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다 늦은 오후 산책을 나가면서 현관 우편함에서 <오늘의 교육>을 꺼내어 배낭에 넣었다. 책이 너무 얉아 보였다. 목차를 살펴보았다. 엑기스만 모아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달만에 받아보는 책인데 조합원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나 학교 현장의 이야기 등 조금 소프트한 글도 좀 섞어서 책의 두께를 더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내일(어제의 시점으로) 조합원 연수차 해남에 갈 때 차 속에서 읽기에 딱 좋을만한 분량이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오늘 아침 새벽 같이 일어나 <오늘의 교육>을 읽었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서머셋 모음의 <인간의 굴레> 상하권과 <데리다의 평전>에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을 애써 누른 것은 조합원으로서의 의무(?)랄까 하는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특집 첫 주자인 채효정의 글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는 그 다음 꼭지로 가기 전에 책을 덮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솔직히 조금 흥분이 된다. 과도하게 말하는 것을(아니 과도하게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을 염려하는 것일뿐.) 허락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 만약 내가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이 아니었다면 이 소중한 글을 읽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조합원이었다고 해도 습관적으로 혹은 의무적으로 <오늘의 교육>을 읽지 않았다면.
책이 너무 얉아서 아쉬웠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채효정의 글의 가치와 무게에 압도되어 책이 얉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채효정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스위스 산악지대인 그라우뷘덴 주에는 다보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러면서 '다보스 포럼' 이야기를 꺼낸다. 그곳이 '4차 산업 혁명론'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다보스에 모인 세계 시민들은, 그들은 누구인가, 과연 나와 나의 친구, 이웃들은 이 국제 사회의 시민에 포함되는가.
'세계경제포럼'이라고는 하나 그 '경제인'의 범주에 노동자 대표는 없다. 마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재벌 총수들이 주도하는 전국 사장단 모임이듯이. 세계경제 포럼이란 단체는 유력 '경제인(자본가)'들을 회원으로 하는 비영리 재단이며 교섭단체다. 전경련과 대교협이 일개 교섭단체나 이익 단체의 지위를 벗어나 한국의 경제와 한국의 고등교육을 대변하고 대표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이 채효정의 문제의식의 시발이다.
이런 현실을 감추고 우리의 눈을 속이는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용어를 채효정은 '마술사의 언어'라고 부르겠다고 한다. 그 언어의 효과가 착시와 환상을 통해 환영을 현실로 믿게 만다는 마술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래학'은 학문 분야에 새롭게 등장한 마술학이라는 것이 채효정의 주장이다.
"대체 이 '미래 담론'은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 역사적 연원과 현실의 맥락을 묻지 않고 그냥 '미래 사회'와 '미래 교육'을 지금처럼 논해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미래 담론에서 미래라 하는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인류의 어떤 역사를 보아도 불과 10-20년 후를 '미래'라고 부른 적은 없다. 1970년대 수립된 경제 개발 계획들은 모두 5년, 10년. 20년을 염두에 둔 장기 연차 계획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그것을 모두 '현대'라는 시대에 포함시켰다.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일곱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라고 한다. 아이의 아이의 아이가 태어나 마침내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지금 현재의 사람들이 책임져야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오늘의 교육 2017. 7-8월호, 4차 산업 혁명론과 미래 없는 미래, 채효정> 23쪽
지난 주, 수요일 전사연(전북사회과학연마소) 모임에서 지젝의 <헤겔 레스토랑>을 함께 읽다가 '4차 산업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4차 산업 혁명'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었다. 그 이유가 우선 나의 무지 탓이었겠지만, 채효정의 글을 읽어보니 나의 "할말 없음"에 대한 또 다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우리가 "3차 혁명"이라고 불렀던 IT 혁명이 그렇듯이 인공지능을 운운하는 '4차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실체나 내용이 없는 일종의 허구나 기만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조금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했을 뿐이다.
"요즘 학교나 교육계에서도 4차 산업 혁명 어쩌구 하면서 미래를 대비하자고 하는데 나는 그게 정말 우습게 보여요. 지금 학교는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전교조 집행부 회의하기 전에 인문고 선생 두 분이 자기 학교 서울대 몇 명 보낸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지금 우리 학교 교육은 거기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어요. 교육이 교육답지 못하고 평가나 입시의 수단으로 전락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4차 산업혁명이니 교육의 미래니 하고 떠들어대는 것은 허위이고 기만이죠."
이런 교육에 대한 나의 조금은 막연한(흐릿한) 암담함이랄까 울분이랄까 분노랄까 하는 것에 대해 채효정의 글은 명확한 지점을 보여준다. '노동 없는 미래, 교육 없는 미래'에 대해서도 나는 많은 것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대다수 미래의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자 정신'은 가르치지 않고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동자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과 법과 제도, 노동자 이지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방법, 그런 것은 왜 교육현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가. 노동에 대한 혐오나 멸시를 조장하는 교육은 제도권 교육뿐만 아니라 혁신이나 미래 교육이란 이름 아래, 또는 대안 교육 현장에서도 은연중에 유포되고 있다. '노동을 거부하는 삶'을 옹호하는 분위기 말이다."(30쪽)
"긱 경제는 다수의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노동의 미래'다. 긱이란 1920년대 미국 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그날그날 필요에 따라 연주자를 섭외해 공연하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긱이란 물고기를 찍는 작살을 뜻하는데 말하자면 긱 경제는 '찍히는 만큼' 수입을 올리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우버택시나 에어이앤비가 긱 경제의 모델로 유명한 사례임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런 식으로 '긱 경제'란 용어를 들으면 문화 예술 분야나 서비스 분야의 자유 없종 종사자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런 형태 대표적 노동은 병원 간병인이나 가사 도우미, 대리 운전 기사나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 사회 전체를 인력 하청 공장으로 만들고 인간을 완전히 상품화하는 모델인데도 이런 용역 상품으로 소모되는 인간을,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설정하고 '자유 노동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가."(31쪽)
그렇다면 '노동 없는 미래, 교육 없는 미래'는 어떻게 수선되어야 하는가? 채효정은 "교육은 교육의 길로 가야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오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미래가 오고 일곱번째 아이가 온다"고 호소한다. 어찌 내가 흥분하지 않으랴!
"경제적 실패의 책임을 교육 현장으로 돌리고 교육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육은 교육의 길을 가야한다. 미래 산업에 필요한 인력 양성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미래의 시민, 비판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는 미래의 시민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시민적 삶의 조건을 무너뜨리는 원인들을 해결해 줄 대안을 미래에서 구하기보다 지금 개입해서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냥 미래가 이렇게 올 것이니 준비하자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오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함께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온다. 일곱번째 아이가 온다."
첫댓글 책이 얉아보였다? 얇아보였다로 수정합니다.
그간 너무 두껍게 만든 것으로 생각하죠 ㅋㅋ...
그럴수도 있겠네요. 내용이 많다고 다 읽는 것도 아닐테고요.
옛것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것을 알아야 스승이 될 수있다는 공자의 말이 와 닿습니다. 교육자는 끊이없이 공부해서 새로운 것을 찾은 연후에야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겸손하게 배우려는 교사들을 위한 매체라고 봅니다. (해남에서) 시스템만 탓하면 바뀌는게 아니라는 낭만샘의 말씀 기억하고 공감합니다.^^
고맙습니다~♡
4차산업혁명이라고 이름 붙이기 전에도 학교 없는 사회가 온다는 얘기를 늘 해왔습니다. 노동 없는 사회가 온다고 하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분위기인데, 이미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지 않나요? 기본소득에 대하여 논의하고, 배움의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그냥 계속하면 될 것 같아요. 4차 산업혁명 담론은 이런 주장을 정당화해주는 것 아닐까요? 물론 기업가의 입장에서는 이윤추구의 새로운 시장이 어디에 있는가만 바라보겠지만 우리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자는 말입니다.
저도 이번에 받은 '오늘의 교육'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좀 어렵긴 하지만...ㅎㅎ
문제는 이것을- "경제적 실패의 책임을 교육 현장으로 돌리고 교육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육은 교육의 길을 가야한다. 미래 산업에 필요한 인력 양성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미래의 시민, 비판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는 미래의 시민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 어떻게 교실에서, 학교에서 녹여낼 것인가? 하는 것인데...늘 만만치 않은 일임을 실감하는 1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