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째 외길 123년 기업 日 '제브라'
이시카와 신이치 사장 인터뷰
'인간의 감성, 필기구가 자극
韓日 소비자가 가장 까다로워
1897년 문을 연 일본 필기구 기업 제브라는 미쓰비시연필, 파일레럿과 함께 필기구 시장의
'삼대장'(御三家) 중 한 곳으로 꼽힌다.
100년 넘게 필기구 시장에서 변신과 성장을 거듭했다.
손 글씨와 점점 멀어지는 스마트폰 시대에도 꾸준히 매출을 늘여가는 중이다.
지난해 매출은 231억앤으로 5년 전보다 13% 늘었다.
3대째 회사를 이끄는 이시카와 신이치(石川眞一.69) 제브라 사장을 최근 화상 인터뷰로 만나
펜으로 장수하는 비결을 물었다.
'세상이 바뀌면, 펜도 바뀐다'
-100년 넘는 장수 비결이 궁금하다.
'품질 좋은 펜을 내놓으면 반드시 팔린다.
펜을 사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변신도 했다.
120년 전 창업 당시 주력 상품은 펜촉이었다.
일본 최초로 강철 팬촉을 만드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펜촉만 팔면 100년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착각 이었다.
아버지가 사장에 취임했을 즈음 볼펜이 등장했다.
1960년대의 일이다.
필기구 시장의 변화를 감지했던 그는 미국, 유럽에 건너가서 어렵게 배워 볼펜 기술을 들여왔다.
1998년 내가 사장이 됐더니, 세상은 또 바뀌어 있었다.
볼펜만 팔아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젤잉크, 유성마커, 샤프 등 다양한 필기구를 개발하고 팔아야 했다.
우리 회사는 경영자가 바뀔 때마다 주력 상품이 바뀌는 특징이 있다.'
-중국 총리가 펜 기술이 부족하다 한탄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최근 중국 필기구 품질도 저점 좋아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 소비자가 더 좋은 필기구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펜을한국과 일본 소비자 특유의 공통점이 있따.
만들 수 있는 이유도 우리의 주요 고객이 펜 품질에 대해 매우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모두 100엔(약 1100원)짜리 필기구를 살 때도 굉장히 깐깐하게 고른다.
잉크를 끝까지 쓸 수 있는지, 잉크가 중간에 끊겨 흰줄이 생기는지 등 다각도로 품질에 집착한다.
일본과 한국의 고객센터에선 하루에도 여러 건의 문의를 받는다.
미국 소비자들은 펜에 대해서 그냥 무덤덤하다.
한국, 일본 소비자의 특징이 결코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소비자 요구를 극복해야 선택받고, 그렇기 때문에 게으를 수가 없다.'
-아버지가 지켜달라고 강조한 경영철학이 있나.
'자만하지 말라는 것이다.
회사 전체가 겸손함을 강조한다.
매출이 늘거나 상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때 반드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펜을 지탱하는 건 인간이다'
지난해 나온 제브라의 신제품 '블렌'은 800만 자루가 팔렸다.
이 펜은 '저소음' 기술을 탑재해 글씨를 쓸 때도, 심지어 펜을 흔들어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는 "연간 1억 자루 정도 팔아야 '히트 상품'이라 친다"고 했다.
-10년 후 제브라는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까.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고 본다.
회사를 맡은 다음 세대가 내려야 할 결정이다.
난 제브라가 필기구에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가지 호가실한 것이 있는데 펜의 사용자는 100% 인긴일 것이란 사실이다.
10~20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제브라를 지탱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한다.'
인터뷰 중 최근 필기구 시장의 트랜드를 묻자
아시카와 사장은 품에서 주섬주섬 자사 제품인 '체크펜'과 종이를 꺼내 보였다.
체크펜의 특징은 펜으로 덧칠한 부분 위에 초록색 시트를 얹으면 덧칠한 부분만 제외한 채 보이는 기능이다.
그는 '펜을 만들 땐 무엇보다 '쓰기 쉽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요즘은 라이프스타일에 밀착한 '플러스 알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 체크펜의 '플러스 알파'는 무엇일까.
그는 영어 단어 등을 외울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고 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달라진 소비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우리 회사 제품 중 '마일드라이너'란 제품이 있다.
잉크가 옅은 편이라 눈이 피로하지 않고, 펜 모양도 귀엽다.
10년 전 출시했을 땐 잘 안 팔렸던 상품인데, 3~4년 전부터 갑작스레 매출이 늘었다.
일부 소비자가 이 펜으로 그림을 그린 후 인스타그램에 펜과 함꼐 귀여운 사진과 영상을 올려준 덕분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소문을 탄 것이다.
과거 소비자는 단순히 쓰기만 했다면, 21세기 소비자는 자발적으로 서포트를 해준다.
우리 세대에서는 상상 못 할 소비 방식이다.'
-미래에 필기구는 어떻게 진화할까.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필기구로 글씨를 쓸 때와 스마트폰 등
디지탈 기기로 문서를 남길 때 쓰이는 뇌의 부위는 전혀 다르다.
똑같은 문서를 만들어도 필기구로 쓰면 기억에 조금 더 잘 남지 않나.
필기구 사용의 이점(利點)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여러 뇌 과학 연구를 토대로 언젠가 '영어 단어가 잘 외워지는 필기구' '뛰어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필기구'
이런 상품도 만들 수 있다고 상상해본다.' 남민우 기자