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수가 노란 춤쟁이 제 50 장

제 50 장 진우청과 유화결은 몸을 날려 유화성이 탄 배로 건너갔다.   “ 배를 저쪽까지 좀 저어주게.”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유화성은 진우청에게 말했다.   “ 뭐 하시려고요?”   진우청은 내키지 않는 투로 물었다.   “ 건져 올려야지.”   “ 그럼 또 죽이려 들 텐데요.”   진우청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 그럼 다시 처박아야지.”   “ 언제까지 말이오?”   “ 내 사람이 될 때까지.”   “ 끝까지 고집 피우면?”   “ 세상 사람들이 다 자네 같진 않다네.”   유화성의 그 대답을 끝으로 진우청은 입을 다물고 노로 수면을 쳐서 혈랑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배를 움직였다.이미 근처 백 장 이내에 다른 유람선들은 없었다. 혼비백산 멀찌감치 사라진 것이다.일격을 당한 상태에서 물에 빠진 그들은 죽은 듯이 누워서 둥둥 떠 있거나 바둥거리기는 해도 호숫가까지 갈 여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유화성은 맨손을 내밀었다.   처음 끌어 올려진 대원은 제일 나중에 표풍붕산의 초식에 한꺼번에 당한 대원 중 한 명이었다.   압도적인 무위 차!   그걸 고스란히 느끼고, 마지막 순간 사정을 봐주었다는 것을 느낀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손을 내밀었다.그 다음으로 건져진 대원은 표풍무형의 초식에 넋을 잃고 처음의 투지를 잃은 채 물속에 빠진 여인이었다.   파앗-   그녀는 손을 내미는 유화성을 향해 일검을 휘둘렀다.   “ 좋아! 눈빛이 다시 살아났으니 살려주지.”   간단하게 일검을 피한 유화성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무를 뽑듯이 건져 올렸다. 그리고는 스스럼없이 등을 돌리며 다른 대원들에게로 향했다.유화성의 등이 암벽 같게 느껴진 그녀는 낮은 한숨과 함께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때로는 재차 삼차 처박고, 때로는 단번에 끌어올리기를 반복하며 혈랑대원들을 모두 끌어 올린 후 유화성은 자신의 검에 어쩔 수 없이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또한 진우청에게 맞아 어디 부러진 사람은 뼈를 맞춰주며 분주히 움직였다.   진우청은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노로 수면을 치며 배만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노를 언제든지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배가 호숫가에 도착했을 때 밀려들었던 사람들이 일시에 흩어졌다. 이곳 호수에서 이런 광경이 벌어지는 것을 처음 본 사람들이었다.내성에서는 진우청 일행의 등장으로 인해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바깥 세상이나 마찬가지인 외성, 그리고 그 외성 밖에 있는 호수는 별천지였기에 이런 상황은 낯설었다.   잠시 후 오무평의 연락을 받은 무사들이 달려왔다. 기동이 불편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져온 들것에 실려 가고, 거동에 이상이 없는 자들은 유화성의 손짓과 함께 알아서 흩어졌다.   장내가 모두 정리되었을 때 오무평이 지나가는 행인처럼 다가와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 신세를 졌습니다.”   유화성이 고개를 숙였다.   “ 나야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지. 그러니 그 인사는 비원각주에게 하게.”   가볍게 답한 오무평은 진우청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 싸우는 방식이 예전보다 훨씬 무식해졌더군.”   오무평은 진우청을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뭐가 이쁘다고!”   오무평은 그 말과 함께 총총히 사라졌다. 최대한 빨리 보고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이젠 모두 끝난 셈인가?”   오무평의 뒤를 이어 제일 먼저 유화성과 싸웠던 칠지검 임전성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 일단은......”   유화성이 말끝을 흐렸다. 가장 골치 아픈 자들과의 싸움은 끝났지만 모두 다 싸운 것은 아니었다.반 정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조금 전에 싸웠던 대원들처럼 자신에게 극단적인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을 뿐, 언제 돌변하여 검을 들이댈지 몰랐다.   “ 이젠 큰 신경 안 써도 될 걸세.”   임전성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 어떻게 장담하나?”   “ 그들 마음을 알거든. 우린 우리를 확실히 꺾어줄 사람을 원했지. 그러면서도 늑대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접해 줄 사람을 말일세.대주직을 맡게 되면 제일 먼저 혈랑대란 이름부터 바꿔야 할 걸세. 우린 늑대가 아닐세. 사람이지.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눈물 흘리는.... 단지 그걸 단 한 번도 제대로 표출할 자유를 얻지 못했네.그래서 결국 폭발했지 대원들을 건져 올리는 자네의 맨손... 따뜻해 보였네. 예전엔 무조건 혼자서 기어나와야 했지. 후후!”   칠지검 임전성은 왔을 때처럼 다시 건들거리며 사라졌다. 그 모습은 피에 젖은 늑대가 아니라 영락없는 건달의 모습이었다.   진우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서역 특산물 판매 사업권이 하남진가와 하가 두 집안으로 넘어온 것이다. 그것도 애초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는 되는 물량과 함께 가격 면에서도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장사를 하고, 협상을 할 때면 언제나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약간 터무니없다 싶은 조건을 제시한다. 물론 상대 쪽도 그렇게 한다. 그러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며 절충점을 찾아간다.   이번이 진우혁은 동생 진우청의 영향력을 믿고 약간이 아닌, 꽤나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했다. 물론, 거절당하고 절충안이 제시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순간 진우혁과 하수린은 사기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잠시 협상을 멈춘 후, 대동하고 온 가솔들과 의논까지 했다. 그 정도로 파격적인 성과를 거둔 것이다.   “ 이게 모두 네 덕분이다.”   숙소로 돌아온 진우혁은 진우청을 덥석 끌어안으며 고함을 질렀다. 하수린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을 같이 안았다. 아니, 두 사람에게 매달렸다.   “ 이런 날은 술이 빠질 수 없지. 린매! 어서 술을 준비해. 그리고 또.... 아! 네 친구도 불러서 거나하게 한잔하자꾸나!”   “ 그 얼음작대기 불렀다가는 분위기 다 망칠 텐데.”   유화결을 부르자는 형의 말에 진우청은 손을 흔들었다.   “ 누가 망친다고 망쳐질 기분이 아니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불러서 한잔하자꾸나.”   진우혁은 벌써부터 코가 삐둘어지게 마신 사람처럼 행동했다.   “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수린이 목소리를 높이며 방을 나섰다.   “ 형, 그런데......”   약간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진우청이 말문을 열었다.   “ 뭔데?”   “ 저번에 한 약속 잊지 마.”   “ 무슨 약속?”   진우혁은 기억하지 못했다.   “ 왜 저번에 묶이면서 한 약속 말이야.”   “ 응? 뭐야? 그러니까.... 향후 십오 년 동안 널 만났단 사실을 집에는 알리지 말라는 이상한 약속 말이야?”   “ 맞아! 그 약속이야.”   “ 농담 아니었어? 무슨 그런 요구가 다 있어?”   진우혁은 눈을 들어 의혹 어린 시선을 보냈다.   “ 십오 년이란 말은 그냥 해본 소리고.... 내가 스스로 찾아갈 때까지는 아무 말 하지 마! 당분간은 집에 돌아갈 형편이 아니야.그러니 예비 형수에게나 같이 가솔들에게나 입단속 잘해줘. 약속한 거잖아?”   진우청은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북제성주를 만나고, 이여옥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그리고 어쩐지 이여옥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촌각을 다투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부님의 귀가 명령을 받으면 십중팔구는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 알았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런데 이곳 천주가 너한테 뭘 요구한 거냐? 그것이 이 약속과 관계있는 것이냐?”   “ 전혀 상관없지 않지. 그 노인데 부탁을 들어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진우청은 적당히 둘러댔다.   “ 그 노인네?”   “ 노인 맞잖아?”   “ 남패천 천주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너밖에 없을 것이다.”   진우혁은 실소를 토했다.   “ 이곳 사람들 천주니, 내 천주는 아니니까.”   잠시 후 하수린이 준비해 온 것들을 차려 놓으며 술자리를 마련했다.바깥 세상도 아니었지만 오히려 바깥 세상보다 더 풍족하고 편리하게 모든 것이 관리되는 남패천인지라 잠깐 사이에 고급 주루 못지않은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물론, 얼음 작대기 유화결도 왔다. 그리고 더 뜻밖인 것은 그동안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던 유화성도 모습을 드러냈다.   “ 술 맛이 돌이온 겁니까?”   진우청은 대뜸 물었다.   “ 아직 아닐세.”   “ 그럼?”   진우청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유화성은 진우혁을 쳐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 며칠 후면 귀가한다고 들었습니다.”   “ 덕분에 사업도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우청이 몸도 이젠 걱정할 것이 없으니 더 늦기 전에 떠나야지요. 집에 가면 벌써 첫눈이 내릴 겁니다.”   진우혁은 빠르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저보다 연배시니 앞으로는 말씀 낮추십시오. 저도 형님으로 대하겠습니다.”   진우혁은 자신에게 언제나 깍듯이 대하는 유화성이 부담스러운지 그렇게 제안했다.   “ 그렇게 하지. 그래야 앞으로도 편할 테니까.”   유화성은 고개를 끄덕거린 후 뜻 모를 말로 여운을 남겼다.   “ 앞으로 언제 본다고 그런 말씀입니까?”   진우청이 피식 우승며 끼어들었다.   “ 자네 형님을 내가 바래다주기로 했네.”   “ 그게 무슨?”   뜻밖의 말에 진우청은 고개를 돌려 유화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 내 생각이기도 하고 천주님 지시이기도 하지. 아울러 무적대를 훈련시킬 기간이기도 하고....”   유화성은 서두를 꺼낸 후 설명을 이었다.   아직은 아니지만 진우청이 남패천에서 점점 큰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동방회나 서왕문에서는 진우청을 한층 더 눈엣가시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자연히 진우혁도 남패천을 나가는 순간부터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 위험성을 배제하지 못한 유화성은 천주에게 무적대의 수련을 겸한 진우혁의 배웅을 요구하며 허락을 얻은 것이다.   무적대는 혈랑대의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인데 칠지검 임전성의 말대로 호수에서의 결투가 있은 후, 더 이상 유화성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일부는 고혼이 되었고 일부는 혹독하게 당했다. 그리고 또 일부는 임전성처럼 마음이 통했다.거친 야수들로 사육당해 몸과 마음에 상처밖에 안 남았지만 자신들보다 더 큰 상처를 감추고 있는 유화성에 차츰 이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규합이 되자 그들은 혈랑대란 이름을 버리고 무적대란 옛 이름을 되찾았다.   유화성은 자신을 따라온 유가검보 무사들도 무적대에 편입시킨 후 빠르게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행보로 세상 밖에서의 수련을 택해 진우혁의 귀가 행로와 겹치게 한 것이다.   “ 그렇게 한다면야 금상천하지요. 사실 은근히 걱정되었는데..”   “ 킥!”   “ 금상천하가 아니라 금상첨화 아니냐!”   “ 형은 다 좋은데 내 말에 꼬투리 잡는 건 정말 맘에 안들어.”   진우청은 고함을 지른 후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문자는 틀려도 뜻은 통한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었고, 큰 걱정거리가 해결되었다.   이젠 자신 역시 구양천의 뜻에 따라 북제성주를 만날 일만 남았다. 그 노인을 만나면 사부와 창룡금시 등에 얽힌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그 길이 황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보다 몇 배는 더 험난한 길이 될지 몰라도 어쩐지 자신이 가야 할 길 같았다.   그 이후엔 항주, 서주, 소호, 태호 구경이 가능할까?   그리고 이여옥과의 만남도......   진우청은 긴 한숨과 함께 술을 한잔 벌컥 들이켰다.“ 여행을 떠났다고?”   다음날 오후 고함과 함께 진우청은 튕기듯이 일어났다.   백운, 해천 두 노인이 남패천을 떠나고 그 다음은 진우혁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유화결이었다. 그것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여행을 좀 하고 돌아오겠다는 서찰과 함께......   진우청은 잠시 유화경을 쳐다본 후 초조한 속마음을 감추며 소식을 전하러 온 시녀에게 사정을 물었다.   유화결은 어제저녁 술을 좀 많이 마셨다. 얼음 작대기 같은 놈에겐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연극이었던 것 같았다.   많이 취한 모습으로 숙소에 도착한 유화결은 내일은 늦게 일어날 테니 부르기 전에는 문을 열지 말라고 시녀에게 당부했기에 시녀는 그렇게 했다.그런데 점심때가 한찬 지난 후에도 일어나지 않아 시녀는 문을 열어보았고 서찰만 발견했다는 것이다.   “ 우청 오라버니는 무슨 말씀 듣지 못했나요?”   유화경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 그놈이 언제 속에 있는 말을 남에게 하는 놈이라야 말이지.”   진우청은 얼버무린 후 서찰을 직접 읽었다.   머리가 복잡해 며칠 바람을 쐬고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러려니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그놈의 고민을, 아니, 그놈의 좌절을 자신만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녀석의 야반 잠적은 걱정에 더해 불안한 마음까지 들게 했다. 진우청은 후회막심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녀석의 몸 상태를 알았을 때 즉시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유화경이나 유화성에게 얘기하여 함께 의논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워낙 놈의 태도가 강경하여 잠시 미루고 있었는데 일이 터지고 만 기분이었다.   “ 언제 사라졌는지 알아봤어?”   진우청은 걱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유화경에게 질문했다.   “ 구양 소저에게 물어봤는데 어제 술자리를 파한 직후 나갔나 봐요. 미리 작정을 한 것 같아요.”   “ 젠장!”   진우청은 버럭 역정을 토했다.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해서였다. 자기 배 안 고프면 남의 배고픈 줄 모른다는 옛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내가 무딘 놈이다 보니 남들도 그렇게 무딜 것이라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전우청이 전에 없이 초조해하자 유화경은 더욱 걱정스런 모습으로 물었다.   “ 무슨 일이야 있겠어? 괘씸하니까 그렇지 나한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혼자만 유람하겠다고....”   유화경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진우청은 말꼬리를 돌렸다.   “ 여비는 충분히 챙겨갔겠지.”   “ 그건.....”   유화경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자기 일에 바빠 유화결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작은 오빠의 상처가 다 나았는지 어땠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흉터는 남았지만 외상은 다 아물었기에 됐다고 생각했다.어떤 때는 유화결이 화살을 맞았다는 생각조차 잊고 화약 제조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러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작은오빠를 찾았다.또 가문의 참상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투정을 부리거나 괜한 한풀이를 해댔다.   그럴 때마다 작은오빠는 냉정한 표정을 했지만 부족함없이 자신을 다독거려주었다. 작은오빠 유화결은 언제나 그랬다.겉모습은 얼음 작대기였지만 오히려 큰오빠 유화성보다 훨씬 편했다. 때때로 성질을 부리며 꽥꽥거려도 자신의 부탁은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들어주었고, 항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있을 때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매일 마시는 물처럼, 공기처럼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다.특히 이번에 겪은 가문의 비극에서도 작은 오빠는 자신의 가슴은 문드러져 온 혈맥 속에 썩은 피가 고였지만 동생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그런 작은 오빠를 보며 용기를 얻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자신은 작은 오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고 마음 한조각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그랬기에 언제나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젠 작은오빠가 곁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 울타리가 얼마나 크고 든든했는지 실감이 갔다.   “ 작은 오빠!”   유화경은 갑자기 머리 속을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에 흠칫 몸을 떨며 비명처럼 외쳤다. 뒤이어 원인을 알 수 없는 먹구름 같은 불안감이 전신을 엄습해 왔다.조금 전까지는 서찰을 내용대로 한 며칠 바람을 쐬고 돌아오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불현듯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얼굴만 잠깐 찡그린 후 제갈 길을 갈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서찰 한 장만 남기고 도망치듯 사라졌다는 것은.....?   “ 우청 오라버니! 작은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죠? 그렇겠죠?”   유화경이 허둥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 일은 무슨..... 워낙 융통성이 없는 놈이다 보니 생고생을 할까 걱정이 돼서 그러지.”   진우청은 오히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했다.   “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는 이럴 오빠가 아니에요! 우청 오라버니! 작은오빠 찾아봐 주세요! 제발요!”   유화경의 표정이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 핏줄은 서로 통하는 것인가?’   자신의 연극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느낀 듯 사색이 되어 허둥대는 유화경을 보며 진우청은 가슴이 무거워져 오는 기분을 느꼈다.유화경의 말대로 그놈은 뭔가 심상찮은 결심을 하고 움직인 것이다.   “ 너무 걱정 마! 이 집 주인 노인에게 부탁해서 그놈을 당장 끌고 오게 할 테니. 이곳 무사들이 쫓아간다면 그놈은 뛰어봤자 벼룩이야.”   유화경을 달램 진우청은 얼른 신형을 일으켰다. 그러나 진우청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유화결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비원각의 노력으로 외성까지는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단순히 바람이 쐬러갔다면 그럴 수가 없었다. 사전에 치밀히 준비하고 변장을 하거나 어떤 다른 행렬들 틈에 숨어들어 같이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진우청은 비원각주에세 부탁해 추격대로 유화결을 쫓게 했다.  외부로 나가는 짐 마차 속에서 꼬박 이틀을 보낸 유화결은 어둠을 틈타 신형을 날렸다.짐 마차를 모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완전히 벗어난 유화결은 품속에서 작은 보퉁이를 꺼냈다. 그 안에는 암행과 잠행에 꼭 필요한 것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요 며칠 동안 꼼꼼히 준비한 것들이었다.   유화결은 그것들 중에서 지도를 꺼내 땅바닥에 펼쳤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있는 시각이라 지도 위의 글과 그림들이 세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세한 것은 필요없다. 우선은 이곳이 어딘지 대략적인 방위만 잡으면 되었다.   유화결은 안력을 돋우어 지도의 내용을 머리 속에 각인시킨 후 주변의 정물들을 훑었다.   산과 강, 들, 마을 네 가지의 방위만 가늠해도 충분했다. 그것과 지도 위의 그림들을 맞추면 방향이 나오는 것이다.   “ 쩝!”   한참 동안 머리 속에 각인된 지도를 떠올리며 방향을 가늠하던 유화결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이 가려는 방향과 정반대로 온 것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남패천을 빠져나오는 게 목적이었다.그래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상관 않고 마차 속에서 이틀 동안 죽은 듯이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마차를 꼭 집어 의심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자신의 행적을 찾기 힘들 것이다.   행적이 노출되는 가장 빠른 길은 인간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 인간들이 없는 곳으로만 움직일 생각이었다.천하사패의 하나인 남패천, 그리고 그곳의 눈과 귀인 비원각이란 곳에 괴물 같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이 득실거리는지 잘 알기 때문에 아무리 조심을 해도 모자랄 일이다.   방향을 가늠한 유화결은 건포를 꺼내 입 안에 넣었다. 질긴 육포가 처음에는 나무껍질처럼 입 안을 찔렀다.이윽고 그것이 조금 물렁해지자 맛이 느껴졌다. 뒤이어 갈증을 느낀 유화결은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모두 마셨다. 밖으로 나온 이상 아낄 필요가 없었다.   ‘ 문제는 먹을 음식인데.....’   이틀 동안은 육포로 견뎠지만 이젠 진저리가 쳐진다. 우선은 산속에 있는 과일이라도 좀 따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유화결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켰다.   막 한 발짝 움직이려던 순간, 유화결은 급히 신형을 굳혔다.   사방을 조여오는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유가검보의 유화결 공자 맞으시오?”   포위하듯 사방에서 다가오던 네 명의 사내 중, 한 사내가 억양없는 소리로 물었다.“ 곰보다 더 고집 쎈 놈!”   진우청은 유화결의 서찰을 들고 고함을 질렀다. 소리없이 사리지긴 했지만 남패천 비원각의 이목을 끝까지 따돌릴 수는 없었던지 결국 흔적이 발각되었다고 했다.그 소식을 들은 진우청은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유화결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 워낙 완강하게 고집을 부려서 도저히 데려올 수 없었다고 했다.조인도 아닌 사람을 반병신으로 만들어서 끌고 올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들은 유화결이 써준 서찰과 은하검을 받아왔다.   서찰에는 이왕 나온 김에 화산으로 간다고 적혀 있었다. 그때까지는 위험한 짓 하지 않고 서생으로 변장해 가겠다며 은하검을 풀어 서찰과 함께 보냈다.   무사의 생명인 검까지 넘겨주며 고집을 피우는 사람이라 더 더욱 데려올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비원각 무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 숙소로 가버렸다.   “ 휴우-”   진우청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지만 유화결이 왜 화산으로 가려는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끊긴 혈도를 치유하고 화산에서 수련을 할 수도 있었고, 그곳에서 상황을 만들어 다른 방식으로 복수를 하려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돌아오지는 않을 놈이었다.   “ 검도 제대로 못 휘두르는 놈이....... 맞아 죽든 굶어 죽든 맘대로 해라!”   버럭 고함을 지른 진우청은 고개를 흔든 후 침상에 드러누웠다.바보도 아닌 놈이니, 더구나 검을 차지 않고 서생으로 변장까지 하겠다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었다.유화성에게 모든 사실을 말해야 할까 생각하던 진우청은 유화결의 표정을 떠올렸다.자신이 유화결의 몸 상태를 눈치챘을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던 놈의 모습은 처절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그런 놈의 당부를 안 들어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혼자 삭이자니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 악연이로고......”   절명자 오무평의 말투를 흉내 낸 진우청은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며칠 후 성공적으로 사업을 끝낸 진우혁이 집을 향해 남패천 성문을 나섰다. 그들 곁에는 아직 불안해 보이긴 했지만 서서히 예전의 위용을 되찾아가는 남패천의 무적대가 함께 했다.   이백 명가량의 무적대!   완전히 기강이 무너지고 뇌옥에 갇히기까지 했지만 개개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와 살기는 주변을 숨 막히게 했다.   “ 괜찮겠나, 자네?”   천주를 대신해 배웅 나온 태상호법 나유백이 걱정스럽다가보다는 차라리 혼란스런 표정으로 유화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에게 있어 유화성의 모든 행동은 혼란 그 자체였다.   진우청과 백염 노인이 혈투를 벌이는 사이, 구궁팔상진을 파훼하며 기관 조종실을 향해 쏘아지던 유화성의 움직임과 총명함은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런 얼마 후, 대뜸 뇌옥에 갇힌 혈랑대를 풀어주라고 했을 땐 총명한 놈이 아니라 미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그들이 무방비로 풀려나서 제대로 설치며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나유백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그런데 혼자서 그들을 감당했다. 마지막 싸움에서는 그 곰 같은 놈이 조금 도와주긴 했지만 말이다.   놀란 가슴이 진저리치기도 전에 이젠 이 마귀 같은 놈들을 데리고 아예 남패천 밖으로 나가겠다는 제안은 터져 나오는 경호성을 삼키는데 큰 힘을 소모하게 했다.   그동안 남패천의 삼엄한 경계망 안에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뇌옥에서도 마찬가지였다.그런데 그런 놈들을 몽땅 끌고 들판으로, 세상 밖으로 나간다면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상이 아닌 놈들은 창살 속에 가둬놓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이렇게 풀어놓으면 사단이 생긴다. 제압되고 승복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연극일지도 몰랐다.이곳 밖으로 나가기 위해 속마음을 숨기고 꾹 참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남패천을 완전히 벗어난 후엔 미친 늑대가 되어 다시 이빨을 들이댈 수도 있는 것이다.   나유백의 눈에 그런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 괜찮을 수가 없겠지요.”   “ ....?”   유화성의 대답에 나유백은 또 한번 혼란함을 느꼈다.   “ 무슨 소린가?”   나유백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 지옥을 경험하고 올 생각입니다. 그때는 무적대에서 지옥대로 이름도 바꿀 생각입니다.”   유화성은 나직하게 말했다. 무심한 눈빛이었지만 그 속에는 어떤 것도 꺾을 수 없는 의지가 엿보였다.   “ 허허! 네놈이야말로 진정 미친놈이로다!”   나유백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몸조심해. 형!”   진우청은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진우혁과 하수린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하남성 본가까지는 몇 달이 걸리는 먼 길이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도착하면 다행이지만 폭설이라도 만나면 큰 고생을 할 것이다.   “ 남패천 무적대와 같이 가는 데 무슨 걱정이냐. 내 걱정 말고 너나 조심해라. 이 말썽꾸러기 녀석아!”   진우혁은 진우청보다 훨씬 더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튼튼해 보여도 동생은 동생이었다.이젠 동생의 무위가 절대로 하수가 아님을 알지만 그건 그만큼 위험도 많이 따른다는 말이었다.특히 남패천주가 동생에게 어떤 일을 시킬 지 못내 안심이 안 되었다.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자신의 가문에 이런 막대한 이익을 넘겨주었다면 반대급부로 동생에게 그만큼 힘든 일을 시킬 것이다. 그건 정해진 이치였다.   “ 그런데... 형!”   진우혁의 걱정과는 아랑곳없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진우청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뭔데?”   “ 우리 외갓집이 어디지?”   “ 외갓집?”   이런 상황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에 진우혁은 잠시 혼란을 느꼈다.   “ 혼인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사고무친이셨는데 외갓집이 어디 있어. 몰랐어?”   잠시 후 진우혁은 대답을 해주면서도 질문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 워낙 멀어 한 번도 못 가본 줄 알았지만... 아예 없는 줄은 몰랐는걸....”   진우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냐, 뚱딴지같이?”   “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진우청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 녀석! 싱겁긴.... 다시 한 번 당부하는데 무슨 일을 벌일 때는 한 번만이라도 앞뒤 재어보고 움직여라, 그래야....”   “ 그래야 손발이 고생을 덜하고, 만수무강의 지름길에.. 뭐 이런 얘길 하려면 사양하겠어. 할아버지로부터도 귀에 봇이 박히게 들은 소리니까.”   진우청은 손을 흔들며 진우혁의 말을 잘랐다.   “ 푸후후! 귀에 못이 박혔으면 한 번쯤은 행동으로 표출될 만도 한데..... 참 신기해요.”   하수린이 놀리듯 말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그녀의 눈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잠시 더 작별 인사가 나눠지고 진우혁과 하수린, 그리고 그들 가문의 가솔들을 실은 마차는 유화성이 이끄는 무적대의 기마 행렬과 함께 남패천을 떠났다.   “ 모두 떠났는가?”   남패천주 구양천은 자신 대신 배웅을 하고 돌아온 나유백을 보며 말했다.   “ 한참 전에 떠났네. 그런데 종잡을 수가 없네.”   나유백은 여전히 염려스런 안색이었다.   “ 뭐가 말인가?”   “ 혈랑대를 맡은 그 아이 말일세. 지옥을 맛보고 온다고 하면서 떠났는데 당최 그게 무슨 말인지.....”   “ 후후!”   나유백의 말에 구양천은 나직하게 웃었다. 의미심장하면서도 신뢰감이 깃든 그런 웃음이었다.   “ 뭔가, 그 웃음은? 무슨 암계가 있는 것인가?”   “ 영특한 아이야. 그 아이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무적대는 몇 배는 더 강해질 걸세. 아울러 놈들의 뒤통수도 크게 한번 치겠지. 후후!”   구양천의 웃음소리가 더욱 낮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