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태자와 라훌라 존자
싯다르타 태자의 부인은 ‘야소다라’이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라훌라’이다. 그런데 경전마다 기록의 차이가 있는데, 싯다르타 태자에게 여러 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십이유경(十二遊經)』에는 싯다르타 태자의 부인이 셋이었고, 자식을 낳은 여인은 야소다라뿐이었다.『불본행집경』에는 제1궁에 야소다라, 제2궁에 마노다라, 제3궁에 구다미란 여인이 살았다고 한다. 계절에 따라 궁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도 한다. 그 당시 인도의 카필라 왕국은 고대 부족 국가였다. 샤카족은 근친혼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싯다르타의 태자비인 야소다라는 친고모의 딸이다.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 왕의 누이인 아미타는 이웃 나라인 꼴리아족에게 시집을 갔는데, 아미타의 딸이 야소다라이다.
카필라성은 지금 인도가 아닌, 네팔에 있다. 야소다라는 아름답고, 연민의 정이 많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야소다라가 아들을 낳자마자 싯다르타 태자는 출가했다. 한편 자식을 낳자마자 집을 나가버렸으니, 무책임한 가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훗날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는 아버지인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고, 마침내 카필라 왕국은 이웃 나라의 침략에 멸망했다. 우여곡절 끝에 야소다라는 머리를 깎고 불교 승가로 출가했다. 팔리어 경전에는 야소다라가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이 됐다고 하는데, 파란만장한 생애라 할 수 있다.
싯다르타 태자는 야소다라가 아기를 낳자 “라훌라자토(Rahulajato) 반다낭 자땅”이라고 했는데, ‘속박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 소식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손자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는데, 라훌라는 ‘속박’ ‘구속’이란 뜻이다. 싯다르타 태자가 집을 떠나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행자가 된 이유는 카필라성의 동ㆍ남ㆍ서ㆍ북의 네 성문 밖에서 사유한 ‘사문유관(四門遊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서 성문이란 단순한 문(門)이 아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인간이 살면서 겪어야 할 고통을 이 문을 통해 마주했는데, 네 성문을 통해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다.
싯다르타 태자는 주로 성안에서 생활했기에 바깥출입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하루는 카필라성의 동문 밖으로 나갔다가 한 노인을 목격했다. 하얗게 센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 치아는 많이 빠져 있고, 걸음을 옮기는 일조차 힘겨웠다. 처음 본 모습에 싯다르타 태자는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
“늙어서 그렇습니다.”
“누구나 저런 늙음을 겪나? 나도 그런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거기에는 귀한 이와 천한 이의 구별이 없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팽팽한 피부, 풋풋한 젊음, 솟구치는 혈기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누리는 젊음과 건강은 봄과 여름처럼 영원하지 않다. 또 하루는 카필라 성의 남문 밖으로 나갔다가 병든 사람을 보았다. 싯다르타 태자는 시종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런가?”
“누구나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누구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늙는 것도 서글픈데, 병에 걸려 육신의 고통까지 감당해야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또 하루는 카필라 성의 서문 밖으로 나갔다가 장례 행렬을 보았다. 사람들이 시신을 들것에 싣고, 화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죽음에 크게 놀랐다.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게 되는 나의 없어짐은 두렵지만, 피할 수가 없다. 이렇듯 동문과 남문, 그리고 서문에서 삶에 끝이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지신에게 물었다. ‘이런 게 삶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이라면 왜 굳이 피어나야 할까? 저물 수밖에 없는 태양이라면 왜 떠올라야 할까? 무엇을 위해 꽃은 피고, 무엇을 위해 해는 뜨고, 무엇을 위해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 태자는 카필라 성의 북문으로 나갔다가 발우를 들고서 땅만 바라보며 걷고 있는 수행자를 보았다. 당시 인도에는 고행과 요가와 명상을 하는 수행자들이 많았다. 싯다르타 태자는 수행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은 집을 떠나와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마음을 다스려 영원히 번뇌를 끊고자 합니다. 출가는 그걸 위함입니다. 수행자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오직 이치에 따라 살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싯다르타 태자는 가슴이 편안했다. 마치 출구 없이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 창(窓)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싯다르타 태자는 아버지 숫도다나 왕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는데도 반대하자,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제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그럼 저는 출가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런 길은 없다.”
“그렇다면 저는 출가를 하겠습니다.”
어쩌면 싯다르타 태자가 가고자 한 길은 ‘길 없는 길’이었는지 모른다. 태자의 앞에는 그 어떤 발자국이나 이정표가 없었다. 방향 없는 방향을 잡아야 했음에도 출가의 길을 택했다. 출가하던 날은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지 겨우 7일째 되던 밤이었다. 어둠을 뚫고 카필라 성의 동문 밖으로 나갔다. 싯다르타의 출가를 ‘마하비닛카마나(Mahabhinikkhamana)’라고 하는데, ‘위대한 포기’라는 뜻이다. ‘내 삶에서 위대한 포기란 무엇일까?’ 그리고 삿된 길로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눈 감고 부처님과 제자들을 생각해 본다. ‘이런 경우 그분들은 어떻게 했을까?’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마음과 자세로 공부해야 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떤 어머니가 외아들을 두고 ‘어떻게 가르쳐야 사람이 될까’를 생각하다가 좋은 표준이 될 사례를 들어 가르치듯이, 나도 좋은 사례를 들어 그대들을 가르치려 하니 잘 들으라. 만일 어떤 청신사가 외동아들이 있다면 ‘질다장자(質多長者)나 상동자(象童子)같이 되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청신사의 표준이요 모범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서 수행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저 사리푸타나 목갈라나 같이 되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행자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어떤 청신사가 외동딸이 있다면 ‘난타의 어머니 구수다라(拘多羅)같이 되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든 청신녀의 표준이요 모범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을 나와서 수행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저 케마 비구니와 연화색 비구니와 같이 되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행자의 표준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리푸타와 목갈라나, 케마와 연화색을 표준으로 삼아 수행하라고 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들은 바른 법 배우길 좋아하므로 삿된 업을 지어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너희들 중 누가 그릇된 법에 물들어 삿된 마음을 내면 곧 삼악도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잘 생각하고 마음을 오로지 하여 바른 법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주의 무거운 보시는 실로 소화하기 어려워서 사람들을 도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수행자들은 그릇된 법에 물들어 집착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미 생겼거든 그것을 없애기에 애써야 한다. 수행자는 마땅히 이처럼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증일아함』 제4권 제9 「일자품(一字品)」제1-2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지구의 자전축을 연장하여 하늘과 만나는 점이 천구의 북극이다. 이 천구의 북극에 있는 별이 바로 북극성이다. 북극성은 항상 북극에 위치하므로 방위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사막이나 바다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들은 언제나 이 별을 보고 길을 찾았다.
불교 수행자에게도 북극성과 같은 존재가 있다.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다. 이분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자의 삶에 표준을 제시해 준다. 우리는 항상 그분들을 표준으로 정해놓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부처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씀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 만약 삿된 길로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면 눈을 감고 우리들의 북극성인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 금방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북극성’인 부처님과 그 제자들은 어떤 경우도 절대 욕심을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분들은 언제나 나누고 용서하며 지혜롭게 행동하는 분들이다. 그런 분을 마음의 북극성으로 삼는다면 오늘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말씨는 교정해야 할 것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유념할 일이 있는데, 북극성은 적도나 남반구에서는 관측이 어렵다. 이처럼 이미 삿된 길을 가는 사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한 불자라면 결코 삿된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 살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