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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송석원(松石園)은 어디에 있을까요?
<p>얼마전, </p>
<p>역사스페샬에서 송석원시사를 설명하면서</p>
<p>찾고 찾아서 인왕산 절벽에 松石園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곳을 찾았지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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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image/big/p118.jpg">
<p>절벽에 松石園이라는 글씨가 보이나요 - 사진이 좀 작아서리 - -</p>
<p>우여곡절끝에 드디어 찾았지요.</p>
<p>구슬처럼 맑은 계곡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p>
<p>어느 호화주택의 뒷견에 초라하게 있더군요 - -:</p>
<p>왜 그런 몰골로 전락했는지,</p>
<p>아래에 잘 설명되어 있답니다. </p>
<p>나라가 망하면 우리네 모든 역사가 수모를 겪게 되지요.</p>
<p> </p>
<p>《송석원(松石園)》<BR><BR>인왕산 동록, 계곡이 깊숙이 들어가고 수림이 울창한 곳에 유명한 송석원이 있다. 이곳은 일찍이 정조조의 서민시인
천수경(千壽慶)이 집을 짓고 거처하며, <BR>「때로 흰 구름을 바라보고 종일토록 청산을 마주 앉았다.」 의 유한한 생활을 하여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로도 많은 시인 문사들이 이 인왕산 계곡의 명소를 찾아 자연풍광과 소회를 시로 옮겨 전한다. <BR>옥인동 마을에서
인왕산 골짜기를 향하여 들어가면 여러 골짜기 물이 석벽과 협곡을 돌고 돌아 내려오다가 자연 석벽에 「송석원(松石園)」이란 글이 새겨져 있는
앞으로 모여 흐르는데 물이 맑고 차서 이름 그대로 <BR>「옥류천(玉流川)」이라 하고 그 아랫마을 이름은 옥류동이라 하였다. 그러나 부근에
인가가 차츰 집중되면서 빨래 방망이 소리와 함께 맑던 냇물이 차츰 암갈색으로 변하여 옛날의 청아한 운치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서민시인
천수경이 살던 송석원터를 중심으로 서민 아닌 귀족, 그 중에서도 합방조약에 옥쇄를 찍어 주고 일제로부터 많은 상금과 자작 칭호까지 얻은 것으로
전해지는 윤덕영(尹德榮)의 호화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BR>이곳에 「아방궁(阿房宮)」으로 불리워지는 윤덕영의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1914년부터의 일이었다. 집의 호화사치함이 옛날 중국 진시황제의 아방궁 같다는 데에서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BR>원래
이 집의 설계는 전에 주불공사로 있던 민영찬(閔泳讚)이 귀국할 때 가지고 왔던 프랑스 설계사가 작성한 도면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데 설계가
복잡하고 주인의 감독이 까다로와 도중 몇 번인가 중국인청원업자가 바뀌고 나중에는 일본인 청원업자에 의뢰하여 결국 만 4년의 세월이 걸려
완성되었다고 한다. 건평 600여평, 40여개의 방이 모두 호화롭게 장식되었으며 이 건물을 윤덕영은 「송석원」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집
주위에는 다시 수십간의 하인들 방을 짓고 수만평에 달하는 부근 일대의 토지를 점령하여 문자 그대로 「옥인동 만리장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평이
분분해지자 그는 다시 「홍만종교 본부」라는 간판을 가장하기도 하였다. <BR>그러나 부귀영화는 순간적인 것이어서 1941년에 윤덕영이 죽은
후로는 자손들이 이어가지 못하여 집이 일본 재벌 삼정회사로 넘어가서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다만 그 위 인왕산 높은 봉우리
만이 전과 같이 우뚝서서 인세의 무상을 내려다 보고 있을 뿐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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