법령상 왕에게 함부로 어떤 말과 행동을 먼저 행할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전 왕비였던 와스디도 왕의 명령을 어기고 왕의 통치에 관여했기 때문에 왕비자리에서 폐위가 되었습니다.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에스더 또한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왕에게 나아가 상황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르드개를 통해 왕비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인 것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시대상황을 잘 분별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 섭리가운데 준비된 왕비라는 위치가 유대인학살사건을 준비한 하만의 계략에서 유대인들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내가 다리를 뻗을 상황인지, 내가 다리를 굽힐 상황인 지를 잘 분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판단하고 때를 판단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속의 마음과 여러 가지 정황을 잘 분석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분별력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부추기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분별력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판단하며 우리는 늘 냉정한 분별력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시대를 잘 분별하고 현 시대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제대로 깨달아 정말 이 세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음 세대도 온전하게 잘 대비하여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가려면 셋째로, 영적인 분별력으로 참된 표적을 경험해 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4절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지도자들로서 겉으로는 거룩한 척했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내신 분이 맞다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 전에 수 없이 많은 표적을 보여줬음에도 다시 또 다른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도 믿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부를 때 항상 ‘선생님’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랍비’입니다. 세상에 위대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최고의 스승을 호칭하는 단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특별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 4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전반적 하나님의 평가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보면 하나님을 남편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아내로 비유합니다. 한 남편의 아내는 남편만 생각하고 남편과만 사랑을 나누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한 남편의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남자에게 감정을 빼앗기고 성적인 교감을 나눕니다.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면 이건 범죄입니다. 불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내임에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사랑하고 숭배하였기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의 대상을 신으로 만들고 각종 조형물을 만들어 절하고 복을 비는 행위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하고 음란한 범죄자였습니다. 이런 일은 오늘날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조용기 목사님이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으로 계셨을 때 어느 권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권사님은 “목에 후두암이 생겨 지금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암투병하면서 몸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면 낫겠다”라며 기도부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안수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낫지는 않았겠죠? 그러니 다음 날, 그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 계속 목사님을 찾아와 “목소리도 나아지지 않고 병원에서도 진단이 그대로입니다”라며 목사님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권사님 주님을 믿으셔야 낫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목사님, 병이 고쳐지고 증상이 없어야 믿죠”라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병도 치유되지 않고 계속 쉰 목소리만 나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길 수 있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목사님은 ‘그냥 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권사님께 숙제를 냈습니다. “지금 당장 펜과 공책을 가지고 금식기도원 찾아가 골방기도실에서 계속 기도하면서 ‘주님이 내 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라는 글을 공책에 천 번 써서 다 쓴 공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답니다. 얼마 뒤 그 권사님이 공책을 들고 “목사님, 목사님” 부르며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숙제 다 해서 기뻐서 뛰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 권사님 목소리를 듣고서는 “권사님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쩌렁쩌렁하고 맑습니까?”라고 했더니 권사님이 “그러게요,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맑지?” 그래서 병원을 찾아갔고 담당 의사로부터 실제로 “병이 다 나았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이 역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믿음은 표적을 보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으면 나타는 것, 보여지는 것 그것이 표적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선생님’ 정도로 생각해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노라’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 예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라고 하신 것은 세상 어떤 신비롭고 놀라운 사건보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것이 진짜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적 기적을 표적으로 찾아다니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가장 위대한 기적이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표적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 땅에 있었던 최고의 사건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구약에서 미리 보여주신 상징적 사건입니다. 신약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표적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온전히 깨닫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이 최고의 표적인 것을 알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님이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믿을 때 참 제대로 된 인생이 되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나의 표적을 깨달은 사람만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음을 발견하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속에서 제대로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세상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야 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2절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앞에서 상황판단들을 잘해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혜롭게 대처하며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자연현상과 기후와 날씨를 잘 분별해서 생활하고 시대적인 상황을 잘 분별해서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할 지를 깨닫고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여러 가지로 시대흐름을 잘 분석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 지를 잘 알아내어서 유익한 사람, 무익한 사람을 잘 가려내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시대를 잘 살아가는 제대로 세상 살아가는 지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분별과 분석, 이해보다 더 중요하게 우리가 분별해 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관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영적인 통치를 우리는 잘 캐치해 내야 합니다. 자연의 환경, 사회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운행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1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 지혜는 육적 지식과 지혜를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육체적 지식과 지혜도 가지고 살아가며 시대를 분별하는 능력, 자연현상을 분별하는 능력, 인간의 내면을 잘 발견하고 만져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고등학교, 대학교 등에서 여러학문을 배우며 기초적 생활지식을 배우고 성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 교양지식이나 일반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것에 이 세상의 학문적인 지식, 인간의 지혜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진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주님 영광가운데 저 천국에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영적인 지식으로 영적인 안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 지식과 지혜뿐 아니라 영적인 지혜로 세상 어떤 어려움도 이기며 주님의 날에 저 천국에 들어가는 믿음의 삶을 이 땅에서 살아가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