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은 곳곳에 단종의 애환이 서려있는, 웬지 아련함이 묻어나는곳이다.
그 중에서도 600여년전 단종이 꿈에서 보았다는 금몽암을 찾아 길을 나선다.
아늑하고 완만하게 생긴 계곡의 초입에서 보송보송한 털이 예쁜 청노루귀를 만나본다.
금몽암을 둘러보고는 단종의 장릉 원찰이며 단종어각이 있는 보덕사(報德寺)를 찾는다.
영월 청노루귀
오늘은 황사가 아주 심한데다 구름까지 끼여있어
반짝이는 줄기의 털을 볼 수 없는것이 조금 아쉽다.
흰노루귀와 청노루귀
흰노루귀
현호색
금몽암(禁夢庵) 입구
금몽암은 보덕사의 부속 암자로 통일신라시대인 680년(문무왕 20)에
의상조사가 지덕암이라 이름지어 세운 유서깊은 곳이다.
그 뒤 이곳 암자를 단종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금몽암이라 고쳐 불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새로 세웠고,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되고
보덕사가 원찰이 되자 이 암자는 자연히 폐쇄되었고, 영조 21년(1745) 당시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관리하던 나삼이 다시 옛터에 암자를 지어 금몽암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금몽암 표석비
먼발치에서 본 금몽암
이곳에도 산수유가 피기 시작
금몽암 입구
사찰이라기 보다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아담한 가옥 느낌이 든다
금몽암과 우화루 편액
금몽암 전면으로 불상을 모신곳이다
사랑채를 닮은 우화루(雨花樓)
이 편액은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1868~1933)의 글씨이다.
해강 김규진의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용삼(容三), 호는 해강(海岡),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峰主人), 무기옹(無己翁), 백운거사(白雲居士) 이다.
18세 때 중국에서 8년간 서화를 공부하고 돌아와 고종황제의 명으로
왕세자 영친왕의 사부(師父)가 되어 글씨를 가르쳤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1915년 5월에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으며, 서법요결(書法要訣), 난죽보(蘭竹譜),
육체필론(六體筆論) 등을 펴내는 등 근대서화 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하였다.
산수유속의 금몽암
김규진은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 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天下奇絶) 초서,
법기보살 해서 등 각서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 사찰, 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金剛山萬物肖勝景) 등의 대표작이 있다.
금몽암 입구 수령 300여년에 가까운 호도나무(보호수)
금몽암 전경
회영목의 꽃(새콤한 향이 있다)
영월 태백산 보덕사
보덕사는 장릉 바로옆 계곡입구에 있는 사찰로 686년 의상조사가 창건,
또는 714년 혜각선사(蕙覺禪師)가 창건하였다고도 전해지는 고찰이다.
1456년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이곳 영월로 유배되자 노릉사라 개칭되었다.
그후 1705년(숙종 31) 한선선사와 천밀선사가 대종을 만들어 설치하며
장릉 보덕사로 고쳤으며, 1726년 (영조 2년) 태백산 보덕사라고 개칭하게 되었다.
단종어각(端宗御閣)
보덕사 단종어각에는 단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혼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단종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단종어진(端宗御眞)
단종어잔은 기록이나 전해진것이 없어 태조어진과 세종어진을 참조하여
추사(追寫)로 권오창 화백이 그렸는데, 원본의 규격은 가로 120cm, 세로 200cm로 비단에
채색되었으며, 2021년 4월 1일자로 선현 정부표준영정 제100호로 공식 지정되었다.
이곳 단종어각에는 영인본으로 2021년 12월 22일 봉안식을 개최하고 봉안하였다.
단종어진 좌우 벽면에는 백마를 탄 그림이 각각 걸려있다
단종어진과 백마그림
극락보전
사성전(四聖殿)과 칠성각
이곳 칠성각에는 단종이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하여
그 혼령을 추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셨다.
사성전 내부
사성전하면 보통 의상대사,원효대사,도선국사,진각국사를 말하는데
사성을 모신것은 보이지 않고, 불상 둘래에 16나한을 모시고 있었다.
보덕유치원 건물
천왕문
오층석탑
수령 600여년의 느티나무(보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